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권(卷第十八) 고구려본기(髙句麗本紀) 고국원왕(故國原王)
제18권(卷第十八)
고국원왕(故國原王)
고국원왕(故國原王)은 국강상왕(國岡上王)이라고도 한다. 이름이 사유(斯由)이다. 쇠(釗)라고도 한다. 미천왕(羙川王) 15년에 책립하여 태자를 삼았고, 32년 봄에 왕이 서거하여 즉위하였다.
2년(332) 봄 2월에 왕이 졸본(卒本)에 가서 시조 사당에 제사를 지내고, 백성들을 두루 방문하여 늙고 병든 자들을 구제해주었다.
3월에 졸본(卒本)에서 돌아왔다.
4년(334) 가을 8월에 평양성(平壤城)을 증축하였다
겨울 12월에 눈이 오지 않았다.
5년(335) 봄 정월에 나라 북쪽에 신성(新城)을 쌓았다.
가을 7월에 서리가 내려 곡식을 죽였다.
6년(336) 봄 3월에 큰 별(大星(이 서북쪽으로 흘러갔다. 사신을 진(晉)에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9년(339)에 연왕(燕王) 모용황(慕容皝)이 침략해 와서 그 병력이 신성(新城)에 도달하였다. 왕이 화해하자고 하니 이에 돌아갔다.
10년(340)에 왕이 세자를 보내 연왕(燕王) 모용황(慕容皝)을 만나보게 하였다.
가을 8월에 환도성(丸都城)으로 옮겨 살았다.
겨울 10월에 연(燕)왕 모용황(慕容皝)이 용성(龍城)으로 도읍을 옮겼다. 입위장군(立威將軍) 한(翰)이 먼저 고구려를 빼앗고 나중에 우문(宇文)씨를 멸망시킨 연후에 중원을 도모하기를 청하였다. 고구려에는 두 길이 있는데 북도(北道)는 평평하고 넓고, 남도(南道)는 험하고 좁아서 무리가 북도(北道)로 가려고 하였다. 한(翰)이 말하기를 “오랑캐는 상식적으로 헤아려 반드시 대군이 북도(北道)로 올 것이라 생각하여 당연히 북쪽을 중요시하고 남쪽을 가볍게 여길 것입니다. 왕은 마땅히 정예 병력을 거느리고 남도(南道)를 따라 이를 공격하여 불의에 나아가면 환도(丸都)는 족히 취할 것도 못됩니다. 별도로 적은 군사를 북도(北道)로 보내면 비록 차질이 있더라도 그 가슴과 배가 이미 무너지면 사지(四肢)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 모용황(慕容皝)이 그 말에 따랐다.
11월에 모용황(慕容皝)이 스스로 굳센 병력 4만을 거느리고 남도(南道)로 나오고, 모용한(慕容翰)과 모용패(慕容覇)를 선봉으로 삼고, 별도로 장사(長史) 왕우(王寓) 등을 보내 병력 1만 5천을 거느리고 북도(北道)로 나와 침략해 왔다. 왕이 동생 무(武)를 보내 정예병력 5만을 거느리고 북도(北道)를 막게 하고, 자신은 약한 병력을 거느리고 남도(南道)를 방어하였다. 모용한(慕容翰) 등이 먼저 도착하여 싸우고 모용황(慕容皝)이 큰 무리로써 이어 오니 우리 병력이 크게 패하였다. 좌장사(左長史) 한수(韓壽)가 우리 장수 아불화도가(阿佛和度加)의 목을 베니 여러 군사들이 승기를 타고 드디어 환도(丸都)로 들어왔다. 왕이 혼자 말을 타고 달아나 단웅곡(斷熊谷)으로 들어갔다. 장군 모여니(慕輿埿)가 왕의 어머니 주씨(周氏)와 왕비를 추격하여 사로잡아 돌아갔다. 