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권(券第二) 신라본기(新羅本紀) 조분(助賁) 이사금(尼師今)
조분(助賁) 이사금(尼師今)
조분이사금(助賁尼師今)127 신라 제11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230~247년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권2, 신라본기2 조분이사금(助賁尼師今)조에 김천의 감문국(甘文國)과 영천의 골벌국(骨伐國)을 복속하는 등 경상도 일대의 소국(小國) 병합에 박차를 가했다.닫기이 왕위에 올랐다. 또는 제귀(諸貴)128 《삼국유사》 王曆篇에는 ‘諸賁’이라 하였으나, ‘貴’와 ‘賁’은 자형상 유사한 점에서 ‘諸貴’는 ‘諸賁’의 誤記 혹은 誤刻으로 보인다.닫기라고도 하였다. 성은 석씨(昔氏)이고 벌휴이사금(伐休尼師今)129 신라 제9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184~196년이다. 아달라이사금으로 ‘박씨왕 시대’가 끝나고 벌휴이사금이 즉위함으로써 제4대 탈해이사금(脫解尼師今) 이후 끊겼던 ‘석씨왕 시대’가 시작되었다. 이 왕대에 처음으로 군주(軍主)가 생겼고, 소문국을 복속하는 등 경상도 일대로의 영역 확장 사업을 본격화하였다.닫기의 손자이다. 아버지는 골정(骨正),130 제9대 왕이었던 벌휴이사금의 아들이자 제11대와 12대 왕으로 즉위하는 조분이사금과 첨해이사금의 아버지이다. 홀쟁(忽爭)이라고도 했는데, 첨해이사금이 즉위한 원년(247)에 죽은 아버지 골정을 세신갈문왕(世神葛文王)으로 추봉하였다.닫기 홀쟁(忽爭)으로도 썼다. 갈문왕(葛文王)131 갈문왕은 왕위계승권이 없는 준왕(準王)과 같은 존재로서 왕과의 일정한 관계를 기준으로 하여 책봉되었다. 곧 신라의 지배층인 왕족과 왕비족을 중신으로 한 사회적·정치적 관계를 표현해주는 것으로 시대에 따라 그 경향성도 변화하였다. 신라 초기 박씨왕 시대에는 왕비의 아버지가 주로 갈문왕에 책봉되었고, 눌지왕 이후 마립간 시기에는 왕의 동생이 갈문왕에 책봉되었다. 그러다가 태종무열왕 이후에는 죽은 아버지에 대한 추봉적(追封的) 의미의 갈문왕제만이 유지되었다(이기백, 「신라시대의 갈문왕」, 《신라정치사회사연구》, 일조각, 1974). 이외에 송은정, 「신라 상대 갈문왕의 성격과 변화」, 《숙명 한국사론》 2, 1996에서도 갈문왕에 대한 종합적인 분석을 시도하였다.닫기이다. 어머니는 김씨(金氏) 옥모부인(玉帽夫人)132 구도갈문왕의 딸로 骨正의 부인이다.닫기으로 구도갈문왕(仇道葛文王)의 딸이다. 왕비는 아이혜부인(阿爾兮夫人)133 《삼국사기》에서 아이혜부인을 나해왕의 딸이라 하였으므로, 아이혜부인은 조분왕의 姪女에 해당한다.닫기으로 나해왕(奈解王)134 신라 제10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196~230년이다. 나해이사금대에 가야와의 대외관계 기록이 빈번하게 나오는 것이 특징적이다.닫기의 딸이다. 이전 왕이 장차 죽을 즈음에 유언으로 사위 조분(助賁)에게 왕위를 잇도록 하였다. 왕은 키가 크고 풍채가 뛰어났으며 일을 함에 있어 명철하고 과단성 있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두려워하면서도 존경하였다.
원년(230)에 연충(連忠)을 이찬(伊湌)136 신라 경위(京位) 17관등 중 2위이다. 《삼국사기》 권38, 잡지7, 직관(職官) 상에 따르면, 이척찬(伊尺湌)이라고도 했다.닫기으로 삼아 군무와 국정을 맡겼다.
