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권(券第二) 신라본기(新羅本紀) 첨해(沾解) 이사금(尼師今)
첨해(沾解) 이사금(尼師今)
첨해이사금(沾解尼師今)157 신라 제12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247~261년이다. 《삼국유사》 권1, 왕력(王曆)에는 이해이질금(理解尼叱今)으로 기록되어 있고, 일명 점해왕(詀解王)으로 불렸다고 한다. 《삼국사기》 권2 신라본기 첨해이사금(沾解尼師今)조에 처음으로 고구려와 화친 관계를 맺었고, 골정계와 이매계로 분기되었던 석씨 왕실의 정치적 갈등이 종식되고 김씨로서 미추왕이 즉위할 수 있는 단초가 마련되었다.닫기이 왕위에 올랐다. 조분왕(助賁王)의 친동생이다.
원년(247) 가을 7월에 시조묘(始祖廟)158 《삼국사기》 권32, 잡지1, 제사(祭祀)를 참고하면, 시조묘는 박혁거세의 사당으로 1년에 4차례 제사지냈다. 남해왕 3년(6)에 처음 세웠는데, 그는 친누이 아로(阿老)로 하여금 시조묘 제사를 주관하게 하였다. 이후의 왕은 일반적으로 즉위 의례의 차원에서 시조묘에 몸소 제사를 지냈다. 시조묘에 제사를 지내 하늘의 자손이라는 의식을 강조함으로써 왕권을 강화할 수 있었다(최광식, 《고대한국의 국가와 제사》, 한길사, 1994, 165~174쪽). 시조묘는 ‘조묘(祖廟)’ ‘국조묘(國祖廟)’ ‘선조묘(先祖廟)’ ‘조고묘(祖考廟)’ 등으로도 표기되었다.닫기에 배알하고 아버지 골정(骨正)159 제9대 왕이었던 벌휴이사금의 아들이자 제11대와 12대 왕으로 즉위하는 조분이사금과 첨해이사금의 아버지이다. 홀쟁(忽爭)이라고도 했는데, 첨해이사금이 즉위한 원년(247)에 죽은 아버지 골정을 세신갈문왕(世神葛文王)으로 추봉하였다.닫기을 세신갈문왕(世神葛文王)으로 봉하였다.
논하여 말한다.
한(漢) 선제(宣帝)160 중국 한나라의 제8대 왕으로 이름은 유순(劉詢)이다. 재위 기간은 서기전 74~49년이다.닫기가 즉위하니 담당 관리가 아뢰었다.
2월에 사신을 고구려에 보내 화친을 맺었다.
3년(249)8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 (권3)에 《春正月 遣于老將兵討沙梁伐國(一云沙伐)滅之 沙梁伐舊屈新羅 今貳於百濟也》 이라 하여 《삼국사기》에 없는 기사가 실려 있다. 그리고 《삼국사기》 권45 열전 昔于老傳에도 첨해왕대에 우로가 사량벌국을 토벌하였다는 기사가 실려 있다.닫기 여름 4월에 왜인(倭人)169 신라본기에 나오는 왜인(倭人) 및 왜군(倭軍)의 실체에 대해서 일률적으로 말하기는 어렵겠지만, 왜인의 침략은 주로 식량과 사람의 약탈을 위해 게릴라식의 전술을 구사한 해적 행위였다(旗田巍, 《三國史記 新羅本紀にあらわれた‘倭’》, 《日本文化と朝鮮》 2, 朝鮮文化社 編, 1975 | 김기섭 역,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보이는 ‘왜’」, 《고대 한일관계사의 이해-왜-》, 이론과 실천, 1994, 109~118쪽 | 이종욱, 「광개토왕릉비와 《삼국사기》에 보이는 ‘왜병’의 정체」, 《한국사 시민강좌》 11, 일조각, 1992, 44~66쪽). 왜(倭)의 실체에 대한 자세한 분석은 연민수, 「5세기 이전의 신라의 대외관계」, 《고대한일관계사》, 혜안, 1998, 340~370쪽 참조.닫기이 서불한(舒弗邯) 170 신라 경위(京位) 17관등 중 1위인 이벌찬(伊伐湌)의 별칭이다. 《삼국사기》 권38, 잡지7, 직관(職官) 상을 살펴보면 이외에 이벌간(伊罰干), 우벌찬(于伐湌), 각간(角干), 각찬(角餐), 서발한(舒發翰)으로 불리었다.닫기우로(于老)171 나해이사금의 둘째 아들이자 제16대 왕 흘해이사금의 아버지이다. 나해이사금대 태자로서 이음(利音)과 포상 8국을 물리치는 공을 세운 이후 조분이사금 2년(231)에 대장군(大將軍)으로서 김천의 감문국(甘文國)을 토벌했고, 같은 왕 4년(233)에는 사도(沙道)에서 왜인(倭人)을 물리쳤다. 이러한 군공을 바탕으로 조분이사금 15년(244)에는 서불한까지 올라갔다. 그러나 조분이사금 16년(245) 고구려와의 전투에서 패한 이후 첨해이사금 3년(249)에 왜국의 사신을 접대하다가 갑작스럽게 왜군에게 살해당했다. 《삼국사기》 권45에 그의 열전(列傳)이 전한다.닫기를 죽였다.
