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권(券第十二) 신라본기(新羅本紀) 경순왕(敬順王)
경순왕(敬順王)
경순왕(敬順王)131 신라의 제56대 왕으로, 927년에 즉위하여 후삼국의 혼란을 수습하지 못하고 935년에 나라를 고려에 바쳐 항복하였다. 그러자 왕건은 그를 정승공(正丞公)에 봉하고 경주(慶州)를 식읍으로 주었다. 그 후 경순왕은 정칠 활동을 중지하고 충남 보령군에 있는 성주사(聖住寺)에 은거하고 있다가(숭암산성주사사적(崇巖山聖住寺事蹟)) 경종이 그의 딸을 왕비로 삼은 것을 계기로 상보(尙父) 도성령(都省令)에 책봉되었다. 그는 고려 경종 3년(979)에 죽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384쪽).닫기이 즉위하였다. 휘는 부(傳)니, 문성대왕(文聖大王)132 조선 순조 14년(1814)에 세워진 신라경순왕전비(新羅敬順王殿碑)의 기록에 의하면, 경순왕은 문성왕의 5세손이라 하였다. 그러나 이 비문의 사료적 가치에 대해서는 의심스러운 점이 없지 않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384쪽).닫기의 후손이고 효종(孝宗) 이찬(伊湌)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계아태후(桂娥太后)133 헌강왕의 딸로 경순왕이 즉위한 후에 왕태후가 되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384쪽).닫기이다. 견훤(甄萱)이 세워서 즉위하였다.
전왕(前王)의 시신을 옮겨 서당(西堂)에 안치하고, 여러 신하들과 통곡하였다. 시호(諡號)를 올려 경애(景哀)라 하고, 남산(南山) 해목령(蟹目嶺)134 해목령(蟹目嶺)은 경주시 남산의 서봉(西峰) 즉 남산성(南山城)의 서쪽 봉우리로, 윤을곡(潤乙谷)과 포석계(鮑石溪)의 경계에 해당되는 곳이다. 그런데 현재의 경북 경주시 배동(排洞)의 남산 삼릉 계곡 입구에 있는 단독의 원형봉토분을 경애왕릉으로 추정하여 사적으로 지정하고 있다. 그러나 남산 해목령에 장사지냈다는 문헌 기록과 이 고분의 형태 등으로 보아서 이 능은 경애왕릉이 아니라 3릉 중의 전일성왕릉(傳逸聖王陵)이 바로 경애왕릉일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강인구, 《신라왕릉의 재검토(1)》, 《東方學志》 41, 1982, 76~77쪽 | 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384~385쪽).닫기에 장사지냈다. 태조(太祖)가 사신을 보내 조문하고 제사하였다.
원년 11월에 아버지를 추존(追尊)하여 신흥대왕(神興大王)이라 하고, 어머니를 왕태후(王太026 주자본·을해목활자본에는 太로 되어 있다.닫기后)로 삼았다.
12월에 견훤(甄萱)이 대목군(大木郡)135 현재의 경북 칠곡군 약목면(若木面) 일대이다. 《고려사》 권1 태조 10년조에는 견훤이 대목군(大木郡)을 침입한 사실을 경순왕 원년(927) 9월의 일로 기록하여 《삼국사기》와 다소의 차이가 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385쪽).닫기에 침입하여 들에 쌓아놓은 곡식을 모두 태워버렸다.
6월에 지진(地震)이 일어났다.
가을 8월에 태조(太祖)가 사신을 보내 왕에게 채색 비단과 안장 얹은 말을 보내주고, 여러 신료와 장사(將士)에게 베와 비단을 차등있게 내려 주었다.