가을 7월에 시조묘(始祖廟)137 《삼국사기》 권32, 잡지1, 제사(祭祀)아로(阿老)최광식, 《고대한국의 국가와 제사》, 한길사, 1994닫기에 배알하였다.
2년(231) 가을 7월에 이찬(伊湌) 138 신라 경위(京位) 17관등 중 2위이다. 《삼국사기》 권38, 잡지7, 직관(職官) 상에 따르면, 이척찬(伊尺湌)이라고도 했다.닫기우로(于老)139 나해이사금의 둘째 아들이자 제16대 왕 흘해이사금의 아버지이다. 나해이사금대 태자로서 이음(利音)과 포상 8국을 물리치는 공을 세운 이후 조분이사금 2년(231)에 대장군(大將軍)으로서 김천의 감문국(甘文國)을 토벌했고, 같은 왕 4년(233)에는 사도(沙道)에서 왜인(倭人)을 물리쳤다. 이러한 군공을 바탕으로 조분이사금 15년(244)에는 서불한까지 올라갔다. 그러나 조분이사금 16년(245) 고구려와의 전투에서 패한 이후 첨해이사금 3년(249)에 왜국의 사신을 접대하다가 갑작스럽게 왜군에게 살해당했다. 《삼국사기》 권45에 그의 열전(列傳)이 전한다.닫기를 대장군(大將軍)으로 삼아 감문국(甘文國)140 《삼국사기》 권34, 지리1, 상주(尙州)에 따르면, 감문국은 개령군(開寧郡)에 있던 소국이었다. 감문국은 지금의 김천시 개령면 일대로 추정되고 있다(이형우, 《신라초기국가성장사연구》, 영남대학교출판부, 2000, 153~154쪽).닫기을 토벌해 깨뜨리고 그 땅을 군(郡)으로 삼았다.
3년(232) 여름 4월에 왜인(倭人)141 신라본기에 나오는 왜인(倭人) 및 왜군(倭軍)의 실체에 대해서 일률적으로 말하기는 어렵겠지만, 왜인의 침략은 주로 식량과 사람의 약탈을 위해 게릴라식의 전술을 구사한 해적 행위였다(旗田巍, 《三國史記 新羅本紀にあらわれた‘倭’》, 《日本文化と朝鮮》 2, 朝鮮文化社 編, 1975 | 김기섭 역,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보이는 ‘왜’」, 《고대 한일관계사의 이해-왜-》, 이론과 실천, 1994, 109~118쪽 | 이종욱, 「광개토왕릉비와 《삼국사기》에 보이는 ‘왜병’의 정체」, 《한국사 시민강좌》 11, 일조각, 1992연민수, 「5세기 이전의 신라의 대외관계」, 《고대한일관계사》, 혜안, 1998닫기이 갑자기 와서 금성(金城)142 신라 시조 혁거세 때 쌓은 궁성(宮城)이다. 신라 상고기(上古期)에 월성(月城)과 함께 왕성으로 사용되다가 중고기 이후에 월성에 그 지위를 넘겨 주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1, 경주부, 고적강종원, 「신라 왕경의 형성과정」, 《백제연구》 23, 1992, 220쪽 | 전덕재, 「이사금시기 신라의 성장과 6부」, 《신라문화》 21, 동국대 신라문화연구소, 2003, 176~178쪽), 박씨 세력의 활동 무대인 나정·알영정 근처, 즉 경주평야 남쪽 지금의 교동 일대로 비정한 연구가 있다(이종욱, 《신라상대왕위계승연구》, 영남대학교 출판부, 1980전덕재, 《신라 왕경의 역사》, 새문사, 2009, 170~174쪽에 자세하며, 황보은숙, 「금성의 위치 비정」, 《신라문화》 34, 2009닫기을 포위하였다. 왕이 몸소 나가 싸워 적이 흩어져 도망가니 날쌘 기병을 보내어 추격하게 해서 1천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4년(233) 여름 4월에 큰 바람이 불어 지붕의 기와가 날아갔다.
