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권(券第十一) 신라본기(新羅本紀) 진성왕(眞聖王)
진성왕(眞聖王)
진성왕(眞聖王)099 신라의 제51대왕(887-897)으로 재위 기간은 887~897년이다. 경문왕닫기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만(曼)100 《삼국유사》 왕력표 진성여왕조닫기이고 헌강왕(憲康王)의 누이동생이다. 최치원(崔致逺) 문집 제2권101 《삼국사기》 권46 열전 최치원전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1 감교원문편, 한국정신문화연구원, 357쪽)닫기의 사추증표(謝追贈表)102 선왕의 추증을 감사하여 진성왕이 당제에게 올린 표문인 듯한데 원문은 전해지지 않는다. 이 글은 최치원이 진성왕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1 감교원문편, 한국정신문화연구원, 357쪽)닫기에는 “신(臣) 탄(坦)은 아룁니다. 엎드려 칙지를 받자오니 죽은 아버지 응(凝)을 추증해 태사(太師)103 당나라 三師의 하나로서 일정한 관부에 소속되지 않고 천자의 자문에 응하는 관직이다.닫기로 삼고, 죽은 형 정(晸)을 태부(太傅)104 당나라 三師의 하나로, 임무는 천자의 자문에 응하는 것이다.닫기로 삼았습니다.”라고 하였고, 또 납정절표(納旌節表)105 당나라가 신라에 주었던 旌節을 반납하면서 올렸던 표문이었던 듯하나 원문은 전해지지 않는다. 이글은 최치원이 진성왕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한국정신문화연구원, 358쪽)닫기에는 “신의 맏형 국왕(國王) 정(晸)이 지난 광계(光啓) 3년(887) 7월 5일106 光啓는 唐 僖宗代에 사용하던 연호로, 光啓 3년은 887년이다. 그런데 본문에서 晸 즉 헌강왕이 光啓 3년 7월 5일에 죽었다고 하였으나,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등에 의하면 晸은 886년 7월 5일에 죽었고 887년 7월 5일에 죽은 왕은 정강왕 晃이었다. 그러므로 본문의 ‘光啓 3년’은 ‘光啓 2년’의 잘못이라 하겠다.닫기에 갑자기 성스런 시대를 버렸고, 신의 조카 요(嶢)는107 진성왕을 이어서 즉위한 효공왕의 이름인데, 그는 헌강왕닫기 아직 돌도 되지 않았는지라, 신의 둘째 형 황(晃)이 임시로 나라를 다스리던 바, 또 1년도 넘기지 못하고 멀리 세상을 떠났습니다.”라고 하였다. 이로써 말하자면 경문왕(景文王)의 이름은 응(凝)인데 본기에는 응렴(膺廉)이라 하였고, 진성왕(眞聖王)099 신라의 제51대왕(887-897)으로 재위 기간은 887~897년이다. 경문왕닫기의 이름은 탄(坦)인데 본기에서는 만(曼)이라 했다. 또 정강왕(定康王) 황(晃)은 광계(光啓) 3년에 죽었는데 본기에는 2년에 죽었다고 하니108 이 細註는 크게 두 가지 점에서 잘못되어 있다. 우선 《崔致遠文集》에서 인용한 《納旌節表》에서 헌강왕 晸이 光啓 3년 7월 5일에 죽었다고 하였으나, 《삼국사기》의 찬자는 정강왕 晃이 광계 3년에 죽은 것으로 잘못 이해하였다. 둘째, 《삼국사기》 권11 신라본기 정강왕 2조 및 《삼국사기》 권31 年表(下)에 의하면, 정강왕 晃은 재위 2년 즉 光啓 3년 7월 5일에 죽은 것으로 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세주에서는 오히려 정강왕이 光啓 2년에 죽은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것은 《삼국사기》의 찬자가 정강왕 즉위 2년을 光啓 2년으로 착각한 데서 비롯된 杜撰이라 하겠다.닫기, 모두 어떤 것이 옳은지 알 수 없다.
죄수를 크게 사면을 하고 모든 주군(州郡)의 1년간 조세를 면제해 주었다.
황룡사(皇龍寺)에 백고좌(百高座)를 설치하고 친히 행차해 설법을 들었다.
겨울에 눈이 내리지 않았다.
2년(888) 봄 2월에 소량리(少梁里)109 현재의 위치는 알 수 없다. 少梁里는 혹시 沙梁里의 誤記가 아닐까 한다.닫기의 돌이 저절로 움직였다.
왕이 평소 각간(角干) 위홍(魏弘)과 더불어 간통하더니110 《삼국유사》 王曆篇 및 같은 책 권2 紀異篇 진성여대왕 거타지조에는 魏弘을 진성왕의 ‘남편[匹, 夫]’이라 하였다.닫기 이때에 이르러서는 항시 안으로 들이고 일을 맡겼다. 이내 대구화상(大矩和尙)111 경문왕대에 國仙이었던 邀元郞, 譽昕郞, 桂元郞, 叔宗郞 등이 金蘭에서 보내온 3편의 가사에 곡을 붙여 玄琴抱曲, 大道曲, 問群曲이란 노래 3首를 지은 大炬和尙과 동일 인물로, 진성왕 2년(888)에 위홍과 함께 《三代目》 이란 향가집을 편찬하였다.닫기과 더불어 향가를 모아 수집하라 명하고 이를 삼대목(三代目)112 현전하지 않는 향가집으로 권수와 책수 등에 관해서는 미상이다.닫기이라 하였다.
위홍(魏弘)이 죽으니 시호를 추존해 혜성대왕(惠成大王)이라 하였다.