공(公)은 대송(大宋) 흥국(興國) 4년(978년) 무인(戊寅)180 흥국(興國)은 송 태종(太宗)대의 연호로 976년 12월에서 984년 10월까지 사용되었다. 《삼국사기》에서 흥국 4년을 무인년이라 하였으나 무인년은 흥국 3년 즉 978년에 해당된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390~391쪽). 송 태종 태평흥국 3년이 무인년이므로, ‘4년’은 ‘3년’의 잘못이다. 《고려사》 2 경종(景宗) 3년, 즉 무인년(978년)에 김부의 사망을 확인할 수 있다(이강래, 《삼국사기》 Ⅰ, 한길사, 1998, 299쪽).닫기에 돌아갔으니, 시호(諡號)를 경순(敬順) 또는 효애(孝哀)라 하였다.
국인(國人)이 시조대왕에서부터 이에 이르기까지를 3대(代)181 이른바 상대(上代), 중대(中代), 하대(下代)를 가리킨다. 《삼국사기》와는 달리 《삼국유사》에서는 신라사를 상고(上古), 중고(中古), 하고(下古)의 3시대로 구분하였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391쪽).닫기로 나누었다. 처음부터 진덕왕(眞德王)까지의 28왕을 일러 상대(上代)라 하고, 무열왕(武烈王)부터 혜공왕(惠恭王)까지의 8왕을 일러 중대(中代)라 하며, 선덕왕(宣德王)부터 경순왕(敬順王)까지의 20왕을 일러 하대(下代)라 한다.
논하여 말한다. 신라(新羅)의 박씨(朴氏), 석씨(昔氏)는 모두 알에서 태어났고(卵生)182 박혁거세(朴赫居世)와 석탈해(昔脫解)의 출생을 말한다. 이들의 탄생 설화는 《삼국사기》 권1 신라본기 혁거세거서간조 및 《삼국사기》 권1 신라본기 탈해 이사금 즉위년조, 《삼국유사》 권1 기이편 신라 시조 혁거세조 및 《삼국유사》 권1 기이1 제4 탈해왕조에 자세하게 수록되어 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391쪽). 삼대의 구분은 적어도 신라 ‘하대’ 사람들의 인식이 반영된 구분이겠지만, 《삼국유사》에 소개된 또 다른 신라사의 시기 구분과 비교할 때, 찬자가 바라보는 신라사에 대한 시각과도 관련이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삼국유사》 왕력에 의하면 시조부터 지증왕까지를 ‘상고(上古)’, 법흥왕부터 진덕왕까지를 ‘중고(中古)’, 무열왕부터 경순왕까지를 ‘하고(下古)’라고 구분하였다(이강래, 《삼국사기》 Ⅰ, 한길사, 1998, 300쪽).닫기 김씨(金氏)는 금궤(金樻)에 들어가 하늘에서 내려왔다183 김알지(金閼智)의 탄생을 말한다. 《삼국사기》 권1 신라본기 탈해이사금 9년조와 《삼국유사》 권1 기이편 탈해왕조에 김알지의 탄생 설화가 수록되어 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닫기거나 혹은 금수레를 탔다고도 한다.84 이 문장은 金閼智 탄생에 대한 異說을 소개한 것으로 보이는데, 《삼국사기》의 서술 방식으로 보아 細註로 기술되어야만 할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이 설이 어디에 근거했는지는 미상이다.닫기 이는 너무 괴이해서 믿을 수 없으나, 세속(世俗)에서는 서로 전하며 이것이 사실이라고 한다. 정화(政和)185 송나라 휘종(徽宗) 연간에 사용된 연호로, 1111년에서 1117년까지 사용되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중국 송나라 휘종(徽宗)의 연호이다(이재호, 《삼국사기》 1, 솔, 1997, 461쪽).