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권(券第二) 신라본기(新羅本紀) 벌휴(伐休) 이사금(尼師今)
벌휴(伐休) 이사금(尼師今)
벌휴이사금(伐休尼師今)이 왕위에 올랐다.038 신라 제9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184~196년이다. 아달라이사금으로 ‘박씨왕 시대’가 끝나고 벌휴이사금이 즉위함으로써 제4대 탈해이사금(脫解尼師今) 이후 끊겼던 ‘석씨왕 시대’가 시작되었다. 이 왕대에 처음으로 군주(軍主)가 생겼고, 소문국을 복속하는 등 경상도 일대로의 영역 확장 사업을 본격화하였다.닫기 또는 발휘(發暉)라고도 한다. 성은 석씨(昔氏)이다. 탈해왕(脫解王)039 신라 제4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57~80년이다. 외부에서 이주해와 석씨(昔氏)로서 최초로 왕위에 올랐다. 석탈해의 집권과정에 대해서는 《삼국사기》 권1, 신라본기1, 탈해이사금 즉위년과 《삼국유사》 권1, 기이2, 제사탈해왕에 자세하다. 또한 본격적인 연구 성과로는 장창은, 「신라 박씨왕실의 분기와 석씨족의 집권과정」, 《신라사학보》 창간호, 신라사학회, 2004, 42~53쪽 참조.닫기의 아들인 각간(角干) 석구추(昔仇鄒)의 아들이다.040 여기서 구추는 탈해의 아들이고 벌휴왕의 아버지라 하였으나, 벌휴는 탈해가 죽은 지 104년이 지난 후에 왕위에 올랐으므로 仇鄒의 계보에는 무언가 잘못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脫解-仇鄒-伐休로 이어진다는 《삼국사기》의 계보는 허구이고 벌휴는 탈해와 혈연적인 관계가 없다는 견해도 있다. 즉 脫解系와는 다른 집단인 伐休系가 북방에서 남하하여 경주에 도래한 후, 경주 지역에서 이미 吐含山神으로 숭배되고 있던 탈해의 계보에 자신의 계보를 附會하여 자칭 탈해의 후손이라고 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천관우, 《고조선사·삼한사연구》, 1989, 300쪽).닫기 어머니는 김씨(金氏) 지진내례부인(只珍內禮夫人)이다. 아달라(阿達羅)041 신라 제8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154~184년이다. 신라 상대에는 박씨(朴氏), 석씨(昔氏), 김씨(金氏)가 차례로 왕위를 계승하였는데, 아달라이사금은 ‘박씨왕 시대’의 마지막 왕이다.닫기가 죽고 아들이 없자 나라 사람들이 그를 세웠다. 왕은 바람과 구름을 점쳐 홍수와 가뭄, 그리고 그 해의 풍흉을 미리 알았다. 또 사람의 사악함과 정직함을 알았으므로 사람들이 그를 일컬어 성인이라고 하였다.
2년(185) 봄 정월에 몸소 시조묘(始祖廟)042 《삼국사기》 권32, 잡지1, 제사(祭祀)를 참고하면, 시조묘는 박혁거세의 사당으로 1년에 4차례 제사지냈다. 남해왕 3년(6)에 처음 세웠는데, 그는 친누이 아로(阿老)로 하여금 시조묘 제사를 주관하게 하였다. 이후의 왕은 일반적으로 즉위 의례의 차원에서 시조묘에 몸소 제사를 지냈다. 시조묘에 제사를 지내 하늘의 자손이라는 의식을 강조함으로써 왕권을 강화할 수 있었다(최광식, 《고대한국의 국가와 제사》, 한길사, 1994, 165~174쪽). 시조묘는 ‘조묘(祖廟)’ ‘국조묘(國祖廟)’ ‘선조묘(先祖廟)’ ‘조고묘(祖考廟)’ 등으로도 표기되었다.닫기에 제사 지내고 크게 사면하였다.
