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는 이야기/삼국사기

제21권(卷第二十一) 고구려본기(髙句麗本紀) 보장왕(寶藏王) 상(上)

7390882@hanmail.net 2020. 2. 13. 11:42

제21권(卷第二十一)


고구려본기(髙句麗本紀) 제9(第九)

보장왕(寶藏王) 상(上)


보장왕(寶藏王) 1년~3년

보장왕(寶臧王)은 이름이 (臧)이고, 보장(寶臧)이라고도 한다. 나라를 잃은 까닭에 시호가 없다. 건무왕(建武王)의 동생 대양왕(大陽王)의 아들이다. 건무왕(建武王) 재위 25년에 개소문(蘇文)이 왕을 죽이고 (臧)을 세워 왕위를 계승하게 하였다.
신라가 백제를 정벌하려고 김춘추(金春秋)를 보내 군사를 요청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2년(643) 봄 정월에 아버지를 봉하여 왕으로 삼았다.
사신을 당(唐)에 들여보내 조공하였다.
3월에 연개소문(淵蓋蘇文)이 왕에게 아뢰어 말하기를 “삼교(三敎)는 비유하자면 솥의 발과 같아서 하나라도 없어서는 안됩니다. 지금 유교(儒敎)와 불교(釋敎)는 모두 흥하는데 도교(道敎)는 아직 성하지 않으니, 소위 천하의 도술(道術)을 갖추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엎드려 청하오니 (唐)에 사신을 보내 도교(道敎)를 구하여 와서 나라 사람들을 가르치게 하소서.” 하였다. 대왕이 그러하다고 여겨서 국서를 보내어 청하였다. 태종(太宗)이 도사(道士) 숙달(叔達) 등 여덟 명을 보내고 동시에 노자(老子)도덕경(道徳經)을 보내 주었다. 왕이 기뻐하고 절을 빼앗아 이들을 머물게 하였다.

윤 6월에 당() 태종(太宗)이 말하기를 “개소문(蓋蘇文)이 그 임금을 죽이고 국정(國政)을 제멋대로 하니 진실로 참을 수 없다. 지금의 병력으로도 이를 빼앗는 것은 어렵지 않다. 다만 백성을 괴롭히고 싶지 않아 내가 거란(契丹)말갈(靺鞨)로 하여금 그들을 치게하려는데, 어떠한가?” 하였다. 장손무기(長孫無忌)가 아뢰기를 “개소문(蓋蘇文)은 스스로 죄가 큰 것을 알고 대국의 토벌을 두려워하여 수비를 엄격하게 해놓았습니다. 폐하께서 아직 꾹 참고 계시면, 그는 스스로 안심하여 반드시 다시 교만하고 게을러져서 그 악을 더욱 멋대로 행할 것이니 그렇게 된 후에 토벌하여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라 하였다. 황제가 “좋다”고 하고, 사지절(使持節)을 보내 예절을 갖추어 책봉하였는데 그 조서에 말하기를 “먼 나라를 어루만지는 법은 전대 제왕의 아름다운 전례이며 세대를 계승하는 의(義)는 여러 왕대의 옛 규례이다. 고구려 국왕(髙句麗國王) (臧)은 그 바탕과 마음씨가 아름답고 민첩하고, 식견과 도량이 상세하고 바르며, 일찍이 예교(禮敎)를 익혀 덕망과 의로움이 알려졌다. 처음 번방(藩邦)의 왕업을 계승하여 정성을 먼저 드러냈다. 마땅히 작위를 더할 만하므로 전례에 의하여 상주국(上柱國) 요동군왕(遼東郡公) 고구려왕(髙句麗王)이라 한다.”고 하였다.

가을 9월에 신라가 ()에 사신을 보내 말하기를 “백제가 우리의 40여 성을 공격하여 빼앗고 다시 고구려와 병력을 연합하여 입조(入朝)의 길을 끊으려 합니다.”하고, 병력을 보내 구원해주기를 청하였다.

15일에 밤이 환한데 달은 보이지 않았다. 뭇 별(衆星)이 서쪽으로 흘러갔다.