닫기 연간에 우리 조정은 상서(尙書) 이자량(李資諒)186 이자겸의 동생으로 형부시랑추밀원지주사(刑部侍郞樞密院知奏事), 추밀원부사겸태자빈객(樞密院副使兼太子賓客), 수사공중서시랑평장사(守司空中書侍郞平章事) 등을 역임했으며 1123년에 죽었다. 한편 이자량이 송나라에 들어간 해는 예종 11년 7월로, 송나라에서 대성악(大晟樂)을 보내준 사은사로서 이영(李泳) 등과 함께 입송했다가 다음해 5월에 귀국하였다(《고려사》 권14, 예종 11년 7월 및 12년 5월조). 김부식은 그 때 이자량을 따라 송나라에 들어갔던 것으로 보인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391쪽).닫기을 송(宋)에 보내 조공하였는데, 신(臣) 부식(富軾)이 문한(文翰)의 임무를 띠고 보좌하며 갔다. 우신관(佑神館)에 이르러 한 집에 선녀 상이 모셔져 있는 것을 보았다. 관반학사(館伴學士) 왕보(王黼)187 송대 상부(祥符) 사람으로 자는 장명(將明)이다. 교서랑(校書郞),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 특진소재(特進少宰)를 역임하였다. 그의 전기는 《송사》 권47 열전 왕보(王黼)전에 수록되어 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김부식은 정화 6년, 즉 예종 11년(1116년)에 이자량을 정사로 한 사행에 동행하였다. 고려의 사행단과 왕보와의 교유는 《고려사》에서도 확인된다. 즉 이자량의 일행 가운데는 정항(鄭沆)도 있었는데, 왕보가 정항이 지은 표장을 보고 찬탄했다는 것이다. 여하튼 김부식은 송의 관인들과 교유하면서 선도산 성모에 대한 견문을 가지게 되었던 것인데, 이에 대해서는 《삼국유사》 감통 선도성모수희불사(仙桃聖母隨喜佛事)조에도 자세히 언급되어 있다. 《고려사》 세가 14 예종 11년 7월 기유조 및 같은 책 97 정항전(이강래, 《삼국사기》 Ⅰ, 한길사, 1998, 300쪽).닫기가 말하기를,
“옛날 황실의 딸이 남편 없이 잉태를 하여 사람들에게 의심을 받자 바다에 배를 띄워 진한(辰韓)으로 가서 아들을 낳으니, 해동(海東)의 시조 왕이 되었다. 황실의 딸은 지상의 신선이 되어 오래도록 선도산(仙桃山)188 현재의 경북 경주시 서악동(西岳洞)에 있는 산으로 서악(西嶽), 서술(西述), 서형산(西兄山)이라고도 하였다. 이 산의 정상 부근에 선도성모를 모셔 둔 사당이 있으며 그 옆의 바위에 “聖母舊基”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391~392쪽). 경주의 서쪽에 있는 산이다(이재호, 《삼국사기》 1, 솔, 1997, 461쪽).닫기에 있는데, 이것이 그녀의 상(像)이다”189 이와 비슷한 설화가 《삼국유사》 권5 감통편 선도성모수희불사(仙桃聖母隨喜佛事)조에 실려 있다. 즉 사소(娑蘇)라는 중국 황실의 딸이 일찍이 신선술을 익혀 해동(海東)에 왔다가 오랫동안 돌아가지 않자 황제가 매를 보내어 선도산에 살도록 하니 그 곳에서 지선(地仙)이 되어 나라를 보호해 주었으며 혁거세(赫居世)를 낳아 나라를 열었다고 한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392쪽).닫기라고 하였다. 신(臣)은 또 송(宋)의 사신 왕양(王襄)190 송대 남양인(南陽人)으로 이부상서(吏部尙書),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使)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그는 고려 예종 5년 6월에 정사로서 부사 중서사인(中書舍人) 장배창(張拜昌) 등과 함께 고려에 사신으로 왔다가 7월에 돌아갔다. 