5월에 왜병(倭兵)이 동쪽 변경(邉)을 노략질하였다.
가을 7월에 이찬(伊湌) 143 신라 경위(京位) 17관등 중 2위이다. 《삼국사기》 권38, 잡지7, 직관(職官) 상닫기우로(于老)144 나해이사금의 둘째 아들이자 제16대 왕 흘해이사금의 아버지이다. 나해이사금대 태자로서 이음(利音)과 포상 8국을 물리치는 공을 세운 이후 조분이사금 2년(231)에 대장군(大將軍)으로서 김천의 감문국(甘文國)을 토벌했고, 같은 왕 4년(233)에는 사도(沙道)에서 왜인(倭人)을 물리쳤다. 이러한 군공을 바탕으로 조분이사금 15년(244)에는 서불한까지 올라갔다. 그러나 조분이사금 16년(245) 고구려와의 전투에서 패한 이후 첨해이사금 3년(249)에 왜국의 사신을 접대하다가 갑작스럽게 왜군에게 살해당했다. 《삼국사기》 권45닫기가 왜인(倭人)145 신라본기에 나오는 왜인(倭人) 및 왜군(倭軍)의 실체에 대해서 일률적으로 말하기는 어렵겠지만, 왜인의 침략은 주로 식량과 사람의 약탈을 위해 게릴라식의 전술을 구사한 해적 행위였다(旗田巍, 《三國史記 新羅本紀にあらわれた‘倭’》, 《日本文化と朝鮮》 2, 朝鮮文化社 編, 1975 | 김기섭 역,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보이는 ‘왜’」, 《고대 한일관계사의 이해-왜-》, 이론과 실천, 1994, 109~118쪽 | 이종욱, 「광개토왕릉비와 《삼국사기》에 보이는 ‘왜병’의 정체」, 《한국사 시민강좌》 11, 일조각, 1992연민수, 「5세기 이전의 신라의 대외관계」, 《고대한일관계사》, 혜안, 1998닫기과 더불어 사도(沙道)에서 싸웠는데, 바람을 이용해 불을 놓아 배를 불태워서 적이 물 속에 뛰어들어 모두 죽었다.
6년(235) 봄 정월에 동쪽으로 순행(巡幸)하여 위로하고 진휼(撫恤, 무휼)하였다.
7년(236) 봄 2월에 골벌국왕(骨伐國王) 146 《삼국사기》 권34, 지리1, 양주(良州)에 따르면, 골화소국(骨火小國)은 임고군(臨皐郡) 임천현(臨川縣)에 있었다. 지금의 경북 영천 일대로 비정된다.닫기아음부(阿音夫)가 무리를 이끌고 항복해 오니, 집과 토지를 주어 안치하고 그 땅을 군(郡)으로 삼았다.
8년(237) 가을 8월에 누리(蝗)가 곡식을 해쳤다.
11년(240) 백제가 서쪽 변방(邉)을 침범하였다.
13년(242) 가을에 크게 풍년이 들었다. 고타군(古陀郡)148 고타군은 지금의 경북 안동시 일대이다. 고타야군(古陁耶郡)이라도 했는데, 경덕왕 때 고창군(古昌郡)으로 이름을 바꾸었다(《삼국사기》 권34, 지리1, 상주 고창군). 고대 안동에 대해서는 한국국학진흥원 편, 《고대 안동의 역사와 문화》, 안동시, 2009에 종합적으로 정리 되어 있다.닫기에서 상서로운 벼이삭(가화, 嘉禾)149 가화(嘉禾)는 왕자(王者)의 덕이 성할 때 생겨나는 것으로 한 줄기의 벼에서 두 개 이상의 이삭이 피어나는 현상을 말한다. 때문에 가화는 고대로부터 서상(瑞祥)의 대상으로 여겨졌다(이희덕, 《한국고대 자연관과 왕도정치》, 혜안, 1999, 211~212쪽).닫기을 바쳤다.
