세상사는 이야기/삼국사기

제11권(券第十一) 신라본기(新羅本紀) 진성왕(眞聖王)

7390882@hanmail.net 2019. 12. 31. 16:21

진성왕(眞聖王)


진성왕(眞聖王)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曼)이고 헌강왕(憲康王)의 누이동생이다. 최치원(崔致逺) 문집 제2권의 사추증표(謝追贈表)에는 “신(臣) 탄(坦)은 아룁니다. 엎드려 칙지를 받자오니 죽은 아버지 응(凝)을 추증해 태사(太師)로 삼고, 죽은 형 정(晸)을 태부(太傅)로 삼았습니다.”라고 하였고, 또 납정절표(納旌節表)에는 “신의 맏형 국왕(國王)(晸)이 지난 광계(光啓) 3년(887) 7월 5일에 갑자기 성스런 시대를 버렸고, 신의 조카 요(嶢)는 아직 돌도 되지 않았는지라, 신의 둘째 형 황(晃)이 임시로 나라를 다스리던 바, 또 1년도 넘기지 못하고 멀리 세상을 떠났습니다.”라고 하였다. 이로써 말하자면 경문왕(景文王)의 이름은 응(凝)인데 본기에는 응렴(膺廉)이라 하였고, 진성왕(眞聖王)의 이름은 탄(坦)인데 본기에서는 만(曼)이라 했다. 또 정강왕(定康王) 황(晃)은 광계(光啓) 3년에 죽었는데 본기에는 2년에 죽었다고 하니, 모두 어떤 것이 옳은지 알 수 없다.

죄수를 크게 사면을 하고 모든 주군(州郡)의 1년간 조세를 면제해 주었다.

황룡사(皇龍寺)에 백고좌(百高座)를 설치하고 친히 행차해 설법을 들었다.

겨울에 눈이 내리지 않았다.

2년(888) 봄 2월에 소량리(少梁里)의 돌이 저절로 움직였다.

왕이 평소 각간(角干) 위홍(魏弘)과 더불어 간통하더니 이때에 이르러서는 항시 안으로 들이고 일을 맡겼다. 이내 대구화상(大矩和尙)과 더불어 향가를 모아 수집하라 명하고 이를 삼대목(三代目)이라 하였다.

위홍(魏弘)이 죽으니 시호를 추존해 혜성대왕(惠成大王)이라 하였다.

이후부터는 몰래 아름답게 생긴 소년 두세 사람을 끌어들여 음란한 행위를 하였고, 그 사람들을 중요한 직책에 앉히고 나라의 정책을 위임하였다. 이로 인하여 아첨하는 무리가 방자하게 뜻을 펴고 뇌물이 공공연하게 행해졌으며 상과 벌이 공평하지 않아, 기강이 무너지고 해이해졌다.

이때 이름없는 자가 당시의 정치를 비방하는 글어 지어 조정의 길목에 내걸었다. 왕이 사람을 시켜 그 자를 찾도록 했으나 잡지 못했다. 어떤 자가 왕에게 말하기를

“이는 분명 뜻을 이루지 못한 문인의 행위일 것입니다. 아마 대야주(大耶州)의 은자(隠者) 거인(巨仁)이 아닌가 합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거인(巨仁)을 잡아 도성의 감옥에 가두게 하고 장차 처형하려 하였다. 거인(巨仁)이 분하고 원통해 감옥의 벽에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우공(于公)이 통곡하자 3년간 가물었고, 추연(鄒衍)이 슬픔을 품으니 5월에 서리가 내렸는데 지금 나의 근심을 돌이켜보면 옛날과 비슷하건만 황천(皇天)은 말이 없고 단지 푸르기만 하구나.” 그날 저녁에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덮이고 벼락이 내리치면서 우박이 쏟아졌다. 왕이 두려워 거인(巨仁)을 풀어주고 돌려 보냈다.
3월 초하루 무술일에 일식이 있었다.
왕이 병이 들어 편치 않자 죄수들을 살펴 사형죄 이하를 사면하고, 승려 60명에게 도첩을 수여하자 왕의 병이 바로 나았다.
여름 5월에 가뭄이 들었다.
3년(889) 나라 안의 모든 주군(州郡)에서 공물과 부세를 보내지 않아, 창고가 텅텅 비어 나라 재정이 궁핍하였다. 왕이 사신을 보내 독촉하니 곳곳에서 도적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이때 원종(元宗)·애노(哀奴) 등이 사벌주(沙伐州)를 근거지로 반란을 일으켰다. 왕이 나마(奈麻) 영기(令奇)에게 명해 사로잡게 했는데 영기(令奇)는 적들의 망루를 바라보고 두려워하여 나아가지 못했다. 촌주(村主) 우련(祐連)이 힘껏 싸우다가 죽었다. 왕이 칙령을 내려 영기(令奇)의 목을 베고, 나이 10여 세에 불과한 우련(祐連)의 아들로 하여금 아버지를 이어 촌주(村主)가 되게 하였다.
4년(890) 봄 정월에 햇무리가 다섯 겹으로 생겼다.
15일 황룡사(皇龍寺)에 행차하여 연등행사를 보았다.
5년(891) 겨울 10월에 북원(北原) 도적의 장수 양길(梁吉)이 자기 막료 궁예(弓裔)를 보내 기병 1백여 명을 거느리고 북원(北原) 동쪽 부락과 명주(溟州) 관내의 주천(酒泉) 등 10여 군현을 습격하였다.