2월에 파진찬(波珍湌) 043 신라 경위(京位) 17관등 중 4위이다. 《삼국사기》 권38, 잡지7, 직관(職官) 상에 따르면, 해간(海干), 파미간(破彌干)이라고도 했다.닫기구도(仇道)044 구도는 김알지(金閼智)의 후손으로 나중에 김씨로서 최초로 왕위에 오르는 미추이사금(味鄒尼師今)의 아버지이다. 아달라이사금 19년(172)에 파진찬에 올라 벌휴이사금 2년(185)에는 좌군주(左軍主)로서 의성의 소문국(召文國)을 정벌하였고, 같은 왕 5년(188)과 6년에는 백제와의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다. 하지만 다음해(170년) 와산(蛙山)에서 벌어진 백제와의 전투에서 패함으로써 부곡성주(缶谷城主)로 좌천되었다. 이후의 활동은 드러나지 않는다. 미추왕이 즉위 2년(263)에 죽은 아버지 구도를 갈문왕(葛文王)으로 추봉하였다.닫기와 일길찬(一吉湌) 045 신라 경위(京位) 17관등 중 7위이다. 《삼국사기》 권38, 잡지7, 직관(職官) 상에 따르면, 을길간(乙吉干)이라고도 했다.닫기구수혜(仇須兮)046 아달라이사금 19년(172)에 일길찬에 올라 벌휴이사금 2년(185)에 우군주(右軍主)로서 구도(仇道)와 함께 소문국(召文國)을 정벌하였다.닫기를 좌·우 군주(軍主)047 신라 초기에 兵權을 맡은 관리로, 左軍主와 右軍主를 말한다. 이것이 신라에서 軍主의 이름을 쓰기 시작한 시초였다. 한편 《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 지증 마립간 6년 2월조에서는 이사부를 悉直州 軍主로 삼은 것이 군주 명칭의 시작이었다고 하였다. 지증왕 6년에 설치된 군주는 州의 장관으로서 일정지역에 주둔하면서 행정·군사를 총괄하던 常設官職으로서의 군주인 반면에 벌휴왕 2년의 左·右軍主는 지방에 장기간 주둔하지 않고 有事時에만 군대를 통솔하는 중앙의 임시적인 관직이 아니었을까 한다.닫기로 삼아 소문국(召文國)048 《삼국사기》 권34, 지리1, 상주(尙州)에 따르면, 소문국은 경덕왕(景德王) 때에 문소군(聞韶郡)으로 명칭이 바뀌었다가 고려시대에 의성부(義城府)가 되었다. 소문국이 위치한 의성 지역은 경상북도의 중앙에 해당될 뿐 아니라 신라가 3세기 초엽에 이르러 낙동강 이동과 소백산맥 이남의 경상북도 전 지역으로 세력을 확장시키는데 전초지가 되었던 곳이다(이형우, 《신라초기국가형성사연구》, 영남대학교출판부, 2000, 143쪽). 소문국에 대한 종합적인 이해는 주보돈, 《초기국가 소문국과 그 향방》, 《인하사학》 10, 인하역사학회, 2003이 참고가 된다.닫기을 정벌하였다. 군주(軍主)의 이름은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3년(186) 봄 정월에 주(州)·군(郡)을 순행하며 풍속을 살펴보았다.
여름 5월 그믐 임진(壬辰)에 일식이 있었다.
가을 7월에 남신현(南新縣)에서 상서로운 벼이삭(가화, 嘉禾)을 바쳤다.
4년(187) 봄 3월에 주(州)·군(郡)에 영을 내려 토목공사를 일으켜 농사의 시기를 뺏는 일이 없도록 하였다.
겨울 10월에 북쪽 지방에 큰 눈이 와서 1장(丈)052 길이를 나타내는 단위로 1장은 10척(尺)과 같다. 1척은 시대에 따라 길이가 다른데, 한나라 때에는 약 23cm, 당나라 때에는 24.5cm였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이와 비슷했을 경우도 추정되며 고려시대 이후는 약 30cm 전후였다. 한편 1장은 일반적으로 사람의 키 정도 길이를 의미하기도 한다.닫기이나 쌓였다.
5년(188) 봄 2월에 백제가 모산성(母山城)053 모산성은 충북 진천군에 있는 대모산성(大母山城)을 말한다(이병도, 《삼국사기》 상, 을유문화사, 1983, 47쪽). 대모산성에 대한 종합적인 연구는 민덕식, 「진천 대모산성의 분석적 연구」, 《한국사연구》 29, 1980이 참고된다. 한편 모산성의 위치를 경북 의성 방면으로 본 연구도 있다(천관우, 《고조선사·삼한사연구》, 일조각, 1989, 302쪽).닫기을 공격해 와서 파진찬(波珍湌) 054 신라 경위(京位) 17관등 중 4위이다. 《삼국사기》 권38, 잡지7, 직관(職官) 상에 따르면, 해간(海干), 파미간(破彌干)이라고도 했다.닫기구도(仇道)055 구도는 김알지(金閼智)의 후손으로 나중에 김씨로서 최초로 왕위에 오르는 미추이사금(味鄒尼師今)의 아버지이다. 아달라이사금 19년(172)에 파진찬에 올라 벌휴이사금 2년(185)에는 좌군주(左軍主)로서 의성의 소문국(召文國)을 정벌하였고, 같은 왕 5년(188)과 6년에는 백제와의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다. 하지만 다음해(170년) 와산(蛙山)에서 벌어진 백제와의 전투에서 패함으로써 부곡성주(缶谷城主)로 좌천되었다. 이후의 활동은 드러나지 않는다. 미추왕이 즉위 2년(263)에 죽은 아버지 구도를 갈문왕(葛文王)으로 추봉하였다.닫기에게 명하여 병사를 내어 막게 하였다.