15년(244) 봄 정월에 이찬(伊湌) 150 신라 경위(京位) 17관등 중 2위이다. 《삼국사기》 권38, 잡지7, 직관(職官) 상에 따르면, 이척찬(伊尺湌)이라고도 했다.닫기우로(于老)151 나해이사금의 둘째 아들이자 제16대 왕 흘해이사금의 아버지이다. 나해이사금대 태자로서 이음(利音)과 포상 8국을 물리치는 공을 세운 이후 조분이사금 2년(231)에 대장군(大將軍)으로서 김천의 감문국(甘文國)을 토벌했고, 같은 왕 4년(233)에는 사도(沙道)에서 왜인(倭人)을 물리쳤다. 이러한 군공을 바탕으로 조분이사금 15년(244)에는 서불한까지 올라갔다. 그러나 조분이사금 16년(245) 고구려와의 전투에서 패한 이후 첨해이사금 3년(249)에 왜국의 사신을 접대하다가 갑작스럽게 왜군에게 살해당했다. 《삼국사기》 권45에 그의 열전(列傳)이 전한다.닫기를 서불한(舒弗邯)152 신라 경위(京位) 17관등 중 1위인 이벌찬(伊伐湌)의 별칭이다. 《삼국사기》 권38, 잡지7, 직관(職官) 상닫기으로 삼아 군사에 관한 일을 겸하여 맡게 하였다.
16년(245) 겨울 10월에 고구려가 북쪽 변경(邉)을 침범하였다. 153 《삼국사기》 권17 고구려본기 동천왕 19년(245) 10월조에 동일한 사실이 실려 있다.닫기우로(于老)154 나해이사금의 둘째 아들이자 제16대 왕 흘해이사금의 아버지이다. 나해이사금대 태자로서 이음(利音)과 포상 8국을 물리치는 공을 세운 이후 조분이사금 2년(231)에 대장군(大將軍)으로서 김천의 감문국(甘文國)을 토벌했고, 같은 왕 4년(233)에는 사도(沙道)에서 왜인(倭人)을 물리쳤다. 이러한 군공을 바탕으로 조분이사금 15년(244)에는 서불한까지 올라갔다. 그러나 조분이사금 16년(245) 고구려와의 전투에서 패한 이후 첨해이사금 3년(249)에 왜국의 사신을 접대하다가 갑작스럽게 왜군에게 살해당했다. 《삼국사기》 권45에 그의 열전(列傳)이 전한다.닫기가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고 물러나 마두책(馬頭柵)을 지켰다. 그날 밤이 몹시 추웠는데, 우로(于老)154 나해이사금의 둘째 아들이자 제16대 왕 흘해이사금의 아버지이다. 나해이사금대 태자로서 이음(利音)과 포상 8국을 물리치는 공을 세운 이후 조분이사금 2년(231)에 대장군(大將軍)으로서 김천의 감문국(甘文國)을 토벌했고, 같은 왕 4년(233)에는 사도(沙道)에서 왜인(倭人)을 물리쳤다. 이러한 군공을 바탕으로 조분이사금 15년(244)에는 서불한까지 올라갔다. 그러나 조분이사금 16년(245) 고구려와의 전투에서 패한 이후 첨해이사금 3년(249)에 왜국의 사신을 접대하다가 갑작스럽게 왜군에게 살해당했다. 《삼국사기》 권45에 그의 열전(列傳)이 전한다.닫기가 사졸들을 위로하고 몸소 장작을 피워 그들을 따뜻하게 해주니 모두 마음으로 감격하였다.
17년(246) 겨울 10월에 동남쪽에 흰 기운이 있었는데, 마치 한 필의 명주와 같았다.
11월에 서울(경도, 京都)에 지진(地震)이 일어났다.
18년(247) 여름 5월에 왕이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