마침 왕우(王寓) 등이 북도(北道)에서 싸워서 모두 패하여 죽었다. 이로 말미암아 모용황이 다시 끝까지 추격하지 않고 사신을 보내 왕을 불렀으나 왕이 나오지 않았다. 모용황(慕容皝)이 돌아가려 하는데 한수(韓壽)가 말하기를 “고구려 땅은 지킬 수 없습니다. 지금 그 왕은 도망하고 백성은 흩어져 산골짜기에 들어가 숨어 엎드려 있습니다. 대군이 돌아가면 반드시 다시 모여들어 남은 불씨를 거둘 것이니 오히려 걱정거리가 될 것입니다. 그의 아버지의 시신을 싣고, 그의 친어머니를 인질로 잡아 돌아가서 몸을 묶고 스스로 항복해 오기를 기다린 후에 돌려주기를 청하옵니다. 은덕과 신뢰로 무마하는 것이 상책이옵니다.” 하였다. 모용황(慕容皝)이 그 말에 따라 미천왕(羙川王)의 무덤을 파서 그 시신을 싣고, 창고 안에 있던 여러 대의 보물을 약탈하고, 남녀 5만여 명을 사로잡고 궁실을 불태우고, 환도성(丸都城)을 헐어버리고 돌아갔다.
13년(343) 봄 2월에 왕이 그의 동생을 연(燕)에 보내 신하를 칭하며 조회하고, 진기한 물건 천여 점을 바쳤다. 연왕(燕王) 모용황(慕容皝)이 이에 그 아버지의 시신을 돌려보내고 그 어머니는 아직 남겨두어 인질로 삼았다.
가을 7월에 평양(平壤) 동황성(東黃城)으로 옮겨 살았다. 성은 지금의 서경(西京) 동쪽 목멱산(木覓山) 중에 있다. 진(晉)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겨울 11월에 눈이 5척(尺)이나 왔다.
15년(345) 겨울 10월에 연왕(燕王) 모용황(慕容皝)이 모용각(慕容恪)을 시켜 공격해 와서 남소(南蘇)를 빼앗아 주둔병을 두고 돌아갔다.
19년(349)에 왕이 전(前) 동이호군(東夷護軍) 송황(宋晃)을 연(燕)으로 보냈다. 연왕(燕王) 모용준(慕容雋)이 그를 용서하고 이름을 바꾸어 활(活)이라 하고 벼슬을 내려 중위(中尉)를 삼았다.
25년(355) 봄 정월에 왕자 구부(丘夫)를 책립하여 왕태자를 삼았다.
겨울 12월에 왕이 사신을 연(燕)에 보내 인질과 조공을 바치면서 어머니를 돌려보내주기를 청하였다. 연왕(燕王) 모용준(慕容雋)이 이를 허락하고 전중장군(殿中將軍) 도감(刀龕)을 보내 왕의 어머니 주씨(周氏)를 호송하여 귀국하게 하고, 왕으로서 정동대장군(征東大將軍) 영주자사(營州刺史)를 삼고 낙랑공(樂浪公)을 봉하고 왕은 예전과 같이 하였다.
39년(369) 가을 9월에 왕이 병력 2만으로 남쪽으로 백제(百濟)를 쳤으나 치양(雉壤)에서 싸워 패배하였다.
40년(370)에 진(秦)의 왕맹(王猛)이 연(燕)을 정벌하여 이를 무너뜨렸다. 연(燕)의 태부(太傅) 모용평(慕容評)이 도망해오자 왕이 잡아서 진(秦)으로 보내다.
41년(371) 겨울 10월에 백제왕(百濟王)이 병력 3만을 거느리고 평양성(平壤城)을 공격해 왔다. 왕이 군대를 내어 막다가 흐르는 화살에 맞아 이 달 23일에 서거하였다. 고국(故國)의 들에 장사지내다. 백제(百濟) 개로왕(蓋鹵王)이 위(魏)에 표(表)를 보내어 말하기를 “쇠(釗)의 머리를 베어 매달았다.”고 하였는데 지나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