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는 이야기/삼국사기

제12권(券第十二) 신라본기(新羅本紀) 경순왕(敬順王)

7390882@hanmail.net 2020. 1. 5. 16:21

경순왕(敬順王)


경순왕(敬順王)이 즉위하였다. 휘는 (傳)니, 문성대왕(文聖大王)의 후손이고 효종(孝宗) 이찬(伊湌)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계아태후(桂娥太后)이다. 견훤(甄萱)이 세워서 즉위하였다.

전왕(前王)의 시신을 옮겨 서당(西堂)에 안치하고, 여러 신하들과 통곡하였다. 시호(諡號)를 올려 경애(景哀)라 하고, 남산(南山) 해목령(蟹目嶺)에 장사지냈다. 태조(太祖)가 사신을 보내 조문하고 제사하였다.

원년 11월에 아버지를 추존(追尊)하여 신흥대왕(神興大王)이라 하고, 어머니를 왕태후(王太后)로 삼았다.

12월에 견훤(甄萱)이 대목군(大木郡)에 침입하여 들에 쌓아놓은 곡식을 모두 태워버렸다.

2년(928년) 봄 정월에 고려(髙麗) 장수 김상(金相)이 초팔성(草八城) 도적 흥종(興宗)과 싸웠는데, 이기지 못하고 전사하였다.
여름 5월에 강주(康州) 장군(將軍) 유문(有文)이 견훤(甄萱)에게 항복하였다.

6월에 지진(地震)이 일어났다.

가을 8월에 견훤(甄萱)이 장군(將軍) 관흔(官昕)에게 명하여 양산(陽山)에 성을 쌓게 하였다.
태조(太祖)가 명지성(命旨城) 장군(將軍) 왕충(王忠)에게 명하여 병사를 이끌고 그를 공격해 쫓아내게 하였다. 견훤(甄萱)이 대야성(大耶城) 아래에 진군하여 주둔하면서, 군사를 나누어 보내 대목군(大木郡)의 벼를 베어 갔다.
겨울 10월에 견훤(甄萱)이 무곡성(武谷城)을 공격해 함락시켰다.
3년(929년) 여름 6월에 천축국(天國) 삼장(三藏) 마후라(摩睺羅)고려(髙麗)에 왔다.
가을 7월에 견훤(甄萱)이 의성부(義成府) 성(城)을 공격하여 고려(髙麗) 장수 홍술(洪述)이 출전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전사하였다.
순주(順州) 장군(將軍) 원봉(元逢)이 견훤(甄萱)에게 항복하였다. 태조(太祖)가 이를 듣고 화를 냈으나, 원봉(元逢)의 지난 공로를 생각해 그를 용서하고, 다만 순주(順州)를 고쳐 현(縣)으로 하였다.
겨울 10월에 견훤(甄萱)이 가은현(加恩縣)을 포위했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4년(930년) 봄 정월에 재암성(載巖城) 장군(將軍) 선필(善弼)고려(髙麗)에 항복하니, 태조(太祖)가 그를 후한 예의로 대하고 상보(尙父)라 일컬었다. 앞서 태조(太祖)가 신라와 우호를 통하려고 할 때 선필(善弼)이 이를 인도하여 주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항복한 것이다. 그가 공이 있고 또한 나이가 많은 점을 생각해, 그를 총애하고 칭찬한 것이다.
태조(太祖)견훤(甄萱)과 고창군(古昌郡) 병산(甁山) 아래에서 싸웠는데, 크게 이겨 죽이고 포로로 잡은 자들이 매우 많았다. 영안(永安)·하곡(河曲)·직명(直明)·송생(松生) 등 30여 군현(郡縣)이 차례차례 태조(太祖)에게 항복하였다.
2월에 태조(太祖)가 사신을 보내 승리를 알리니, 왕이 답례로 사신을 보내고 서로 만나기를 청하였다.
가을 9월에 나라 동쪽 바닷가의 주군(州郡) 부락들이 모두 태조(太祖)에게 항복하였다.
5년(931년) 봄 2월에 태조(太祖)가 50여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경기(京畿)에 와서 만나 뵙기를 청하였다. 왕이 백관(百官)과 교외에서 맞이하여, 입궁하하여 서로를 대면하고 정성과 예의를 곡진히 하였다. 임해전(臨海殿)에 연회 자리를 마련하고 잔치가 무르익자 왕이 말하기를,
“나는 하늘의 도움을 받지 못해 점차 화란(禍亂)을 불러들였고, 견훤(甄萱)은 의롭지 못한 일을 마음 내키는 대로 하면서 우리 나라를 멸망시키려 하니, 이렇게 가슴 아픈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라고 하며 눈물을 줄줄 흘리며 울었다. 좌우에서 목메어 울지 않는 이가 없었으며 태조 역시 눈물을 흘리며 위로하였다. 수십 일을 머물다 돌아가니, 왕이 혈성(穴城)까지 배웅하고 사촌동생 유렴(裕廉)을 인질로 삼아 태조(太祖)를 따라가게 하였다. 태조(太祖) 휘하의 군사들은 엄숙하고 올발라 털끝만큼도 침범하지 않았다. 도성의 남녀가 서로 기뻐하며 말하기를,
“예전 견훤(甄萱)이 왔을 때에는 승냥이와 호랑이(시호, 豺虎)를 만난 것 같았는데, 지금 왕공(王公)이 오니 부모를 만난 것 같다.”라고 하였다.