《고려사》 권13, 예종 5년조 및 같은 책 권65, 志19 빈례(賓禮)조 참조.(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392쪽).닫기이 동신성모(東神聖母)에게 제사지내는 글을 보았는데191 왕양이 고려에 온 것은 《고려사》 13 세가13 예종 5년(1110년) 6월 신사조에서 확인된다. 서긍(徐兢)의 《고려도경》에 의하면 개경에 있는 동신사(東神祠)에는 동신성모지당(東神聖母之堂)이 있었고 사신들이 그에 제사하는 관례가 있었다고 한다. 《고려도경(高麗圖經)》 17 사우(祠宇)조 참조.(이강래, 《삼국사기》 Ⅰ, 한길사, 1998, 301쪽).닫기, “현인(賢人)을 잉태해 나라를 처음 세웠다”는 구절이 있었다. 이에 동신(東神)이 곧 선도산(仙桃山) 성모(聖母)임을 알았으나, 그의 아들이 어느 때 왕 노릇을 한 것인지는 알지 못한다.192 《삼국유사》 권5 감통편 선도성모수희불사(仙桃聖母隨喜佛事)조에서는 선도성모의 아들을 박혁거세(朴赫居世)라 하였다. 그러나 이는 산신숭배사상과 중화사상(中華思想)이 습합되어 나타난 설화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392쪽).닫기
이러한 때에 경애왕(景哀王)은 더욱 노는 데에 빠져 궁인(宮人)과 좌우 신하들과 포석정(鮑石亭)으로 놀러 나가 견훤(甄萱)이 왔음을 알 지 못하였으니, 문 밖의 한금호(韓擒虎)194 수나라 하남(河南) 동원인(東垣人)으로 문제(文帝) 때에 여주총관(總管廬州)이 되어 진(陳)을 평정하였다. 589년에 한금호는 정예 기병 500명을 이끌고 금릉(金陵)의 궁성 남문으로부터 쳐들어가 진나라 후주(後主)인 숙보(叔寶)를 붙잡아 돌아갔다. 후에 그의 관작은 상주국(상주국(上柱國))이 되었고 수광현공(壽光縣公)에 봉해졌다(《수서》 권52, 열전 한금호전). 《삼국사기》에서는 견훤에게 붙잡힌 경애왕을 한금호에게 사로잡힌 진나라 숙보에게 비유하였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392쪽). 수나라 사람으로 그가 진후주(陳後主)를 치러 남액문으로 들어가니 후주가 뜻밖에 닥치는 일이나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우물 속으로 숨으려다가 잡혔다(북한 과학원 고전연구실, 《삼국사기》 상, 1958, 345쪽).닫기와 누각 위의 장려화(張麗華)195 진(陳)나라 후주(後主)인 숙보(叔寶)의 비이다. 숙보로부터 총애를 받아 권력을 마음대로 하여 나라의 기강을 문란하게 했는데, 한금호가 이끈 수나라 군사에 의하여 진나라 후주와 함께 사로잡혀 참수되었다(《진서(陳書)》 권7, 열전 장귀비(張貴妃)전). 《삼국사기》에서는 견훤에게 잡혀 욕을 당한 경애왕의 후비(后妃)를 비유한 것이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393쪽). 중국 남조 진(陳)나라의 후주(後主)의 비로 얼굴이 아름다워 왕의 사랑을 받았다. 수나라 장수 한금호가 쳐들어오자 후주와 함께 우물 속에 숨었다가 죽임을 당했다. 여기서는 여화를 경애왕의 비에 비유한 것이다(이재호, 《삼국사기》 1, 솔, 1997, 462쪽). 진(陳)의 후주(後主)와 그의 귀비(貴妃) 장여화의 말로를 이른 것이다. 후주는 매양 장귀비 등과 연회를 즐겼는데, 수 문제(文帝)의 공격을 당해 대성(臺省)이 함락되고 수의 장수 한금호가 남액문(南掖門)으로 달려 들어가니, 후주가 뜻밖에 당하는 일인지라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장귀비 등과 함께 우물 속에 숨으려다가 잡혔다. 장여화 역시 수나라 군사의 손에 죽었다. 