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는 이야기/삼국사기

제21권(卷第二十一) 고구려본기(髙句麗本紀) 보장왕(寶藏王) 상(上)

7390882@hanmail.net 2020. 2. 14. 12:03

보장왕(寶藏王) 4~5년


4년(645) 봄 정월에 이세적(李世勣)의 군대가 유주(幽州)에 이르렀다.

3월에 황제가 정주(定州)에 도착하여 시중드는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요동(遼東)은 본래 중국의 땅인데 수씨(隋氏)가 네 번 군사를 출동하였으나 빼앗을 수 없었다. 짐(朕)이 지금 동쪽으로 정벌하는 것은 중국을 위해서는 자제(子弟)들의 원수를 갚고, 고구려에게는 임금의 치욕을 씻어주려고 할 뿐이다. 또 사방이 대체로 평정되었는데 오직 이곳이 아직 평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아직 늙지 않았을 때 사대부들의 남은 힘을 빌려 이를 빼앗으려 한다.”고 하였다. 황제정주(定州)를 출발하면서 친히 활과 화살을 차고, 자기 손으로 비옷을 안장 뒤에 매었다. 이세적(李世勣)의 군대가 유성(柳城)을 출발하여 크게 형세를 벌이고 마치 회원진(懷遠鎭)으로 나오는 것처럼 하여 군사를 숨겨 북쪽으로 양쪽에 담장을 쌓아 보이지 않게 만든 길로 가서, 나오는 것을 우리가 알지 못하였다.

여름 4월에 세적(世勣)이 통정(通定)에서 요수(遼水)를 건너 현도(玄菟)에 이르니, 우리 성읍이 크게 놀라 모두 문을 닫고 지켰다. 부대총관(副大摠管) 강하왕(江夏王) 도종(道宗)이 병력 수천을 거느리고 신성(新城)에 도착하여, 절충도위(折衝都尉) 조삼량(曹三良)이 기병 10여 명을 이끌고 곧바로 성문을 압박하니, 성 안에서는 놀라 감히 나가는 자가 없었다. 영주도독(營州都督) 장검(張儉)이 호병(胡兵)을 거느리고 선봉이 되어 나아가 요수(遼水)를 건너 건안성(建安城)으로 가서, 우리 병력을 깨뜨리고 수천인을 죽였다. 이세적(李世勣)과 강하왕(江夏王) 도종(道宗)이 개모성(盖牟城)을 공격하여 빼앗아, 1만인을 사로잡고 양곡 10만 석을 얻어 그 땅을 개주(盖州)로 삼았다. 장량(張亮)이 수군을 거느리고 동래(東萊)에서 바다를 건너 비사성(卑沙城)을 습격하였다. 성은 4면이 깎은 듯하고 오직 서문(西門)만이 오를 수 있었다. 정명진(程名振)이 병력을 이끌고 밤에 도착하자, 부총관(副摠管) 왕대도(王大度)가 먼저 올랐다.

5월에 성이 함락되어 남녀 8천 명을 빼앗겼다.