가을 8월에 태조(太祖)가 사신을 보내 왕에게 채색 비단과 안장 얹은 말을 보내주고, 여러 신료와 장사(將士)에게 베와 비단을 차등있게 내려 주었다.

6년(932년) 봄 정월에 지진(地震)이 일어났다.
여름 4월에 사신 집사시랑(執事侍郞) 김불(金昢)과 부사(副使) 사빈경(司賓卿) 이유(李儒)를 당(唐)에 보내 조공하였다.
7년(933년)에 당(唐) 명종(明宗)이 고려(髙麗)에 사신을 보내 책명(冊命)을 주었다.
8년(934년) 가을 9월에 노인성(老人星)이 보였다.
운주(運州) 내의 30여 군현(郡縣)이 태조(太祖)에게 항복하였다.
9년(935년) 겨울 10월에 왕은 사방의 토지가 모두 남의 소유가 되어 국력이 약해지고 세력이 작아져 스스로 편안할 수 없게 되었다고 여겨, 여러 신하들과 국토를 들어 태조(太祖)에게 항복하고자 논의하였다. 신하들의 의논하기를, 혹자는 옳다 하고 혹자는 옳지 않다 하였다. 왕자가 말하기를,
“나라의 존망은 반드시 천명(天命)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다만 충신(忠臣)·의사(義士)와 함께 민심을 수습해 스스로 수비하다가 힘이 다한 후에 그만두어야지, 어찌 1천년 사직(社稷)을 하루아침에 가벼이 남에게 주는 것이 옳은 일이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작고 위태로움이 이와 같아 형세가 보전할 수 없다. 이미 강해질 수 없고 또 약해질 수도 없으니, 죄 없는 백성들의 간(肝)과 뇌장(腦漿)이 땅에 쏟아지게 하는 일을, 나는 차마 할 수 없다.”라 하고, 시랑(侍郞) 김봉휴(金封休)에게 편지를 가지고 가게 해 태조(太祖)에게 항복하기를 청하였다. 왕자가 울며 왕에게 하직하고, 바로 개골산(皆骨山)에 들어가 바위에 기대어 집으로 삼고 삼베옷을 입고 풀을 먹으며 일생을 마쳤다.
11월에 태조(太祖)가 왕의 편지를 받고 대상(大相) 왕철(王鐵) 등을 보내 그를 맞이하였다. 왕은 모든 관료를 이끌고 왕도에서 나와 태조(太祖)에게 귀순하는데, 아름다운 수레와 보석으로 치장한 말이 30여 리에 걸쳐 이어지며 길을 메우니, 구경하는 사람들이 담장 같이 늘어섰다. 태조(太祖)가 교외로 나가 영접하고 위로하며 궁궐 동쪽의 제일 좋은 거처 한 곳을 주고, 장녀 낙랑공주(樂浪公主)를 그에게 시집보냈다.
12월에 정승공(正承公)으로 봉하여 지위가 태자(太子)보다 위에 있게 하였고, 봉록(俸祿) 1천 석을 주었다. 시종하는 관원과 장수들을 모두 예전 그대로 채용했으며, 신라(新羅)를 고쳐 경주(慶州)라 하고 공(公)의 식읍(食邑)으로 삼았다.
처음에 신라가 항복했을 때 태조(太祖)가 매우 기뻐하며 이미 후한 예의로 대하고 사자를 보내 알려 말하기를,
“지금 왕께서 나라를 저에게 주시니 그 은혜가 큽니다. 원컨대 왕의 종실과 혼인을 맺어 장인과 사위의 우호가 영원하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답하여 말하기를,
“저의 큰아버지 억렴(億廉) 잡간(匝干)은 지대야군사(知大耶郡事)인데 그의 딸이 덕(德)과 용모가 모두 아름답습니다. 이 사람이 아니면 집안 살림을 갖출 수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태조(太祖)가 마침내 그녀를 아내로 맞아 아들을 낳으니, 이가 현종(顯宗)의 아버지로서 안종(安宗)으로 추봉(追封)된 이다. 경종헌화대왕(景宗獻和大王)때에 이르러 정승공(正承公)의 딸을 맞아들여 왕비로 삼고, 정승공(正承公)을 상보령(尙父令)으로 삼았다.

(公)대송(大宋) 흥국(興國) 4년(978년) 무인(戊寅)에 돌아갔으니, 시호(諡號)를 경순(敬順) 또는 효애(孝哀)라 하였다.

