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권(券第二) 신라본기(新羅本紀) 미추(味鄒) 이사금(尼師今)
미추(味鄒) 이사금(尼師今)
미추이사금(味鄒尼師今)189 신라 제13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262~284년이다. 《삼국유사》 권1, 왕력에는 미추(未鄒)·미조(未祖)·미소(味炤)·미소(未召)로 다양하게 표기되어 있다. 미추이사금은 김알지(金閼智)의 후손으로서 신라사에서 김씨로서 최초로 왕위에 오른 인물이다.닫기이 왕위에 올랐다. 또는 미조(味照)라고도 하였다. 성은 김(金)이다. 어머니는 박씨(朴氏)로 갈문왕(葛文王) 190 갈문왕은 왕위계승권이 없는 준왕(準王)과 같은 존재로서 왕과의 일정한 관계를 기준으로 하여 책봉되었다. 곧 신라의 지배층인 왕족과 왕비족을 중신으로 한 사회적·정치적 관계를 표현해주는 것으로 시대에 따라 그 경향성도 변화하였다. 신라 초기 박씨왕 시대에는 왕비의 아버지가 주로 갈문왕에 책봉되었고, 눌지왕 이후 마립간 시기에는 왕의 동생이 갈문왕에 책봉되었다. 그러다가 태종무열왕 이후에는 죽은 아버지에 대한 추봉적(追封的) 의미의 갈문왕제만이 유지되었다(이기백, 「신라시대의 갈문왕」, 《신라정치사회사연구》, 일조각, 1974). 이외에 송은정, 「신라 상대 갈문왕의 성격과 변화」, 《숙명 한국사론》 2, 1996에서도 갈문왕에 대한 종합적인 분석을 시도하였다.닫기이칠(伊柒)의 딸이다. 91 《삼국유사》 王曆篇에서는 伊柒을 伊非로 표기하였고 그를 갈문왕이라 하였다. 그리고 伊柒의 딸인 미추왕의 어머니를 生乎夫人 혹은 述禮夫人이라 하였다.닫기왕비는 석씨(昔氏) 광명부인(光明夫人)192 《삼국유사》 王曆篇에서는 光明娘이라 하였다.닫기으로 조분왕(助賁王)의 딸이다. 그의 선조 알지(閼智)가 계림(鷄林)에서 태어나 탈해왕(脫解王)193 신라 제4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57~80년이다. 외부에서 이주해와 석씨(昔氏)로서 최초로 왕위에 올랐다. 석탈해의 집권과정에 대해서는 《삼국사기》 권1, 신라본기1, 탈해이사금 즉위년과 《삼국유사》 권1, 기이2, 제사탈해왕에 자세하다. 또한 본격적인 연구 성과로는 장창은, 「신라 박씨왕실의 분기와 석씨족의 집권과정」, 《신라사학보》 창간호, 신라사학회, 2004, 42~53쪽 참조.닫기이 거두어 궁중에서 길러 나중에 대보(大輔)194 신라 초기에 관등이 생기기 이전에 국정을 총괄했던 직책이다. 탈해 이외에 탈해이사금대에 호공(瓠公)과 알지(閼智)가 대보에 임명된 사례가 있다. 고구려에서 유리왕 22년(3) 협보를 대보로 임명한 사례가 있다(《삼국사기》 권13, 고구려본기1, 유리명왕 22년조).닫기로 삼았다. 195 신라에서 알지가 등장하는 과정에 대해서는 《삼국사기》 권1, 신라본기1, 탈해이사금 9년(65)조와 《삼국유사》 권1, 기이2, 김알지(金閼智) 탈해왕대(脫解王代)에 전한다. 