결국 찬자는 경애왕의 말로를 후주의 죽음에 비견한 것이다. 《진서(陳書)》 6 후주기 정명(禎明) 3년조 및 같은 책 장귀비전 참조.(이강래, 《삼국사기》 Ⅰ, 한길사, 1998, 301쪽). 진 후주의 귀비이다. 진 후주가 여화를 데리고 술을 마시며 방탕하게 놀다가 수나라 군사가 궁중으로 들어오는 것을 알지 못하였으며 수나라 군사에 의하여 죽었다(북한 과학원 고전연구실, 《삼국사기》 상, 1958, 345쪽).닫기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경순왕(敬順王)이 태조(太祖)께 귀순한 것은 비록 마지못해 한 일이지만 칭찬할 만하다. 그때 만약 힘껏 싸우며 지키는데 사력을 다하며 태조(太祖)의 군사에게 항거했다가 힘이 꺾이고 세력이 다하였다면, 반드시 그 종족(宗族)은 망하고 무고한 백성들에게까지 해가 미쳤을 것이다. 그러나 영(令)을 기다리지 않고 부고(府庫)를 봉하고 군현(郡縣)을 기록하여 귀순하였으니, 조정에 공을 세운 것과 백성들에게 덕을 베푼 것이 매우 컸다. 옛날에 전씨(錢氏)가 오월(吳越)의 땅을 송(宋)에 바친 일196 오월(吳越)은 당말 송초에 중원에서 할거하던 10국 중의 하나로 전유(錢鏐)가 건국한 나라이다. 전유는 893년에 진해절도사(鎭海節度使)가 되었다가 902년에 월왕(越王), 904년에 오왕(吳王)에 봉해졌으며 후량(後梁) 태조 즉위 후 오월왕(吳越王)에 봉해져 칭왕하였다. 그의 사후 원관(元瓘), 좌(佐), 종(倧)이 차례로 왕위를 이어 가다가 978년에 전숙(錢俶)이 토지를 바쳐 송에 귀속하였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393쪽). 중국 5대 때 오월의 임금인 전숙(餞俶)을 가리킨다. 태평흥국 3년에 나라를 송나라에 바쳤다(이재호, 《삼국사기》 1, 솔, 1997, 463쪽). 전씨는 5대 오월국 왕 전숙(餞俶)으로 자는 문덕(文德)이다. 송 태조 때부터 입조하였고, 태평흥국(太平興國) 3년(978년)에 자기 관할 하의 13주를 들어 귀순해와 등왕(鄧王)에 봉해졌으며, 진국왕(秦國王)으로 추봉되었다. 《신오대사》 67 오월세가 7 참조.(이강래, 《삼국사기》 Ⅰ, 한길사, 1998, 302쪽). 송나라 사람 전숙(餞俶)이다. 당나라가 망한 뒤에 후량 태조의 책봉으로 오월국왕이 되었는데 송나라가 흥성하게 되자 그의 국토를 바치고 귀순하였다(북한 과학원 고전연구실, 《삼국사기》 상, 1958, 346쪽).닫기을 두고 소자첨(蘇子瞻)197 첨(瞻)은 당송 8대가의 한사람인 소식(蘇軾)의 자이다. 소식은 송대 미산(眉山) 출신으로 한림학사(翰林學士) 겸 시독(侍讀)과 한림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그의 전기는 《송사》 권338 열전 소식전에 실려 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393쪽). 중국 송나라 문인 소식(蘇軾)의 자(字)이다(이재호, 《삼국사기》 1, 솔, 1997, 463쪽). 소자첨(1036~1101)은 북송 시대 문인으로 당송팔대가의 한 사람인 소식(蘇軾)이다. 즉 소동파(蘇東坡)를 이른다. 여기 보이는 그의 오월국 왕에 대한 평가는 희령(熙寧) 10년(1077년)에 쓴 표충관비(表忠觀碑)에서 인용한 것이다. 그에 의하면 송 태조가 천명을 받아 천하를 평정할 때 촉(蜀)이나 하동(河東)의 유씨(劉氏) 등이 힘이 다하고 형세가 곤궁해진 다음에야 항복하거나 백 번 싸워 죽기로 왕사(王師)에 저항하다가 해골이 쌓여 성을 이루고 피가 흘러 못을 이루었던 것과 달리, 유독 오월만이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창고를 봉하고 군현을 기록해 조정에 관리를 청해 왔으며, 그 나라를 떠나는 것을 잠시 머무는 여관을 떠나는 것처럼 했으니, 조정에 대한 그의 공로가 매우 크다고 하였다. 