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는 이야기/삼국사기

제11권(券第十一) 신라본기(新羅本紀) 헌안왕(憲安王)

7390882@hanmail.net 2019. 12. 22. 18:14

헌안왕(憲安王)


헌안왕(憲安王)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의정(誼靖) 또는 우정(祐靖)이라고도 한다. 신무왕(神武王)의 배다른 동생이다. 어머니는 조명부인(照明夫人)이고 선강왕(宣康王)의 딸이다. 문성왕(文聖王)의 유언에 따라 왕위에 올랐다.

죄수를 크게 사면하였다.

이찬(伊湌) 김안(金安)을 상대등(上大等)으로 삼았다.

2년(858) 봄 정월에 친히 신궁에 제사를 지냈다.

여름 4월에 서리가 내렸다.

5월부터 7월에 이르기까지 비가 오지 않았다.

당성군(唐城郡)남쪽 물가에서 큰 물고기가 나왔는데, 그 길이가 40보였고 높이가 6장이었다.

3년(859) 봄에 곡식이 귀해 백성이 굶주리자, 왕이 사신을 보내 구휼하게 하였다.

여름 4월에 교서를 내려 제방을 튼튼하게 수리하고 농사에 힘쓰도록 하였다.

4년(860) 가을 9월에 왕이 임해전(臨海殿)에 여러 신하들을 모이게 했는데, 왕족 응렴(膺廉)이 나이 15세로 자리에 참석하였다.
왕은 그의 뜻을 알고자 문득 묻기를

“그대는 한동안 돌아다니면서 배우는 동안 배울 만한 사람을 만난 것이 없었더냐?”라고 하였다.

응렴(膺廉)이 대답하기를

“신은 일찍이 세 사람을 보았는데, 자못 착한 행실이 있다고 여겼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어떤 것인가?”라고 물으니, 대답하기를
“한 사람은 고귀한 가문의 자제로서 다른 사람과 더불어 사귐에 있어 자기를 먼저 내세우려 하지 않고 남의 아래에 자리하였습니다. 한 사람은 부잣집 사람으로서 가히 사치스런 옷을 입을 수 있는데도 항시 삼베옷만 입으며 스스로 즐거워했습니다. 또 한 사람은 권세와 영화를 누리면서도 그 힘으로 사람을 억누르는 일이 없었습니다. 신이 본 바는 이와 같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듣고 말없이 있다가 왕후에게 궛속말로

“내가 많은 사람을 보았지만 응렴(膺廉)만한 이는 없었다.”하고는, 그를 사위로 삼을 생각으로 돌아보고 이르기를

“바라건대 그대는 몸을 아끼라. 나에게 딸 자식이 있으니 그대의 배필로 삼게 하리라.”라고 하였다. 다시 함께 술을 마시며 조용히 말하기를

“나에게 두 딸이 있는데, 큰 아이는 올해 스물 살이고 작은 아이는 열아홉 살이다. 그대 마음에 드는 대로 장가를 들라.”라고 하였다. 응렴(膺廉)은 사양하다가 마침내 일어나 감사의 절을 드리고 집에 돌아와 부모에게 알렸다. 부모가 말하기를

“듣건대 왕의 두 딸의 얼굴은 언니가 동생만 못하다고 하니, 만약 부득이하다면 그 동생에게 장가드는 것이 좋겠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응렴(膺廉)은 여전히 망설이며 결정을 하지 못하다가 흥륜사(興輪寺)의 스님에게 물었다. 스님이 말하기를

“언니에게 장가들면 세 가지 이로움이 있을 것이고, 동생에게 장가들면 반대로 세 가지 손해가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응렴(膺廉)이 곧 왕에게 아뢰기를

“신은 감히 결정하지 못하겠으니, 왕의 명령을 따르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왕이 큰 딸을 그에게 출가시켰다.

5년(861) 봄 정월에 왕이 병으로 침상에 누워 위독하자 좌우의 신하들에게 일러 말하기를

“과인은 불행하게도 아들은 없고 딸만 두었다. 우리 나라의 옛 기록에 비록 선덕(善德)과 진덕(眞德)의 두 여왕이 있었다고는 하나, 그것은 암닭이 새벽을 알리는 일에 가까운 것이니 본받을 수 없다. 사위 응렴(膺廉)은 나이는 비록 어리지만 노성한 덕성을 가지고 있으니, 그대들이 왕으로 옹립해 섬긴다면 반드시 조상의 위대한 업적을 떨어뜨리지 않을 것이고 과인이 죽더라도 또한 마음을 놓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 달 29일에 죽으니, 시호는 헌안(憲安)이고 공작지(孔雀趾)에 장사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