6년(892) 완산(完山)의 도적 견훤(甄萱)완산주(完山)를 근거로 스스로 후백제(後百濟)라 일컬으니, 무주(武州) 동남쪽의 군현들이 항복해 붙었다.

7년(893) 병부시랑(兵部侍郎) 김처회(金處誨)를 나라에 보내 정절(旌節)을 바치게 했는데, 가는 도중에 바다에 빠져 죽었다.

8년(894) 봄 2월에 최치원(崔致逺)이 시무 10여 조(時務一十餘條)를 올리자, 왕이 좋게 여겨 받아들이고, 최치원(崔致逺)을 아찬(阿湌)으로 삼았다.

겨울 10월에 궁예(弓裔)북원(北原)에서 하슬라(何瑟羅)로 들어오니 무리가 6백 명에 이르렀고, 스스로 장군이라 일컬었다.

9년(895) 가을 8월에 궁예(弓裔)저족(猪足)성천(狌川) 두 군을 습격하여 빼았고, 또 한주(漢州) 관내의 부약(夫若)철원(鐵圓) 등 10여 군현을 깨뜨렸다.

겨울 10월에 헌강왕(憲康王)의 서자 (嶢)를 태자로 삼았다. 앞서 헌강왕(憲康王)이 사냥을 갔다가 지나는 길 옆에서 자태가 아름다운 한 여자를 보았다. 왕이 마음 속으로 사랑하여 뒤쪽 수레에 태우게 해서 왕의 장막에 이르러 야합했는데, 곧 태기가 있어 아들을 낳았다. 그가 장성하자 몸과 용모가 뛰어났고 이름은 (嶢)라 했다. 진성왕(眞聖王)이 이 말을 듣고 안으로 불러들여 손으로 그 등을 어루만지며 말하기를

“나의 형제자매는 골격이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데, 이 아이의 등 뒤에 두 뼈가 솟아 있으니 진실로 헌강왕(憲康王)의 아들이다.”하고, 즉시 담당 관리에게 명하여 예를 갖추어 받들어 태자로 봉하고 공경하게 하였다.
10년(896) 도적이 나라의 서남쪽에서 일어났다. 바지를 붉은 색으로 하여서 스스로를 다르게 하였으므로 사람들이 적고적(赤袴賊)이라 했다. 주현(州縣)을 도륙하여 해를 입히고 수도(亰)의 서부인 모량리(牟梁里)까지 와서 민가를 노략질하고 갔다.
11년(897) 여름 6월에 왕이 좌우 신하에게 이르기를
“근년 이래 백성이 곤궁하고 도적이 벌떼처럼 일어나니, 이는 나의 부덕한 탓이다. 어진 이에게 왕위를 넘겨주기로 나의 뜻은 결정되었다.”고 하고, 태자 (嶢)에게 왕위를 넘겨 주었다. 이에 나라에 사신을 보내 표문으로 아뢰기를.
“신이 삼가 말씀드립니다. 희중(羲仲)의 관직에 있는 것이 신의 본분이 아니고, 연릉(延陵)의 절개를 지키는 것이 신의 좋은 방책인가 합니다. 신의 조카 (嶢)는 신의 죽은 형 정(晸)의 아들인 바, 나이는 바야흐로 15세를 바라보고 그 그릇됨이 종실을 일으킬 만하기에 밖에서 구할 필요없이 안에서 천거했습니다. 근래 들어 이미 그로 하여금 번국의 일을 임시로 맡게 하여 나라의 재난을 진정시키고 있사옵니다.”라고 하였다.
겨울 12월 을사일(4일) 왕이 북궁(北宫)에서 죽었다. 시호는 진성(真聖)이고 황산(黃山)에 장사를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