3년(644) 봄 정월에 사신을 ()에 들여보내 조공하였다. 황제가 사농승(司農丞) 상리현장(相里玄奬)에게 명하여 조서를 가지고 와서 왕에게 주고 말하기를 “신라는 국가를 맡기고 조공이 떨어지지 않는다. 그대와 백제는 마땅히 전쟁을 그만두어야 한다. 만약 다시 신라를 공격한다면 내년에 병력을 출동시켜 그대 나라를 공격할 것이다.”라 하였다. 현장(玄奬)이 국경에 들어왔을 때 개소문(蓋蘇文)이 이미 병력을 거느리고 신라를 공격하여 두 성을 쳐부수었다. 왕이 불러오게 하니 돌아왔다. 현장(玄奬)이 신라를 침략하지 말라고 타이르니, 개소문(蓋蘇文)현장(玄奬)에게 말하기를 “우리와 신라는 원한이 이미 오래되었다. 지난번에 수(隋)나라 사람이 침략해 왔을 때 신라가 그 틈을 타서 우리의 땅 5백 리를 빼앗아 그 성읍을 모두 차지하였다. 스스로 우리에게 빼앗은 땅을 돌려주지 않는다면 전쟁은 아마도 그만둘 수 없을 것이다.”라 하였다. 현장(玄奬)이 말하기를 “기왕의 일을 어찌 쫓아서 사리를 밝히겠는가? 지금 요동(遼東)의 여러 성은 본래 모두 중국(中國)의 군현이다. 중국(中國)오히려 말하지 않는데, 고구려가 어찌 옛 땅을 반드시 찾을 수 있겠는가?”라 하였다. 막리지(莫離支)가 끝내 따르지 않았다. 현장(玄奬)이 돌아가 그 사실을 자세히 보고하니, 태종(太宗)이 말하기를 “개소문(蓋蘇文)은 그 임금을 시해하고 대신들을 죽이고 그 백성을 잔인하게 학대하고, 지금은 또 나의 명령을 어기니 토벌하지 않을 수 없다.” 고 하였다.

가을 7월에 황제가 장차 병력을 출동시키려고 홍주(洪州)·요주(饒州)·강주(江州) 3주에 명령을 내려 배 4백 척을 만들어 군량을 싣게 하고, 영주도독(營州都督) 장검(張儉) 등을 보내 유주(幽州)·영주(營州) 도독(都督)의 병력과 거란(契丹)·(奚)·말갈(靺鞨)을 거느리고 먼저 요동(遼東)을 공격하여 그 형세를 보게 하고, 대리경(大理卿) 위정(韋挺)으로 궤수사(饋輸使)를 삼아, 하북(河北)의 여러 주는 모두 위정(韋挺)의 명령을 받게 하고 편의에 따라 일을 처리할 수 있게 하였다. 또 소경(少卿) 소예(蕭銳)에게 명하여 하남(河南)의 여러 주의 식량을 싣고 바다로 가게 하였다.

9월에 막리지(莫離支)가 백금을 ()에 바쳤다. 저수량(褚遂良)이 말하기를 “막리지(莫離支)그 임금을 죽인 것은 구이(九夷)가 용납하지 않는 바이어서 이제 그를 토벌하려고 하는데, 금을 바치니 이는 고정(郜鼎)과 같은 뇌물입니다. 신은 받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라 하였다. 황제가 그 말에 따랐다. 사신이 또 말하기를 “막리지(莫離支)가 관리 50인을 들여보내 숙위(宿衛)하게 할 것입니다.” 하였다. 황제가 화가 나서 사신에게 말하기를 “너희 관리들은 모두 고무(高武)를 섬겨 관작을 얻었다. 막리지(莫離支)가 임금을 죽였는데도 너희 관리들은 복수를 하지 않고 지금 다시 그를 위하여 유세하며 대국을 기만하니, 죄가 막대하지 아니하냐?”하고, 모두 처벌하게 하였다.

