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권(卷第十六) 고구려본기(髙句麗本紀) 신대왕(新大王)
제16권(卷第十六)
신대왕(新大王)
신대왕(新大王)의 이름은 백고(伯固)이고, 고(固)는 구(句)로도 쓴다. 태조대왕(大祖大王)의 막내 동생(季弟)이다. 예의바르고 영특하며 성품이 인자하고 너그러웠다. 처음에 차대왕(次大王)이 도리를 어겨서 신하와 백성이 따르지 않게 되자, 화란이 있어 피해가 자신에게 미칠 것을 두려워하여 끝내 산골짜기로 피하였었다. 차대왕(次大王)이 피살되자 좌보(左輔) 어지류(菸支留)가 여러 사람과 함께 의논하여 사람을 보내 맞이하였다. 그가 오자 어지류(菸支留)가 무릎을 꿇고 국새(國璽)를 바치며 말하기를 “앞의 왕이 불행히 나라를 버리고 비록 아들이 있으나 국가를 다스릴 수 없습니다. 대개 사람들의 마음이 지극히 자애로운 사람에게 돌아가는 것이니, 삼가 절하고 머리를 조아려 왕위에 오르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이에 엎드려 세 번을 사양한 후에 즉위하였다. 이때 나이가 77세였다.
3년(167) 가을 9월에 왕이 졸본(卒本)에 가서 시조 사당(始祖廟)에 제사를 지냈다.
겨울 10월에 왕이 졸본(卒本)에서 돌아왔다.
4년(168)에 한(漢)의 현도태수(玄菟大守) 경림(耿臨)이 침략해 와서 아군 수백 명을 죽였다. 왕이 스스로 항복하여 현도(玄菟)에 속하기를 청하였다.
5년(169) 왕이 대가(大加) 우거(優居), 주부(主簿) 연인(然人) 등을 보내 병력을 이끌고 현도태수(玄菟郡大守) 공손탁(公孫度)을 도와 부산적(富山賊)을 정벌하였다.
8년(172) 겨울 11월에 한(漢)나라가 많은 병력으로 우리 나라를 향해 쳐들어왔다. 왕이 여러 신하들에게 싸우는 것과 지키는 것 중 어느 쪽이 나은지를 물었다. 많은 사람이 의논하여 말하기를 “한(漢)이 병력이 많은 것을 믿고 우리를 가볍게 여기니, 만약 나아가 싸우지 않으면 그들은 우리를 비겁하다고 여겨서 자주 침략해올 것입니다. 또 우리 나라는 산이 험하고 길이 좁아 이는 이른바 ‘한(一) 사람이 관(關)을 지키면 만(萬) 사람이 당할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한(漢)의 병력이 비록 많으나 우리를 어떻게 할 수 없으니 군대를 내어 막기를 청합니다.”라 하였다. 답부(荅夫)가 대답하기를 “그렇지 않습니다. 한(漢)은 나라가 크고 백성이 많아 지금 강력한 병력으로서 멀리 와서 싸우므로 그 날카로운 기세를 당할 수 없습니다. 또 병력이 많으면 마땅히 싸워야 하고, 병력이 적으면 마땅히 지켜야 하는 것이 병가(兵家)의 상식입니다. 지금 한(漢)나라 사람들이 군량을 천 리나 옮겼기 때문에 오래 갈 수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도랑을 깊이 파고 보루를 높이며 들을 비우고 기다리면 저들은 필시 달을 넘기지 못하고 굶주리고 곤궁해져서 돌아갈 것입니다. 우리가 날랜 병졸로 치면 뜻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라 하였다. 왕은 그러하다고 여기고 성을 닫고 굳게 지켰다. 한(漢)나라 사람들이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사졸들이 굶주리므로 이끌고 돌아갔다. 답부(荅夫)가 수천의 기병을 거느리고 저들을 추격하여 좌원(坐原)에서 싸워, 한(漢)나라 군대가 크게 패하여 한 필의 말도 돌아가지 못하였다. 왕이 크게 기뻐하고 답부(荅夫)에게 좌원(坐原)과 질산(質山)을 주어 식읍(食邑)으로 삼았다.
12년(176) 봄 정월에 여러 신하들이 태자를 책립하기를 청하였다.
3월에 왕자 남무(男武)를 세워 왕태자로 삼았다.
14년(178) 겨울 10월 그믐 병자에 일식이 있었다.
15년(179) 가을 9월에 국상(國相) 답부(荅夫)가 죽었는데 나이가 113세였다. 왕이 직접 오셔서 애통해 하였고, 7일 동안 조회를 파하였다. 비로소 질산(質山)에 예로써 장사지내고 묘지기 20가(家)를 두었다.
겨울 12월에 왕이 서거하였다. 고국곡(故國谷)에 장사지내고 이름을 신대왕(新大王)이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