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권(券第二) 신라본기(新羅本紀) 유례(儒禮) 이사금(尼師今)
유례(儒禮) 이사금(尼師今)
유례이사금(儒禮尼師今)229 신라 제14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284~298년이다. 《삼국유사》 권1, 왕력에는 세리지왕(世里智王)이라고도 하였다. 미추이사금이 김씨로서 왕위를 차지하였지만 유례이사금~흘해이사금대까지 석씨(昔氏)가 왕위를 다시 차지하였다.닫기이 왕위에 올랐다. 고기(古記)230 고기는 내용적으로는 삼국에 관한 미흡한 사서이면서, 중국에 대한 고려 국내의 고유 자료를 가리키는데, 다만 단일한 특정서를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삼국사기》에 인용된 고기에 대한 종합적인 분석은 이강래, 「삼국사기와 고기」, 《삼국사기 전거론》, 민족사, 1996이 참고가 된다.닫기에는 제3대와 제14대 두 왕의 이름을 같이 유리(儒理) 또는 유례(儒禮)라고 하였으니231 儒理와 儒禮를 혼동하여 서술한 것으로는 《삼국유사》 권1 紀異篇 미추왕 죽엽군조에서 제14대 왕 儒禮를 儒理라 하였고, 《삼국유사》 권1 王曆篇에서는 제3대 왕 儒理를 弩禮 혹은 儒禮라 한 것이 대표적이다.닫기 어느 것이 옳은 지 알 수 없다. 조분왕(助賁王)의 맏아들이다. 어머니는 박씨(朴氏)로 갈문왕(葛文王) 232 갈문왕은 왕위계승권이 없는 준왕(準王)과 같은 존재로서 왕과의 일정한 관계를 기준으로 하여 책봉되었다. 곧 신라의 지배층인 왕족과 왕비족을 중신으로 한 사회적·정치적 관계를 표현해주는 것으로 시대에 따라 그 경향성도 변화하였다. 신라 초기 박씨왕 시대에는 왕비의 아버지가 주로 갈문왕에 책봉되었고, 눌지왕 이후 마립간 시기에는 왕의 동생이 갈문왕에 책봉되었다. 그러다가 태종무열왕 이후에는 죽은 아버지에 대한 추봉적(追封的) 의미의 갈문왕제만이 유지되었다(이기백, 「신라시대의 갈문왕」, 《신라정치사회사연구》, 일조각, 1974). 이외에 송은정, 「신라 상대 갈문왕의 성격과 변화」, 《숙명 한국사론》 2, 1996에서도 갈문왕에 대한 종합적인 분석을 시도하였다.닫기나음(奈音)의 딸로, 33 《삼국유사》 권1, 왕력에는 유례이사금의 어머니를 박씨 □소부인(召夫人)이라고 하였다. 성씨가 같으므로 양자를 종합해보면 유례이사금의 어머니는 박씨로서 갈문왕 나음의 딸인 □소부인으로 이해해도 무리가 없겠다. 그런데 《삼국사기》 조분이사금 즉위년조에는 왕비로서 나해왕(奈解王)의 딸인 아이혜부인(阿爾兮夫人)을 기록하였다. 그렇다면 조분이사금은 부인이 두 명 있었던 셈이 된다.(□는 결락자이다.)닫기일찍이 밤에 다니다가 별빛이 입에 들어와 그로 인해 임신하게 되었다. 태어난 날 저녁에 이상한 향기가 방에 가득하였다.
2년(285) 봄 정월에 시조묘(始祖廟)234 《삼국사기》 권32, 잡지1, 제사(祭祀)최광식, 《고대한국의 국가와 제사》, 한길사, 1994닫기에 배알하였다.
2월에 이찬(伊湌) 235 신라 경위(京位) 17관등 중 2위이다. 《삼국사기》 권38, 잡지7, 직관(職官) 상에 따르면, 이척찬(伊尺湌)이라고도 했다.닫기홍권(弘權)236 미추이사금 20년(281)에 이찬으로 등용된 후 유례이사금 2년(285)에는 서불한에 올라 정치의 중요한 일을 관장하였다. 같은 왕 12년(295)에 유례이사금이 백제와 힘을 합쳐 왜(倭)를 정벌하려 하자 왕에게 간하여 이를 중단시켰다.닫기을 서불한(舒弗邯)237 신라 경위(京位) 17관등 중 1위인 이벌찬(伊伐湌)의 별칭이다. 《삼국사기》 권38, 잡지7, 직관(職官) 상을 살펴보면 이외에 이벌간(伊罰干), 우벌찬(于伐湌), 각간(角干), 각찬(角餐), 서발한(舒發翰)으로 불리었다.닫기으로 삼아 기밀한 정무를 맡겼다.