《삼국유사》에 탈해가 알지를 태자(太子)로 삼았다는 기록은 있으나 대보(大輔)로 삼았다는 기록은 이곳에만 있다.닫기알지(閼智)는 세한(勢漢)196 《삼국유사》 권1, 기이2, 김알지 탈해왕대에는 ‘열한(熱漢)’으로 되어 있다.닫기을 낳았고, 세한(勢漢)은 아도(阿道)197 미추왕의 曾祖라는 사실 밖에는 알려진 바가 없다. 그런데 일성왕 15년에 葛文王으로 봉해진 朴阿道, 《삼국사기》 권45 열전 朴堤上傳에서 박제상의 할아버지라 한 阿道葛文王과 동일인인지도 모르겠다.닫기를 낳았고, 아도(阿道)는 수류(首留)를 낳았고, 수류(首留)는 욱보(郁甫)198 《삼국유사》 권1, 기이2, 김알지 탈해왕대에는 ‘욱부(郁部)’로 되어 있다.닫기를 낳았고, 욱보(郁甫)는 구도(仇道)199 구도는 김알지(金閼智)의 후손으로 나중에 김씨로서 최초로 왕위에 오르는 미추이사금(味鄒尼師今)의 아버지이다. 아달라이사금 19년(172)에 파진찬에 올라 벌휴이사금 2년(185)에는 좌군주(左軍主)로서 의성의 소문국(召文國)을 정벌하였고, 같은 왕 5년(188)과 6년에는 백제와의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다. 하지만 다음해(170년) 와산(蛙山)에서 벌어진 백제와의 전투에서 패함으로써 부곡성주(缶谷城主)로 좌천되었다. 이후의 활동은 드러나지 않는다. 미추왕이 즉위 2년(263)에 죽은 아버지 구도를 갈문왕(葛文王)으로 추봉하였다.닫기를 낳았는데, 구도(仇道)가 곧 미추(味鄒)의 아버지이다. 첨해(沾解)가 아들이 없자 나라 사람들이 미추(味鄒)를 세웠다. 이것이 김씨(金氏)가 나라를 갖게 된 시초이다.
원년(262) 봄 3월에 용이 궁 동쪽 연못에서 나타났다.
가을 7월에 금성(金城)200 신라 시조 혁거세 때 쌓은 궁성(宮城)이다. 신라 상고기(上古期)에 월성(月城)과 함께 왕성으로 사용되다가 중고기 이후에 월성에 그 지위를 넘겨 주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1, 경주부, 고적에는 부의 동쪽 4리에 있는 토성(土城)으로 둘레가 2,407척이라고 되어 있다. 금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월성의 서북쪽 내지 알천[북천] 부근으로 보는 견해와(강종원, 「신라 왕경의 형성과정」, 《백제연구》 23, 1992, 220쪽 | 전덕재, 「이사금시기 신라의 성장과 6부」, 《신라문화》 21, 동국대 신라문화연구소, 2003, 176~178쪽), 박씨 세력의 활동 무대인 나정·알영정 근처, 즉 경주평야 남쪽 지금의 교동 일대로 비정한 연구가 있다(이종욱, 《신라상대왕위계승연구》, 영남대학교 출판부, 1980, 58~59쪽). 금성의 위치에 대한 연구사 검토는 전덕재, 《신라 왕경의 역사》, 새문사, 2009, 170~174쪽에 자세하며, 황보은숙, 「금성의 위치 비정」, 《신라문화》 34, 2009에서도 이를 종합적으로 다루고 있다.닫기 서문에 불이 나서 번져 민가 3백여 채가 불에 탔다.