6년(189) 가을 7월에 구도(仇道)가 백제와 구양(拘壤)056 《삼국사기》 권1, 신라본기1, 탈해이사금 8년(64)조에 백제와의 교전지 구양성(狗壤城)이 나오는데 문맥상 구양과 같은 곳으로 생각된다. 구양의 위치에 대해서는 충북 옥천으로 보는 설(이병도, 《삼국사기》 상, 을유문화사, 1983, 47쪽)과 충북 괴산으로 보는 설(천관우, 《고조선사·삼한사연구》, 일조각, 1989, 302쪽)이 있으나 분명한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닫기에서 싸워 이겨서 5백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7년(190) 가을 8월에 백제가 서쪽 변경의 원산향(圓山鄕)058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5, 용궁현(龍宮縣) 건치연혁에 따르면, 이곳을 신라시대에 원산(園山)이라고도 불렀다. 이 기록에 주목해서 원산향의 위치를 경북 예천으로 비정하기도 한다(이병도, 《삼국사기》 상, 을유문화사, 1983, 47쪽 및 천관우, 《고조선사·삼한사연구》, 일조각, 1989, 302쪽).닫기을 습격했고, 또 진격해서 부곡성(缶谷城)059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7, 의흥현(義興縣) 속현에 부계현(缶溪縣)이 현 남쪽 31리에 있으며, 삼국시대에는 부림현(缶林縣)이었다고 한다. 이 기록에 주목해서 부곡성을 경북 군위군 부계면 일대로 보기도 하는 데(이병도, 《삼국사기》 상, 을유문화사, 1983, 47쪽 | 천관우, 《고조선사·삼한사연구》, 일조각, 1989, 302쪽), ‘부(缶)’자가 같다는 것 외에 명확한 근거가 없으므로 신중한 접근을 요한다.닫기을 포위했다. 구도(仇道)060 구도는 김알지(金閼智)의 후손으로 나중에 김씨로서 최초로 왕위에 오르는 미추이사금(味鄒尼師今)의 아버지이다. 아달라이사금 19년(172)에 파진찬에 올라 벌휴이사금 2년(185)에는 좌군주(左軍主)로서 의성의 소문국(召文國)을 정벌하였고, 같은 왕 5년(188)과 6년에는 백제와의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다. 하지만 다음해(170년) 와산(蛙山)에서 벌어진 백제와의 전투에서 패함으로써 부곡성주(缶谷城主)로 좌천되었다. 이후의 활동은 드러나지 않는다. 미추왕이 즉위 2년(263)에 죽은 아버지 구도를 갈문왕(葛文王)으로 추봉하였다.닫기가 굳센 기병 5백 명을 거느리고 그들을 공격하니 백제 군사가 거짓으로 달아났다. 구도(仇道)가 쫓아가 와산(蛙山)061 《삼국사기》 권1, 신라본기1, 탈해이사금 8년(64), 10년, 19년(75), 20년조에 백제와의 교전지 와산성(蛙山城)이 나온다. 문맥상 같은 곳으로 생각되며, 구양성과도 가까운 곳이었을 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16, 보은현(報恩縣) 산천조에 ‘와산(蛙山)’이 나와 지금의 충북 보은군 보은읍으로 비정된다.닫기에 이르렀다가 백제에 패하였다. 2 《삼국사기》 권23 백제본기 초고왕 25년 8월조에 동일한 사실이 수록되어 있다.닫기왕은 구도(仇道)가 실책했다고 해서 부곡성주(缶谷城主)로 좌천시키고 설지(薛支)를 좌군주(左軍主)로 삼았다.
9년(192) 봄 정월에 국량(國良)을 아찬(阿湌)065 신라 경위(京位) 17관등 중 6위이다. 《삼국사기》 권38, 잡지7, 직관(職官) 상에 따르면, 아척간(阿尺干), 아찬(阿粲)이라고 했으며, 중아찬(重阿湌)~4중아찬(四重阿湌)까지 있었다.닫기으로 삼고 술명(述明)을 일길찬(一吉湌)066 신라 경위(京位) 17관등 중 7위이다. 《삼국사기》 권38, 잡지7, 직관(職官) 상에 따르면, 을길간(乙吉干)이라고도 했다.닫기으로 삼았다.