이세적(李世勣)이 진군하여 요동성(遼東) 아래에 이르고 황제가 요택(遼澤)에 도달하였으나 진흙이 2백여 리여서 사람과 말이 통과할 수 없었다. 장작대장(將作大匠) 염입덕(閻立德)이 흙을 넓게 깔아 다리를 만들어 군대가 지체하지 않고 요택(遼澤) 동쪽으로 건넜다. 왕이 신성(新城)과 국내성(國内城)의 보병과 기병 4만을 보내서 요동(遼東)을 구원하니, 강하왕(江夏王) 도종(道宗)이 기병 4천을 거느리고 막았다. 군대 안에서는 모두 많고 적음이 현격하게 차이가 나므로, 깊은 도랑과 높은 성루에 의지해 황제가 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만 못하다고 여겼다. 도종(道宗)이 말하기를 “적이 숫자가 많은 것을 믿고 우리를 업신여기는 마음이 있고, 멀리 와서 피곤할 것이니 이를 공격하면 반드시 이길 것이다. 마땅히 길을 깨끗이 하고 임금의 수레를 기다릴 것이거늘 어찌 적을 임금께 남겨두려고 하느냐?” 하였다. 도위(都尉) 마문거(馬文擧)가 말하기를 “강한 적을 만나지 않고 무엇으로 장사임을 드러내리오.”하고 말을 채찍질하여 달려가 공격하니 향하는 곳마다 모두 쓰러졌으므로, 뭇 군사들의 마음이 점점 안정되었다. 이윽고 맞붙어 싸우게 되자 행군총관(行軍㹅管) 장군예(張君乂)가 후퇴하여 달아나서 당(唐)의 군대가 패하였다. 도종(道宗)이 흩어진 군사를 수습하여 높은 곳에 올라가 바라보니, 아군의 진영이 어지러우므로 날쌘 기병 수천으로 공격하고, 이세적(李世勣)이 병력을 이끌고 이를 도와, 아군이 크게 패하여 죽은 자가 천여 명이었다. 황제가 요수(遼水)를 건너서 다리를 걷어치워서 사졸의 마음을 굳게 하고, 마수산(馬首山)에 군사를 머물러 강하왕(江夏王) 도종(道宗)을 위로하고 마문거(馬文擧)에게는 정한 등급을 뛰어넘어 중랑장(中郎将)의 벼슬을 주고 장군예(張君乂)는 목을 베었다. 황제가 스스로 수백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요동성(遼東城) 아래에 이르러, 사졸들이 흙을 져다가 해자를 메우는 것을 보고 그 중 가장 무거운 것을 나누어 말 위에서 가져가니 따르는 관리들이 다투어 흙을 져다가 성 밑에 놓았다. 이세적(李世勣)요동성(遼東城)을 공격하여 밤낮을 쉬지 않은지 12일 만에 황제가 정예 병력을 이끌고 합세하여 그 성을 수백 겹으로 포위하니 북소리와 고함소리가 천지를 흔들었다.

성에는 주몽(朱蒙)의 사당이 있고 사당에는 쇄갑(鎖甲)과 작살창이 있었는데, 망령되게 말하기를 전연(前燕) 시대에 하늘이 내려준 것이라 하였다. 바야흐로 포위가 급해지자 미녀를 단장하여 여신을 만들어 놓고, 무당이 말하기를 “주몽(朱蒙)이 기뻐하니 성은 반드시 안전할 것이다.”라 하였다. 이세적(李世勣)이 포거(抛車)를 벌려 놓고 큰 돌을 3백 보 넘게 날리니 맞는 곳마다 무너졌다. 우리가 나무를 쌓아 망루를 만들고 그물을 얽어 쳤으나 막지 못하니, 충거(衝車)로 성위의 집을 부수었다. 이때 백제가 금색 칠을 한 갑옷(金髹鎧)을 바치고, 또 검은 쇠로 무늬를 놓은 갑옷(文鎧)을 만들어 바치니, 군사들이 입고 따랐다. 황제와 이세적(李世勣)이 만났는데 갑옷의 광채가 태양에 빛났다. 남풍이 세게 불어오니 황제가 정예 병졸을 보내 충간(衝竿) 끝에 올라가 성의 서남 망루에 불을 질러 성 안으로 불길이 번져 타 나가자 장수와 병졸을 지휘하여 성으로 올라갔다. 아군이 힘을 다해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죽은 자가 만여 명이고, 체포된 병사가 만여 명, 남녀가 4만 명이고, 양곡이 50만 석이었다. 그 성을 요주(遼州)로 삼았다.