2월에 몸소 국조묘(國祖廟)204 시조묘(始祖廟)를 말한다. 시조묘는 ‘조묘(祖廟)’ ‘선조묘(先祖廟)’ ‘조고묘(祖考廟) 등으로 표기되었다(최광식, 《고대한국의 국가와 제사》, 한길사, 1994, 171쪽). 미추왕이 즉위 의례의 하나로 친히 제사지냈던 시조란 박혁거세(朴赫居世)를 말한다(채미하, 《신라 국가제사와 왕권》, 혜안, 2008, 65쪽).닫기에 제사 지내고 크게 사면하였다. 죽은 아버지 구도(仇道)205 구도는 김알지(金閼智)의 후손으로 나중에 김씨로서 최초로 왕위에 오르는 미추이사금(味鄒尼師今)의 아버지이다. 아달라이사금 19년(172)에 파진찬에 올라 벌휴이사금 2년(185)에는 좌군주(左軍主)로서 의성의 소문국(召文國)을 정벌하였고, 같은 왕 5년(188)과 6년에는 백제와의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다. 하지만 다음해(170년) 와산(蛙山)에서 벌어진 백제와의 전투에서 패함으로써 부곡성주(缶谷城主)로 좌천되었다. 이후의 활동은 드러나지 않는다. 미추왕이 즉위 2년(263)에 죽은 아버지 구도를 갈문왕(葛文王)으로 추봉하였다.닫기를 갈문왕(葛文王)206 갈문왕은 왕위계승권이 없는 준왕(準王)과 같은 존재로서 왕과의 일정한 관계를 기준으로 하여 책봉되었다. 곧 신라의 지배층인 왕족과 왕비족을 중신으로 한 사회적·정치적 관계를 표현해주는 것으로 시대에 따라 그 경향성도 변화하였다. 신라 초기 박씨왕 시대에는 왕비의 아버지가 주로 갈문왕에 책봉되었고, 눌지왕 이후 마립간 시기에는 왕의 동생이 갈문왕에 책봉되었다. 그러다가 태종무열왕 이후에는 죽은 아버지에 대한 추봉적(追封的) 의미의 갈문왕제만이 유지되었다(이기백, 「신라시대의 갈문왕」, 《신라정치사회사연구》, 일조각, 1974). 이외에 송은정, 「신라 상대 갈문왕의 성격과 변화」, 《숙명 한국사론》 2, 1996에서도 갈문왕에 대한 종합적인 분석을 시도하였다.닫기으로 봉하였다.
3년(264) 봄 2월에 동쪽으로 순행(巡幸)하여 바다를 보며 제사지냈다.
3월에 황산(黃山)209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2, 양산군(梁山郡) 산천(山川)에 따르면, 이곳에 황산강(黃山江)이 있었고, 신라시대 중사(中祀) 4독(四瀆) 중 하나였다고 한다. 따라서 황산도 지금의 경남 양산시 일대로 보아도 무리가 없을 것 같다.닫기에 행차해 나이 많은 사람과 가난해서 스스로 살아갈 수 없는 사람을 진휼하였다.
7년(268) 봄과 여름에 비가 오지 않자 군신들을 남당(南堂)213 남당은 원시부족집회소의 후신으로, 회의 기관이자 실무를 집행하는 국가의 중심적인 정청이다(이병도, 「고대남당고」, 《한국고대사연구》, 박영사, 1976, 623~636쪽). 남당은 그 직속에 집행 기관을 가졌다기보다 그 결정이 왕을 통해 집행되었다(이기백, 「품주고」, 《신라정치사회사연구》, 일조각, 1974, 137쪽).닫기에 모이게 해 친히 정치와 형벌 시행의 잘잘못을 물었다. 또한 사신 5명을 보내 두루 돌며 백성의 괴로움과 걱정거리를 물어보게 하였다.
11년(272) 봄 2월에 영을 내려 무릇 농사짓는 일에 해가 있으면 일체 그것을 없애라고 하였다.
가을 7월에 서리와 우박이 내려 곡식을 해쳤다.
겨울 11월에 백제가 변경(邊)을 침략하였다.
15년(276) 봄 2월에 신료들이 궁실을 고쳐 짓기를 청하였으나 임금이 백성을 수고롭게 하는 것이어서 따르지 않았다.
17년(278) 여름 4월에 폭풍이 불어 나무가 뽑혔다.
19년(280) 여름 4월에 가물어서 죄수의 정상을 살폈다.