3월067 中宗壬申刊本에는 결각되어 있고, 顯宗 주자본과 현행 모든 역주본 《삼국사기》에는 모두 ‘四月’이라 하였다. 그러나 《삼국사기》의 서술원칙에 의하면 봄, 여름, 가을, 겨울은 初出時에만 표시하고 같은 계절을 거듭 나타내지 않았다. 그런데 이 부분이 만약 ‘四月’ 이라면 앞에 ‘여름[夏]’으로 표기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음의 5월에 ‘夏五月’이라 하여 비로소 ‘여름’을 명기하고 있다. 이 점으로 보아 이곳은 4월일 수 없다. 더욱이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 (권3)에 ‘三月’로 되어 있으므로 ‘3월’로 勘校, 飜譯하였다.닫기에 서울(경도, 京都)에 눈이 내려 3척(尺)이나 쌓였다.
여름 5월에 물난리가 크게 나 산 10여 곳이 무너졌다.
10년(193) 봄 정월 초하루 갑인(甲寅)에 일식이 있었다.
3월에 한기부(漢祇部)069 《삼국사기》 권1, 신라본기1, 유리이사금(儒理尼師今) 9년(32)에 따르면, 이해에 6부(部)의 이름을 바꾸고 각각 성을 내려주었다. 한기부는 가리부(加利部)에서 개칭된 이름이며, 성은 배씨(裵氏)가 하사되었다. 한기부는 신라 6부 중 하나로 기록에 따라 ‘한기부(漢歧部)’ ‘한지부(漢只部)’로 표기되기도 한다.닫기의 여자가 한 번에 4남 1녀를 낳았다.
6월에 왜인(倭人)070 신라본기에 나오는 왜인(倭人) 및 왜군(倭軍)의 실체에 대해서 일률적으로 말하기는 어렵겠지만, 왜인의 침략은 주로 식량과 사람의 약탈을 위해 게릴라식의 전술을 구사한 해적 행위였다(旗田巍, 《三國史記 新羅本紀にあらわれた‘倭’》, 《日本文化と朝鮮》 2, 朝鮮文化社 編, 1975 | 김기섭 역,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보이는 ‘왜’」, 《고대 한일관계사의 이해-왜-》, 이론과 실천, 1994, 109~118쪽 | 이종욱, 「광개토왕릉비와 《삼국사기》에 보이는 ‘왜병’의 정체」, 《한국사 시민강좌》 11, 일조각, 1992, 44~66쪽). 왜(倭)의 실체에 대한 자세한 분석은 연민수, 「5세기 이전의 신라의 대외관계」, 《고대한일관계사》, 혜안, 1998, 340~370쪽 참조.닫기이 크게 굶주려 먹을 것을 구하러 온 사람이 1천여 명이나 되었다.
11년(194) 여름 6월 그믐 을사(乙巳)에 일식이 있었다.
13년(196) 봄 2월에 궁실(宮室)을 중수하였다.
3월에 가물었다.
여름 4월에 궁 남쪽의 큰 나무에 벼락이 쳤다. 또 금성(金城)072 신라 시조 혁거세 때 쌓은 궁성(宮城)이다. 신라 상고기(上古期)에 월성(月城)과 함께 왕성으로 사용되다가 중고기 이후에 월성에 그 지위를 넘겨 주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1, 경주부, 고적에는 부의 동쪽 4리에 있는 토성(土城)으로 둘레가 2,407척이라고 되어 있다. 금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월성의 서북쪽 내지 알천[북천] 부근으로 보는 견해와(강종원, 「신라 왕경의 형성과정」, 《백제연구》 23, 1992, 220쪽 | 전덕재, 「이사금시기 신라의 성장과 6부」, 《신라문화》 21, 동국대 신라문화연구소, 2003, 176~178쪽), 박씨 세력의 활동 무대인 나정·알영정 근처, 즉 경주평야 남쪽 지금의 교동 일대로 비정한 연구가 있다(이종욱, 《신라상대왕위계승연구》, 영남대학교 출판부, 1980, 58~59쪽). 금성의 위치에 대한 연구사 검토는 전덕재, 《신라 왕경의 역사》, 새문사, 2009, 170~174쪽에 자세하며, 황보은숙, 「금성의 위치 비정」, 《신라문화》 34, 2009에서도 이를 종합적으로 다루고 있다.닫기 동문에도 벼락이 쳤다. 왕이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