이세적(李世勣)이 백암성(白巖城) 서남쪽으로 진격하고 황제가 그 서북쪽에 이르니, 성주(城主) 손대음(孫代音)이 몰래 심복을 보내 항복을 청하였다. 성에 도착해 칼과 도끼를 던지는 것으로 신표로 삼고 말하기를 “저는 항복하기를 원하나 성에는 따르지 않는 자가 있습니다.” 하였다. 황제가 (唐)의 깃발을 그 심부름꾼에게 주면서 말하기를 “기필코 항복하려고 한다면 이것을 성 위에 세워라.”고 하였다. 손대음(孫代音)이 깃발을 세우니, 성 안의 사람들이 (唐)의 병력이 이미 성에 올라온 것으로 알고 모두 그를 따랐다. 황제가 요동성(遼東城)에서 승리를 거두었을 때 백암성(白巖城)이 항복을 청했다가 얼마 후에 후회하였었다. 황제가 그 뒤집은 것에 화가 나서 진영에 명령을 내려 말하기를 “성을 빼앗으면 마땅히 그 사람과 물건들을 모두 전사들에게 상으로 줄 것이다.”라 하였다. 이세적(李世勣)이 황제가 그 항복을 받아들이려는 것으로 보고, 갑옷을 입은 병사 수십 인을 거느리고 와서 청하여 말하기를 “사졸이 다투어 화살과 돌을 무릅쓰고 죽음을 돌보지 않는 것은 노획을 탐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성이 거의 함락되려 하는데 어찌 다시 그 항복을 받아 전사의 마음을 저버리려 하십니까?” 라 하였다. 황제가 말에서 내려 사과하여 말하기를 “장군의 말이 옳다. 그러나 병력을 풀어놓아 사람을 죽이고 그 처자를 사로잡는 것은 짐(朕)이 차마할 수 없는 바이다. 장군 휘하의 공이 있는 자는 짐(朕)이 창고에 있는 물건으로 상을 줄 것이니, 장군은 이 한 성을 속죄해주기 바란다.”고 하였다. 세적(世勣)이에 물러났다. 성 안의 남녀 만여 명을 얻어 물가에 천막을 설치하고 그들의 항복을 받고 먹을 것을 하사하고 80세 이상에게는 비단을 차등이 있게 주었다. 다른 성의 병력으로 백암성(白巖城)에 있던 자는 모두 위로하고 깨우쳐서 양식과 무기를 주어 제 마음대로 가게 하였다. 이에 앞서 요동성(遼東) 장사(長史)가 부하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그 성사(省事)가 그의 처자를 받들고 백암성(白巖城)으로 달아났다. 황제가 의리가 있음을 어여삐 여겨 비단 5필을 주고, 장사(長史)를 위하여 상여를 만들어 평양(平壤)으로 돌아가게 했다. 백암성(白巖城)암주(巖州)라 하고, 손대음(孫代音)으로 자사(刺史)를 삼았다.

처음에 막리지(莫離支)가 가시성(加尸城)의 7백 인(人)을 보내 개모성(蓋牟城)을 지키게 하였는데, 이세적(李世勣)이 그들을 모두 사로잡았다. 그 사람들이 종군하여 스스로 공을 세우기를 청하니, 황제가 말하기를 “너희 집이 모두 가시성(加尸城)에 있는데, 너희가 나를 위하여 싸우면 막리지(莫離支)가 반드시 너희 처자를 죽일 것이다. 한 사람의 힘을 얻으려고 한 집을 멸망시키는 짓은 나는 차마 할 수 없다.”고 하고, 모두에게 양식을 주어 보냈다. 개모성(蓋牟城)으로 개주(蓋州)를 삼았다.

황제가 안시성(安市城)에 이르러 병력을 보내 공격하니, 북부 욕살(褥薩) 고연수(高延壽)와 남부 욕살 고혜진(高惠)이 아군과 말갈(靺鞨) 병력 15만을 거느리고 안시성(安市城)을 구원하였다. 황제가 가까이 있는 신하에게 말하기를 “지금 고연수(高延壽)에게는 책략이 세 가지 있다. 병력을 이끌고 곧바로 나아가 안시성(安市城)과 연결하여 보루를 삼고, 높은 산의 험준함에 의지하여 성 안의 곡식을 먹으며 말갈(靺鞨)을 풀어 우리의 소와 말을 약탈하면 이를 공격해도 갑자기 함락시킬 수 없고, 돌아가려 하면 진흙과 바닥에 고인 물에 막혀, 앉아서 우리 군사를 피곤하게 할 터이니 이것이 상책(上䇿)이다. 성 안의 무리를 뽑아 그들과 함께 밤에 달아나는 것은 중책(中䇿)이다. 자신의 지혜와 능력을 헤아리지 않고 와서 우리와 싸우는 것은 하책(下䇿)이다. 경(卿)들은 보라. 저들은 반드시 하책(下䇿)으로 나올 것이니, 저들을 사로잡는 것은 내 눈 안에 있다.”고 하였다.