20년(281) 봄 정월에 홍권(弘權)218 미추이사금 20년(281)에 이찬으로 등용된 후 유례이사금 2년(285)에는 서불한에 올라 정치의 중요한 일을 관장하였다. 같은 왕 12년(295)에 유례이사금이 백제와 힘을 합쳐 왜(倭)를 정벌하려 하자 왕에게 간하여 이를 중단시켰다.닫기을 이찬(伊湌)219 신라 경위(京位) 17관등 중 2위이다. 《삼국사기》 권38, 잡지7, 직관(職官) 상에 따르면, 이척찬(伊尺湌)이라고도 했다.닫기으로 삼고 양질(良質)20 미추왕 20년에 일길찬이 되었다가 미추왕 22년(283) 10월에 槐谷城을 포위한 백제군을 방어하였다.닫기을 일길찬(一吉湌)221 신라 경위(京位) 17관등 중 7위이다. 《삼국사기》 권38, 잡지7, 직관(職官) 상에 따르면, 을길간(乙吉干)이라고도 했다.닫기으로 삼았으며, 광겸(光謙)을 사찬(沙湌)222 신라 경위(京位) 17관등 중 8위이다. 《삼국사기》 권38, 잡지7, 직관(職官) 상에 따르면, 살찬(薩湌), 사돌간(沙咄干)이라고도 했다.닫기으로 삼았다.
2월에 조묘(祖廟)에 배알하였다.
가을 9월에 양산(楊山)223 일명 남산(南山) 또는 금오산(金鰲山)이라 불리는 산으로 경주 분지의 남쪽에 있다.닫기 서쪽에서 크게 사열(査閱)하였다.
22년(283) 가을 9월에 백제가 변경(邉)을 침략하였다.
겨울 10월에 괴곡성(槐谷城)225 《신증동국여지승람》 권14, 괴산군(槐山郡) 건치연혁에 따르면, 이곳이 신라시대에 괴양군(槐壤郡)이었다고 한다. 때문에 괴곡과 괴양을 같은 지명으로 보아 괴곡을 지금의 충북 괴산군 괴산읍 일대로 비정하기도 하는 데(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69쪽), 확실하지는 않다.닫기을 포위하자 일길찬(一吉湌) 226 신라 경위(京位) 17관등 중 7위이다. 《삼국사기》 권38, 잡지7, 직관(職官) 상에 따르면, 을길간(乙吉干)이라고도 했다.닫기양질(良質)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그들을 막게 하였다.
23년(284) 봄 2월에 나라 서쪽의 여러 성을 돌아다니며 위로하였다.
겨울 10월에 왕이 죽어 대릉(大陵)《삼국유사》 권1 紀異篇 미추왕 죽엽군조에서는 竹現陵이라 하고 왕릉은 흥륜사 동쪽에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미추왕릉을 속칭 始祖堂이라 하였으며 次序를 오릉의 상위에 놓아 大廟라 일컬었다고 한다. 미추왕릉은 현재의 경북 경주시 황남동 대릉원 안에 있는데, 이 능은 원형봉토분으로 지름이 56.7m이고 높이가 12.2m이다.닫기228 《삼국유사》 권1, 기이2, 미추왕(未鄒王) 죽엽군(竹葉軍)에는 미추왕릉을 ‘시조당(始祖堂)’ ‘죽현릉(竹現陵)’ ‘대묘(大廟)’라 불렀고, 그렇게 불리게 된 이유가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고고학계에서는 일반적으로 미추왕의 대릉을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과 연결시킨다(김원룡, 《한국고고학개설》, 제3판, 일지사, 1986, 102쪽 | 최병현, 《신라고분연구》, 일지사, 1992, 378~415쪽). 적석목곽분의 기원과 편년에 대한 연구 동향은 이종선, 「적석목곽분의 편년에 대한 제논의」, 《고신라왕릉연구》, 학연문화사, 2000, 33~68쪽에 자세하다.닫기에 장사지냈다. 또는 죽장릉(竹長陵)이라고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