가을 7월에 궁의 남쪽에 남당(南堂)173 남당은 원시부족집회소의 후신으로, 회의 기관이자 실무를 집행하는 국가의 중심적인 정청이다(이병도, 「고대남당고」, 《한국고대사연구》, 박영사, 1976, 623~636쪽). 남당은 그 직속에 집행 기관을 가졌다기보다 그 결정이 왕을 통해 집행되었다(이기백, 「품주고」, 《신라정치사회사연구》, 일조각, 1974, 137쪽).닫기을 지었다. 남당은 혹 도당(都堂)이라고도 한다. 양부(良夫)174 양부는 첨해이사금 3년(249) 이찬으로 기용된 후, 미추이사금 2년(263)에는 서불한에 올라 중앙과 지방의 군사에 관한 일을 맡았다.닫기를 이찬(伊湌)175 신라 경위(京位) 17관등 중 2위이다. 《삼국사기》 권38, 잡지7, 직관(職官) 상에 따르면, 이척찬(伊尺湌)이라고도 했다.닫기으로 삼았다.
5년(251) 봄 정월에 처음으로 남당(南堂)176 남당은 원시부족집회소의 후신으로, 회의 기관이자 실무를 집행하는 국가의 중심적인 정청이다(이병도, 「고대남당고」, 《한국고대사연구》, 박영사, 1976, 623~636쪽). 남당은 그 직속에 집행 기관을 가졌다기보다 그 결정이 왕을 통해 집행되었다(이기백, 「품주고」, 《신라정치사회사연구》, 일조각, 1974, 137쪽).닫기에서 정무를 보았다. 한기부(漢祇部)7 《삼국사기》 권1, 신라본기1, 유리이사금(儒理尼師今) 9년(32)에 따르면, 이해에 6부(部)의 이름을 바꾸고 각각 성을 내려주었다. 한기부는 가리부(加利部)에서 개칭된 이름이며, 성은 배씨(裵氏)가 하사되었다. 한기부는 신라 6부 중 하나로 기록에 따라 ‘한기부(漢歧部)’ ‘한지부(漢只部)’로 표기되기도 한다.닫기 사람 부도(夫道)178 신라 왕경의 한기부 출신의 인물로, 物藏庫의 사무를 맡았다는 사실 외에는 알려진 바가 없다. 한편 南堂會議와 관련하여 부도를 신라 최초의 稟主로 보는 견해도 있다(井上秀雄, 《新羅の政治體制》, 《고대사강좌》 4, 1962).닫기가 집이 가난했지만 아첨하는 바가 없고 글씨와 계산을 잘해 당시에 이름이 알려져 있었다. 왕이 그를 불러 아찬(阿湌)179 신라 경위(京位) 17관등 중 6위이다. 《삼국사기》 권38, 잡지7, 직관(職官) 상에 따르면, 아척간(阿尺干), 아찬(阿粲)이라고 했으며, 중아찬(重阿湌)~4중아찬(四重阿湌)까지 있었다.닫기으로 삼고 물장고(物藏庫)180 일종의 왕실 직속 창고이다. 물장전(物藏典)이 진평왕대(579~632)에 설치한 왕실 기구인 내성(內省) 소속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국왕이 직접 적임자를 선정하여 관등을 내리고 책임자로 임명한 것도 물장고가 왕권의 경제기반과 직접 관련된 창고였음을 시사한다(김창석, 《삼국과 통일신라의 유통체계연구》, 일조각, 2004, 124쪽).닫기의 사무를 맡겼다.
9년(255) 가을 9월에 백제가 침입해 왔다. 일벌찬(一伐湌) 익종(翊宗)이 괴곡(槐谷)182 《신증동국여지승람》 권14, 괴산군(槐山郡) 건치연혁에 따르면, 이곳이 신라시대에 괴양군(槐壤郡)이었다고 한다. 때문에 괴곡과 괴양을 같은 지명으로 보아 괴곡을 지금의 충북 괴산군 괴산읍 일대로 비정하기도 하는 데(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69쪽), 확실하지는 않다.닫기의 서쪽에서 맞아 싸우다 적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겨울 10월에 백제가 봉산성(烽山城)183 나해이사금 29년(224), 첨해이사금 9년(255), 미추이사금 5년(266) 등 주로 백제와의 교전지로 자주 나오는 지명이다. 정확한 위치 비정은 어렵지만 사료 분위기상 신라 서변의 소백산맥 일대였음은 인정된다.닫기을 공격했으나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겨울 10월 그믐에 일식이 있었다.
14년(260) 여름에 큰 비가 내려 산 40여 곳이 무너졌다.
15년(261) 봄 2월에 달벌성(達伐城)187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6, 대구도호부(大丘都護府) 건치연혁에 따르면, 이곳이 신라시대의 달구화현(達句火縣)으로서 달불성(達弗城)으로도 불렸다고 한다. 또한 성곽조에는 부(府)의 서쪽 4리에 달성(達城)이 있다고 되어 있다. 달벌성을 달성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닫기을 쌓고 나마(奈麻) 극종(克宗)을 성주(城主)로 삼았다.
3월에 백제가 사신을 보내 화친을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겨울 12월 28일에 왕이 갑자기 병이 나서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