3년(286) 봄 정월에 백제가 사신을 보내 화친을 청하였다.
3월에 가물었다.
4년(287) 여름 4월에 왜인(倭人)239 신라본기에 나오는 왜인(倭人) 및 왜군(倭軍)의 실체에 대해서 일률적으로 말하기는 어렵겠지만, 왜인의 침략은 주로 식량과 사람의 약탈을 위해 게릴라식의 전술을 구사한 해적 행위였다(旗田巍, 《三國史記 新羅本紀にあらわれた‘倭’》, 《日本文化と朝鮮》 2, 朝鮮文化社 編, 1975 | 김기섭 역,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보이는 ‘왜’」, 《고대 한일관계사의 이해-왜-》, 이론과 실천, 1994, 109~118쪽 | 이종욱, 「광개토왕릉비와 《삼국사기》에 보이는 ‘왜병’의 정체」, 《한국사 시민강좌》 11, 일조각, 1992, 44~66쪽). 왜(倭)의 실체에 대한 자세한 분석은 연민수, 「5세기 이전의 신라의 대외관계」, 《고대한일관계사》, 혜안, 1998, 340~370쪽 참조.닫기이 일례부(一禮部)240 현재의 위치는 알 수 없으나, 혹시 ‘部’는 ‘郡’의 誤記가 아닐까 생각된다. 그렇다면 현재의 경북 고령군 星山面 지역이 一利郡이었으므로 一禮郡과 同一地名으로 볼 수 있다.닫기를 습격하여 불을 놓아 태우고 1천 명을 사로잡아 갔다.
6년(289) 여름 5월에 왜병(倭兵)이 이르렀다는 이야기를 듣고 배와 노를 수리하고 갑옷과 무기를 손질하였다.
7년(290) 여름 5월에 큰 물난리가 나서 월성(月城)241 신라 왕성(王城)으로서 성의 형태가 초생달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삼국사기》 권34, 잡지3, 지리1에 “혁거세 21년(서기전 37)에 궁성을 쌓아 금성(金城)이라고 했고, 파사왕 22년(101)에 금성의 동남쪽에 성을 쌓고 월성(月城) 혹은 재성(在城)이라고 했는데 둘레가 1,023보(步)였다. 신월성(新月城) 북쪽에 만월성(滿月城)이 있으니 둘레가 1,838보였고, 신월성 동쪽에 명활성(明活城)이 있으니 둘레가 1,906보였으며, 또한 신월성 남쪽에 남산성(南山城)이 있으니 둘레가 2,804보였다. 시조 이래로 금성에 거처하다가, 후세에 이르러 두 월성에 많이 거처하였다”고 되어 있다. 월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현재 경주시 인왕동이라는 것에 대해 이견이 없다. 다만 파사왕대 건조된 월성은 경주시 북천(北川) 남안(南岸)의 성동동에 있었고, 인왕동의 반월성은 문무왕이 왕궁을 짓게 됨에 따라 탈해왕릉이 문무왕 20년(680)에 이장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남천우, 「인왕동 왕궁의 건조시기에 대하여」, 《역사학보》 123, 1989 | 《유물의 재발견》, 학고재, 1997, 72~75쪽). 월성에 대한 종합적인 이해는 김낙중, 「신라 월성의 성격과 변천」, 《한국상고사학보》 27, 1998 참조.닫기이 무너졌다.