이어서 그러한 전씨의 공덕은 두융(竇融)보다도 크다고 평가하였다. 그러므로 김부식의 경순왕에 대한 평가는 소식의 오월 왕에 대한 평가의 문면을 거의 그대로 답습한 것이다(이강래, 《삼국사기》 Ⅰ, 한길사, 1998, 302쪽).닫기이 그를 충신(忠臣)이라 하였는데, 이제 신라의 공덕(功德)은 그것보다 한참 더하다. 우리 태조(太祖)께서 비빈(妃嬪)이 많고198 고려 태조는 호족연합책의 일환으로 각 지방의 호족의 딸을 후비로 맞아들여 그 숫자가 모두 29명에 달하였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393쪽).닫기 그 자손 역시 번창하였지만, 현종(顯宗)은 신라의 외손에서 나와 보위에 올랐으며 그 후의 왕통을 계승한 이는 모두 그의 자손이니199 고려 현종(顯宗)은 왕건과 김억렴(金億廉)의 딸 사이에서 난 안종(安宗)의 아들이므로 신라 왕실의 외손(外孫)에 해당된다. 그런데 《삼국유사》 권2 기이편 김부대왕조에 인용된 김관의(金寬毅)의 《왕대종록(王代宗錄)》에는, “신성왕후(神聖王后) 이씨(李氏)는 본래 경주대위(慶州大尉) 이정언(李正言)이 협주수(俠州守)로 있을 때 태조가 이 주에 거둥하여 비로 삼은 사람이므로 협주군(俠州君)이라고도 한다” 하였고 “한 아들을 낳으니 안종이다” 운운 하였다. 이러한 기록에 의거하여 현종의 김씨 출자설은 김부식이 꾸며낸 허구라는 견해도 있다(荻山秀雄, 「三國史記新羅紀結末の疑義」, 《東洋學報》 10-1, 1920). 그러나 《왕대종록》의 기사에는 많은 오류가 발견되므로 이 자료에만 근거하여 현종이 신라 왕실의 외손이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부정할 수는 없다(하현강, 「고려시대의 역사계승의식」, 《이화사학연구》 8, 1975 | 《한국의 역사인식》 상, 1976, 194~196쪽 | 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393~392쪽). 《삼국사기》와 《고려사》에 의하면 현종은 지대야군사 김억렴의 딸인 신성왕후 김씨의 아들인 안종(安宗) 욱(郁)의 소생이므로, 신라 왕실의 외손격이 된다. 그러나 현종과 신라 왕실 간의 혈연적 관련성을 지적한 이 대목에 대해서는 곧바로 이설이 제기되었다. 즉 일연은 《삼국유사》에서 《삼국사기》의 관련 내용을 모두 인용한 다음 주를 가해 의종대 김관의(金寬毅)의 저작 《왕대종록(王代宗錄)》에는 신성왕후가 경주대위(慶州大尉) 이정언(李正言)의 딸이라고 했다는 사실을 지적하였다. 따라서 일부에서는 김관의의 견해에 입각해 신성왕후에 대한 김부식의 설명은 특정한 의도, 즉 이자겸을 배척하는 당대의 분위기에서 이씨와 혈연을 가지는 왕통을 받은 현종의 계보를 개찬할 필요와 동시에, 김부식 자신의 가계를 분식하고 고려 왕실과 특수한 관계임을 설명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날조라고 보기도 한다. 그러나 정작 일연 자신이나 당대의 사가 이제현(李齊賢)과 같은 경우에서도 김관의 등의 이씨설은 근거없는 것으로 부정되었으므로, 이 대목을 김부식의 조작으로 보는 것은 지나친 편견이라고 생각한다(이강래, 《삼국사기》 Ⅰ, 한길사, 1998, 302~303쪽).닫기, 어찌 음덕(陰德)의 응보가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