이후부터는 몰래 아름답게 생긴 소년 두세 사람을 끌어들여 음란한 행위를 하였고, 그 사람들을 중요한 직책에 앉히고 나라의 정책을 위임하였다. 이로 인하여 아첨하는 무리가 방자하게 뜻을 펴고 뇌물이 공공연하게 행해졌으며 상과 벌이 공평하지 않아, 기강이 무너지고 해이해졌다.
이때 이름없는 자가 당시의 정치를 비방하는 글어 지어 조정의 길목에 내걸었다.113 《삼국유사》 권2 紀異篇 眞聖女大王 居陀知條에 의하면, 비방문은 陀羅尼의 隱語로 쓰여졌는데 《南無亡國刹尼那帝 判尼判尼蘇判尼 于于三阿干 鳧伊娑婆訶》가 그것이다.닫기 왕이 사람을 시켜 그 자를 찾도록 했으나 잡지 못했다. 어떤 자가 왕에게 말하기를
6년(892) 완산(完山)의 도적 견훤(甄萱)124 상주 加恩縣 사람으로 신라 서남해안 방비를 위하여 파견되었다가 그 곳에서 자립하여 후백제를 세웠다. 후에 장자 神劍에게 폐위되어 金山寺에 유폐되어 있다가 고려에 투항하였다. 견훤의 자세한 행적에 관해서는 《삼국사기》 권50 열전 甄萱傳, 《삼국유사》 권2 紀異篇 後百濟 甄萱條 참조.닫기이 완산주(完山州)를 근거로 스스로 후백제(後百濟)라 일컬으니125 《삼국사기》 권50 열전 甄萱傳에서는, 진성왕 6년(892)에 견훤이 武州를 점령하여 스스로 왕이 되었고 光和 3년 즉 효공왕 4년(900)에 완산주에서 백제 재건의 슬로건을 내걸고 후백제를 건국했다고 하여 《삼국사기》 신라본기와 다소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견훤의 후백제 건국 과정에 관해서는 《삼국사기》 권50 열전 甄萱傳과 《삼국유사》 권2 紀異篇 後百濟甄萱條 참조.닫기, 무주(武州) 동남쪽의 군현들이 항복해 붙었다.
7년(893)127 《삼국사기》 권31 年表(下)에 의하면, 진성왕 7년(893)에 중국에서 연호를 바꾸었다는 사실을 알고 신라에서도 연호를 景福 2년이라 했다고 한다.닫기 병부시랑(兵部侍郎) 128 軍務를 관장하던 병부의 차관직으로, 진평왕 45년(623)에 설치한 병부 大監을 경덕왕 때에 고친 이름이다. 병부에는 시랑이 2명 있었다. 《삼국사기》 권38 잡지 직관(上) 兵部條 참조.닫기김처회(金處誨)를 당나라에 보내 정절(旌節)을 바치게 했는데, 가는 도중에 바다에 빠져 죽었다.
8년(894) 봄 2월에 최치원(崔致逺)이 시무 10여 조(時務一十餘條)129 당시의 시정 개혁안이었던 듯하나 그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 없다. 그런데 당시의 시대상황과 최치원의 사상을 고려하여 시무책의 내용은 진골중심의 골품제 타파, 전제왕권 강화책, 호족억압책, 인사행정 개혁안, 조세제도 개혁안 등이 포함되었을 것으로 추측하기도 한다(이기백, 「골품체제하의 유교적 정치이념」, 《신라시대의 국가불교와 유교》, 한국연구원, 1978, 164~166쪽). 박종근, 「최치원의 정치이념과 종교관」, 《역사교육론집》 3, 1982, 41~43쪽). 최경숙, 「최치원 연구」, 《부산사학》 5, 1981, 24~31쪽).닫기를 올리자, 왕이 좋게 여겨 받아들이고, 최치원(崔致逺)을 아찬(阿湌)으로 삼았다.
겨울 10월에 궁예(弓裔)가 북원(北原)에서 하슬라(何瑟羅)로 들어오니 무리가 6백 명에 이르렀고, 스스로 장군이라 일컬었다.
9년(895) 가을 8월에 궁예(弓裔)가 저족(猪足)131 현재의 강원도 인제군 인제읍 일대이다. 이곳은 본래 고구려의 猪足縣 혹은 烏斯廻縣이었다가 경덕왕 때에 狶蹄縣으로 개명되었는데, 당시는 朔州 楊麓郡의 領縣이었다.닫기과 성천(狌川)132 현재의 강원도 화천군 화천읍으로 비정된다. 본래는 고구려의 牲川郡 혹은 也尸買郡이었는데 경덕왕 때에 狼川郡으로 개명하였다.닫기 두 군을 습격하여 빼았고, 또 한주(漢州) 관내의 부약(夫若)133 고구려 때의 夫如郡과 동일 지명으로, 지금의 강원도 철원군 김화읍 일대로 추정된다.닫기과 철원(鐵圓)134 현재의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으로 비정된다.닫기 등 10여 군현을 깨뜨렸다.
겨울 10월에 헌강왕(憲康王)의 서자 요(嶢)를 태자로 삼았다. 앞서 헌강왕(憲康王)이 사냥을 갔다가 지나는 길 옆에서 자태가 아름다운 한 여자를 보았다. 왕이 마음 속으로 사랑하여 뒤쪽 수레에 태우게 해서 왕의 장막에 이르러 야합했는데, 곧 태기가 있어 아들을 낳았다. 그가 장성하자 몸과 용모가 뛰어났고 이름은 요(嶢)라 했다. 진성왕(眞聖王)이 이 말을 듣고 안으로 불러들여 손으로 그 등을 어루만지며 말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