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권(券第十一) 신라본기(新羅本紀) 헌안왕(憲安王)
헌안왕(憲安王)
헌안왕(憲安王)035 신라 제 47대왕 신무왕의 이복 동생으로, 조카인 문성왕의 유조(遺詔)에 의하여 즉위하였다. 사위인 응령에게 왕위를 물려 주었다.닫기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의정(誼靖) 또는 우정(祐靖)이라고도 한다. 신무왕(神武王)의 배다른 동생이다.036 《삼국유사》 왕력편에서는 헌안왕을 신호왕지제(神虎王之弟)라 하여 이복 동생이라는 언급이 없다.닫기 어머니는 조명부인(照明夫人)이고 037 《삼국유사》 왕력표 헌안왕조에는 흔명부인(昕明夫人)이라 하였다.닫기선강왕(宣康王)038 민애왕(閔哀王) 김명(金明)의 아버지인 충공(忠恭)에게 내린 시호(追諡)이다.닫기의 딸이다. 문성왕(文聖王)의 유언에 따라 왕위에 올랐다.
죄수를 크게 사면하였다.
이찬(伊湌) 김안(金安)039 헌안왕 즉위년(858)에 상대등이 되었다가 경문왕 2년(862)까지 약 6년 동안 재직하였다는 사실 외의 행적은 미상이다. 한편 新羅敬順王殿碑文에 의하면, 경순왕은 문성왕의 아들인 김안의 4세손이라 하였다. 그러나 이 비문은 1814년에 쓰여졌으며 또한 어떤 자료에 의거하였는지도 불분명하다. 그리고 김안이 문성왕의 아들이라면, 문성왕이 죽은 해에 상대등의 직을 맡을 만큼 장성한 아들이 있었는데도 숙부인 의정에게 왕위를 물려줄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있으므로 신라경순왕전비문(新羅敬順王殿碑文)에서 김안을 문성왕의 아들이라 한 점은 의미심스럽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1 감교원문편, 한국정신문화연구원, 346쪽)닫기을 상대등(上大等)으로 삼았다.
2년(858) 봄 정월에 친히 신궁에 제사를 지냈다.
여름 4월에 서리가 내렸다.
5월부터 7월에 이르기까지 비가 오지 않았다.
당성군(唐城郡)040 현재의 경기도 화성군 남양만 일대이다.닫기의 남쪽 물가에서 큰 물고기가 나왔는데, 그 길이가 40보였고 높이가 6장이었다.
3년(859) 봄에 곡식이 귀해 백성이 굶주리자, 왕이 사신을 보내 구휼하게 하였다.
여름 4월에 교서를 내려 제방을 튼튼하게 수리하고 농사에 힘쓰도록 하였다.
“그대는 한동안 돌아다니면서 배우는 동안 배울 만한 사람을 만난 것이 없었더냐?”라고 하였다.
“신은 일찍이 세 사람을 보았는데, 자못 착한 행실이 있다고 여겼습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많은 사람을 보았지만 응렴(膺廉)만한 이는 없었다.”하고는, 그를 사위로 삼을 생각으로 돌아보고 이르기를
“바라건대 그대는 몸을 아끼라. 나에게 딸 자식이 있으니 그대의 배필로 삼게 하리라.”라고 하였다. 다시 함께 술을 마시며 조용히 말하기를
“나에게 두 딸이 있는데, 큰 아이는 올해 스물 살이고 작은 아이는 열아홉 살이다. 그대 마음에 드는 대로 장가를 들라.”라고 하였다. 응렴(膺廉)은 사양하다가 마침내 일어나 감사의 절을 드리고 집에 돌아와 부모에게 알렸다. 부모가 말하기를
“듣건대 왕의 두 딸의 얼굴은 언니가 동생만 못하다고 하니, 만약 부득이하다면 그 동생에게 장가드는 것이 좋겠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응렴(膺廉)은 여전히 망설이며 결정을 하지 못하다가 흥륜사(興輪寺)의 스님043 《삼국유사》 권2 경문왕조에 의하면 범교사(範敎師)란 스님으로, 응렴의 낭도라고 한다.닫기에게 물었다. 스님이 말하기를
5년(861) 봄 정월에 왕이 병으로 침상에 누워 위독하자 좌우의 신하들에게 일러 말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