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권(卷第十六) 고구려본기(髙句麗本紀) 고국천왕(故國川王)
고국천왕(故國川王)
고국천왕(故國川王) 혹은 국양(國襄)은 이름이 남무(男武)이고 이이모(伊夷謨)라고도 한다. 신대왕(新大王) 백고(伯固)의 둘째 아들이다. 백고(伯固)가 죽자, 나라 사람들은 맏아들 발기(拔奇)가 못나고 어리석어, 함께 이이모(伊夷謨)를 세워 왕으로 삼았다. 한(漢)의 헌제(獻帝) 건안(建安) 초에 발기(拔奇)가 형으로서 왕이 되지 못한 것을 원망하여 소노가(消奴加)와 함께 각기 하호(下戶) 3만여 명을 거느리고 공손강(公孫康)에게 나아가 투항하고, 돌아와 비류수(沸流水) 위에 머물렀다. 왕의 신장은 9척이고 자태와 표정이 씩씩하고 뛰어나며 힘이 능히 솥을 들 만하였고, 일을 함에 있어서는 남의 말을 들어주고 끊어버림과 관대하고 엄격함이 지나치거나 모자람이 없이 알맞았다.
2년(180) 봄 2월에 비(妃) 우씨(于氏)를 세워 왕후로 삼았다. 왕후는 제내부(提那部) 우소(于素)의 딸이다.
가을 9월에 왕이 졸본(卒本)으로 가서 시조 사당에 제사를 지냈다.
4년(182) 봄 3월 갑인 밤에 붉은 기운이 태미(太微)를 통과하였는데 뱀과 같았다.
가을 7월에 혜성(星孛)이 태미(太微)에 나타났다.
6년(184) 한(漢)의 요동태수(遼東大守)가 군사를 일으켜 우리를 쳤다. 왕이 왕자 계수(罽須)를 보내 막았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왕은 친히 정예 기병을 거느리고 가서, 한(漢)의 군대와 좌원(坐原)에서 싸워서 이겼는데 베어버린 머리가 산처럼 쌓였다.
8년(186) 여름 4월 을묘에 화성(형혹, 熒惑)이 심성(心星)을 지켰다.
5월 그믐 임진에 일식이 있었다.
12년(190) 가을 9월에 서울(亰都, 국내성)에 눈이 6척이나 내렸다. 중외대부(中畏大夫) 패자(沛者) 어비류(於畀留), 평자(評者) 좌가려(左可慮)가 모두 왕후의 친척으로서 나라의 권력을 잡았는데, 그 자제들이 모두 세력을 믿고 무례하고 거만하며 남의 자녀와 전택을 빼앗았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원망하고 분통해하였다. 왕이 이를 듣고 노하여 죽이려 하니 좌가려(左可慮) 등이 4연내(椽那)와 더불어 반란을 도모하였다.
13년(191) 여름 4월에 좌가려(左可慮) 등이 무리를 모아 왕도를 공격하였다. 왕이 기내(畿內)의 병력을 동원하여 이를 평정하고, 마침내 명령을 내려 말하기를 “요즈음 관직을 총애하는 것에 따라 주고 직위는 덕이 없어도 나아가, 해독이 백성에 미치고 우리 왕실을 흔들고 있다. 이는 과인이 현명하지 못한 소치이다. 이제 너희 4부(四部)는 각기 현량한 자로서 아래에 있는 자를 천거하여라.” 하였다. 이에 4부(四部)가 함께 동부(東部)의 안류(晏留)를 천거하였다. 왕이 그를 불러 국정을 맡기니, 안류(晏留)가 왕에게 말하기를 “미천한 신은 용렬하고 어리석어 본래 큰 정치에 참여하기에 부족합니다. 서압록곡(西鴨淥谷) 좌물촌(左勿村)의 을파소(乙巴素)란 사람은 유리왕(琉璃王) 때의 대신 을소(乙素)의 손자로, 성질이 굳세고 의지가 강하며 지혜와 사려가 깊으나 세상에서 쓰이지 못하고 힘들여 농사지어 자급하고 있습니다. 대왕께서 만일 나라를 다스리고자 한다면 이 사람이 아니면 안 될 것입니다.”라 하였다. 왕이 사신을 보내 겸손한 말과 정중한 예(禮)로서 그를 불러 중외대부(中畏大夫)의 벼슬을 내리고, 벼슬을 더하여 우태(于台)로 삼고 말하기를, “내가 외람되이 선왕의 업을 이어 신민(臣民)의 위에 있으나, 덕이 부족하고 재주가 짧아 다스림에 능란하지 못하다. 선생은 능력과 지혜를 감추고 궁색하게 초원의 늪에 처한 오래 되었다. 이제 나를 버리지 않고 번연히 오니 나만의 기쁨과 행복일 뿐 아니라 사직과 살아 있는 백성의 복이다. 청컨대 가르침을 받으려 하니 공은 마음을 다하라.”하였다. 파소(巴素)가 뜻은 비록 나라에 허락하였으나 받은 관직이 일을 다스리기에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이에 대답하기를 “신은 둔하고 느려서 엄명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원컨대 대왕께서는 어질고 착한 사람을 뽑아 높은 관직을 주어서 대업을 이루소서.” 하였다.
겨울 10월에 왕이 질양(質陽)으로 사냥을 나갔다가 길에서 앉아 우는 자를 보았다. “어떻게 우는가?”하고 물으니, 대답하기를 “신은 매우 가난하여 늘 품팔이를 하여 어머니를 부양하여 모셔왔는데 올해는 곡식이 자라지 않아 품팔이할 곳이 없어, 한 되 한 말의 곡식도 얻을 수 없어 우는 것입니다.”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아! 내가 백성의 부모가 되어 백성들을 이 지경에까지 이르도록 하였으니 나의 죄로다.”고 하고, 옷과 음식을 주고 불쌍히 여겨 어루만졌다. 이에 내외의 담당 관청에 명하여 홀아비, 과부, 고아, 홀로 사는 노인, 병들고 가난하여 스스로 살아 갈 수 없는 사람들을 널리 찾아 구제하게 하였다. 담당 관청에 명하여 매년 봄 3월부터 가을 7월까지, 관의 곡식을 내어 백성 가구(家口)의 많고 적음에 따라 차등이 있게 진휼 대여하게 하고, 겨울 10월에 이르러 갚게 하는 것을 항식(恒式)로 삼았다. 서울과 지방(内外)이 모두 크게 기뻐하였다.
19년(197)에 중국에서 큰 난리가 일어나 한인(漢人)들이 난리를 피하여 투항해 오는 사람이 매우 많았다. 이것이 한(漢)나라 헌제(獻帝) 건안(建安) 2년이었다.
여름 5월에 왕이 서거하였다. 고국천(故國川) 들에 장사지내고, 이름을 고국천왕(故國川王)이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