국인(國人)이 시조대왕에서부터 이에 이르기까지를 3대(代)로 나누었다. 처음부터 진덕왕(眞德王)까지의 28왕을 일러 상대(上代)라 하고, 무열왕(武烈王)부터 혜공왕(惠恭王)까지의 8왕을 일러 중대(中代)라 하며, 선덕왕(宣德王)부터 경순왕(敬順王)까지의 20왕을 일러 하대(下代)라 한다.

논하여 말한다. 신라(新羅)의 박씨(朴氏), 석씨(昔氏)는 모두 알에서 태어났고(卵生) 김씨(金氏)는 금궤(金樻)에 들어가 하늘에서 내려왔다거나 혹은 금수레를 탔다고도 한다. 이는 너무 괴이해서 믿을 수 없으나, 세속(世俗)에서는 서로 전하며 이것이 사실이라고 한다. 정화(政和) 연간에 우리 조정은 상서(尙書) 이자량(李資諒)(宋)에 보내 조공하였는데, 신(臣) 부식(富軾)이 문한(文翰)의 임무를 띠고 보좌하며 갔다. 우신관(佑神館)에 이르러 한 집에 선녀 상이 모셔져 있는 것을 보았다. 관반학사(館伴學士) 왕보(王黼)가 말하기를,

“이것은 당신 나라의 신인데, 공(公)들은 이를 아는가?”라고 하고는 마침내 말하기를,

“옛날 황실의 딸이 남편 없이 잉태를 하여 사람들에게 의심을 받자 바다에 배를 띄워 진한(辰韓)으로 가서 아들을 낳으니, 해동(海東)의 시조 왕이 되었다. 황실의 딸은 지상의 신선이 되어 오래도록 선도산(仙桃山)에 있는데, 이것이 그녀의 상(像)이다”라고 하였다. 신(臣)은 또 송(宋)의 사신 왕양(王襄)이 동신성모(東神聖母)에게 제사지내는 글을 보았는데, “현인(賢人)을 잉태해 나라를 처음 세웠다”는 구절이 있었다. 이에 동신(東神)이 곧 선도산(仙桃山) 성모(聖母)임을 알았으나, 그의 아들이 어느 때 왕 노릇을 한 것인지는 알지 못한다.

이제 다만 그 시초를 살펴보면, 윗자리에 있는 자는 자신을 위해서는 검소하고 남을 위해서는 관대하며, 관청의 설치는 간략히 하고 행사는 간소하게 하였다. 지극한 정성으로 중국(中國)을 섬겨 산 넘고 바다 건너 조빙(朝聘)하는 사신이 서로 이어져 끊이지 않았고, 항상 자제(子弟)를 보내 조정에 나아가 숙위(宿衛)하게 하고 국학(國學)에 들여보내 강습하게 하였다. 이로써 성현(聖賢)의 교화를 계승하여 거친 풍속을 고쳐서 예의(禮義)의 나라가 되었다. 또 황제군(皇帝軍)의 위엄과 신령스러움에 기대어 백제고구려를 평정하여 그 땅을 얻어 군현(郡縣)으로 삼았으니, 융성하다고 이를 만하다. 그러나 부처의 법을 받들어 그 폐단을 알지 못하였다. 마을에 탑과 절이 즐비하고, 백성들이 승려가 되어 달아나 병사와 농민이 점차 줄어들어 나라가 날로 쇠약해지니, 어찌 어지러워지고 멸망하지 않겠는가.

이러한 때에 경애왕(景哀王)은 더욱 노는 데에 빠져 궁인(宮人)과 좌우 신하들과 포석정(鮑石亭)으로 놀러 나가 견훤(甄萱)이 왔음을 알 지 못하였으니, 문 밖의 한금호(韓擒虎)와 누각 위의 장려화(張麗華)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경순왕(敬順王)이 태조(太祖)께 귀순한 것은 비록 마지못해 한 일이지만 칭찬할 만하다. 그때 만약 힘껏 싸우며 지키는데 사력을 다하며 태조(太祖)의 군사에게 항거했다가 힘이 꺾이고 세력이 다하였다면, 반드시 그 종족(宗族)은 망하고 무고한 백성들에게까지 해가 미쳤을 것이다. 그러나 영(令)을 기다리지 않고 부고(府庫)를 봉하고 군현(郡縣)을 기록하여 귀순하였으니, 조정에 공을 세운 것과 백성들에게 덕을 베푼 것이 매우 컸다. 옛날에 전씨(錢氏)가 (吳越)의 땅을 송(宋)에 바친 일을 두고 소자첨(蘇子瞻)이 그를 충신(忠臣)이라 하였는데, 이제 신라의 공덕(功德)은 그것보다 한참 더하다. 우리 태조(太祖)께서 비빈(妃嬪)이 많고 그 자손 역시 번창하였지만, 현종(顯宗)은 신라의 외손에서 나와 보위에 올랐으며 그 후의 왕통을 계승한 이는 모두 그의 자손이니, 어찌 음덕(陰德)의 응보가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