겨울 10월에 평양(平壤)의 눈 색깔이 붉은 색이었다. 황제가 스스로 장차 토벌하려고 장안(長安)의 노인들을 불러 위로하며 말하기를 “요동(遼東)은 옛 중국 땅이고 막리지(莫離支)가 그 임금을 죽였으므로, 짐(朕)이 몸소 가서 이를 경략(經略)하려고 한다. 그러므로 어른들과 약속하니 아들이나 손자가 나를 따라가는 자는 내가 잘 위무할 터이니 염려할 것이 없다.”고 하고, 포백과 곡식을 후하게 주었다. 군신들이 모두 황제에게 가지 말기를 권하였다. 황제가 말하기를 “나는 알고 있다. 근본을 버리고 말단으로 가며, 높은 것을 버리고 낮은 것을 취하며, 가까운 곳을 두고 먼 곳으로 감은 셋이 모두 좋지 못하다. 고구려를 정벌하는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개소문(盖蘇文)은 임금을 죽이고 또 대신들을 살육하고 즐거워하고 있으므로, 한 나라의 사람들이 목을 내밀고 구원을 기다리고 있다. 의논하는 사람들은 이를 살피지 못하고 있다.”고 하였다. 이에 북쪽은 영주(營州)로 곡식을 나르고, 동쪽은 고대인성(古大人城)에 곡식을 저장하였다.

11월에 황제가 낙양(洛陽)에 이르렀다. 전 의주(宜州) 자사(刺史) 정천숙(鄭天璹)이 이미 벼슬을 그만두었으나, 황제는 그가 일찍이 수(隋) 양제(煬帝)를 따라서 고구려를 정벌하였기 때문에 행재소로 불러서 오게 해서 물었다. 대답하기를 “요동도(遼東道) 멀어서 식량을 운반하는 것이 어렵고 험하며, 동이(東夷)는 성을 잘 지키므로 쉽게 항복시킬 수 없습니다.”라 하였다. 황제가 말하기를 “지금은 (隋)나라에 비할 때가 아니다. 공은 단지 따르기만 하라.”고 하였다.

형부상서(刑部尚書) 장량(張亮)으로 평양도(平壤道) 행군대총관(行軍大摠管)을 삼아, 강회(江淮)와 영협(嶺硤)의 병력 4만, 장안(長安)낙양(洛陽)에서 모집한 병사 3천, 전함 5백 척을 거느리고 내주(萊州)에서 배를 타고 평양(平壤) 도착하게 하였다. 또 태자첨사좌위솔(太子詹事左衛率) 이세적(李世勣)으로 요동도(遼東道) 행군대총관(行軍大摠管)삼아, 보·기병 6만과 난주(蘭州)·하주(河州) 2주의 항복한 오랑캐들을 거느리고 요동(遼東)으로 가게 하고, 양군은 세력을 합하여 유주(幽州)에 다 모이게 하였다. 행군총관(行軍摠管) 강행본(江行本)과 소감(少監) 구행엄(丘行淹)을 보내 먼저 많은 장인(匠人)을 독려하여 안라산(安羅山)에서 운제(雲梯)와 충거(衝車)를 만들게 하였다. 이때 원근(逺近)의 용사들로 병사 모집에 응한 사람과 공성(攻城) 기계를 바친 자가 매우 많아, 황제가 친히 모든 것을 살펴 편하고 쉬운 것을 취하였다. 또 친필 조서를 지어 천하에 알리기를 “고구려의 개소문(蓋蘇文)이 임금을 죽이고 백성을 학대함을 인정상 어찌 참을 수 있겠는가? 이제 유주(幽州)계주(薊州)에 순행하고, 요동(遼東)갈석(碣石)에 가서 그 죄를 물으려고 하니, 지나는 곳의 군영과 숙사에서 노력과 비용을 지출함이 없도록 하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옛적에 양제(煬帝)는 부하들에게 잔인하고 포악하였는데, 고구려왕은 그 백성을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였다. 반란을 생각하는 군사를 가지고, 편안하고 화목한 무리를 공격하였기 때문에 성공할 수 없었다. 지금 필승의 길을 대강 말하면 다섯 가지가 있다. 첫째는 큰 것으로써 작은 것을 공격하는 것이요, 둘째는 순리로써 반역을 토벌하는 것이요, 셋째는 도리로써 혼란을 이용하는 것이요, 넷째는 편안함으로써 피로함에 대적하는 것이요, 다섯째는 기쁨으로 원망을 상대하는 것이다. 어찌 이기지 못할 것을 근심하겠는가? 백성들에게 포고하니 의심하거나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였다. 이에 무릇 숙사, 공급, 설비의 기구를 줄인 것이 태반이었다. 여러 군대와 신라(新羅), 백제(百濟), (奚), 거란(契丹)에 명령하여 길을 나누어 공격하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