8년(291) 봄 정월에 말구(末仇)242 말구는 미추이사금과는 형제이자 나중에 김씨 세습 왕실을 여는 나물왕(奈勿王)의 아버지이다. 석씨 유례이사금대에 김씨로서 이벌찬에 등용되었다는 사실은 이 시기 김씨 세력의 위상이 상당하였음을 시사한다.닫기를 이벌찬(伊伐湌)43 신라 경위(京位) 17관등 중 1위이다. 《삼국사기》 권38, 잡지7, 직관(職官) 상에 따르면, 이벌간(伊罰干), 우벌찬(于伐湌), 각간(角干), 각찬(角粲), 서발한(舒發翰), 서불한(舒弗邯)이라고도 했다.닫기으로 삼았다. 말구(末仇)244 仇道의 아들로 미추왕과는 형제지간이다. 또한 나물왕의 아버지로 처는 休禮夫人이다.닫기는 충성스럽고 곧으며 지략이 있어 왕이 항상 찾아가 정치의 중요한 점을 물어보았다.
9년(292) 여름 6월에 왜병(倭兵)이 사도성(沙道城)245 《삼국사기》 권2, 신라본기2, 유례이사금 9년(292)조에 따르면, 왜(倭)의 군사가 사도성(沙道城)에 쳐들어왔고, 다음해 사도성을 고쳐 쌓았다고 한다. 따라서 사도성의 위치는 왜군의 주요 침입 루트였던 경주 동쪽 일대였을 가능성이 크다. 이와 관련해서 사도성의 위치를 경북 영덕으로 본 견해가 있다(이병도, 《삼국사기》 상, 을유문화사, 1983, 46쪽).닫기을 공격해 함락하자 일길찬(一吉湌) 246 신라 경위(京位) 17관등 중 7위이다. 《삼국사기》 권38, 잡지7, 직관(職官) 상에 따르면, 을길간(乙吉干)이라고도 했다.닫기대곡(大谷)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구해주고 지키게 하였다.
가을 7월에 가물었고 누리(蝗)의 피해가 있었다.
10년(293) 봄 2월에 사도성(沙道城)247 《삼국사기》 권2, 신라본기2, 유례이사금 9년(292)조에 따르면, 왜(倭)의 군사가 사도성(沙道城)에 쳐들어왔고, 다음해 사도성을 고쳐 쌓았다고 한다. 따라서 사도성의 위치는 왜군의 주요 침입 루트였던 경주 동쪽 일대였을 가능성이 크다. 이와 관련해서 사도성의 위치를 경북 영덕으로 본 견해가 있다(이병도, 《삼국사기》 상, 을유문화사, 1983, 46쪽).닫기을 고쳐 쌓고 사벌주(沙伐州)248 《삼국사기》 권34, 지리1 상주(尙州)에 따르면, 첨해왕 때에 사벌국(沙伐國)을 빼앗아 주(州)로 삼았다고 되어 있다. 때문에 사벌국을 지금의 경북 상주로 비정하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닫기의 호민(豪民) 80여 가를 이주시켰다.
11년(294) 여름에 왜병(倭兵)이 장봉성(長峯城)249 《삼국사기》 권37 잡지 지리 4 三國有名未詳地分에 수록된 지명으로, 현재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그런데 長峯城 혹은 長峯鎭 관련 기사는 모두 왜인과의 전투와 관련되어 있는 점으로 보아, 이곳은 왜의 신라침입로 중간에 있던 지역이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닫기을 공격해 왔지만 이기지 못하였다.
가을 7월에 다사군(多沙郡)250 《신증동국여지승람》 권31, 하동현(河東縣) 건치연혁에 따르면, 신라시대의 다사군이 경덕왕대에 하동군(河東郡)으로 개칭된 것을 알 수 있다. 지금의 경남 하동군으로 비정된다.닫기에서 상서로운 벼이삭(가화, 嘉禾)251 가화(嘉禾)는 왕자(王者)의 덕이 성할 때 생겨나는 것으로 한 줄기의 벼에서 두 개 이상의 이삭이 피어나는 현상을 말한다. 때문에 가화는 고대로부터 서상(瑞祥)의 대상으로 여겨졌다(이희덕, 《한국고대 자연관과 왕도정치》, 혜안, 1999, 211~212쪽).닫기을 바쳤다.
12년(295) 봄에 왕이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15년(298) 봄 2월에 서울(경도, 京都)에 짙은 안개가 껴 사람을 분별할 수가 없었는데 5일 만에 걷혔다.
겨울 12월에 왕이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