그 때에 대로(對盧) 고정의(高正義)가 나이가 많고 일에 익숙하였다. 연수(延壽)에게 일러 말하기를 “진왕(秦王)은 안으로 여러 영웅을 제거하고, 밖으로 오랑캐를 복속시켜 독립하여 황제가 되었으니, 이는 한 시대에 뛰어난 인재이다. 지금 나라 안의 무리를 거느리고 왔으니 대적할 수 없다. 나의 계책으로는 병력을 멈추고 싸우지 않고 세월을 허송하며 오래 버티어 견디며 기습 병력을 나누어 보내어 그 식량을 보급하는 길을 끊는 것만 같지 못하다. 양식이 이윽고 떨어지면 싸우려고 해도 싸울 수 없고, 돌아가려 해도 길이 없으니 곧 이길 수 있다.”고 하였다.
연수(延壽)는 따르지 않고 군대를 이끌고 곧바로 나아가 안시성(安市城)을 40리 앞두었다. 황제는 그가 머뭇거리며 오지 않을 것을 염려하여 대장군(大将軍) 아사나사이(阿史那社尒)에게 명령하여 돌궐(突厥) 기병 1천을 거느리고 가서 이를 유인하게 하였다. 싸움이 시작되어 거짓으로 달아나니, 연수(延壽)가 “상대하기 쉽구나.”하고 다투어 나아가 그들을 이기고, 안시성(安市城) 동남쪽 8리 되는 곳에 이르러 산에 의지하여 진을 쳤다.
황제가 여러 장수를 모두 불러 계책을 물었다. 장손무기(長孫無忌)가 대답하여 말하기를 “신이 들은 바로는 ‘적과 대하여 전쟁을 하려 할 때는 반드시 먼저 사졸들의 마음을 관찰해야 한다.’고 합니다. 신이 마침 여러 군영을 지나면서 사졸들이 고구려가 이르렀음을 듣고 모두 칼을 뽑고 깃발을 매는데 얼굴에 기뻐하는 빛이 나타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는 필승의 병사들입니다. 폐하는 스무 살 이전에 친히 전쟁에 나아가 뛰어난 계책을 내어 승리하였습니다. 모두 위에서 성스러운 계책을 내리고 여러 장수들이 이를 받들어 이루었을 뿐입니다. 오늘의 일은 폐하의 지휘를 바랍니다.” 하였다.
황제가 웃으며 말하기를 “여러분이 사양하니 짐(朕)은 마땅히 여러분을 위하여 헤아려보겠다.”고 하고, 무기(無忌) 등과 더불어 기병 수백을 거느리고 높은 곳에 올라가 바라보았다. 산천형세가 병력을 숨기고 드나들 수 있는 곳을 살피었다. 아군과 말갈(靺鞨)이 병력을 합하여 진을 쳤는데 길이가 40리였다. 황제가 이를 바라보고 두려워하는 기색이 있었다.
강하왕(江夏王) 도종(道宗)이 말하기를 “고구려가 나라를 기울여 황제의 군대를 막으니 평양의 수비가 반드시 약할 것입니다. 원컨대 신에게 정예 병졸 5천을 빌려 주소서. 그 근본을 뒤엎으면 수십만의 군대를 싸우지 않고도 항복시킬 수 있습니다.” 하였다. 황제가 듣지 않고 사신을 연수(延壽)에게 보내 말하기를 “나는 그대 나라의 세력이 강한 신하가 그 주인을 죽인 까닭에 죄를 물으려 왔으며 교전에 이른 것은 나의 본심이 아니다. 그대들의 국경에 들어오니 꼴과 양식이 공급되지 않아 그대들의 여러 성을 빼앗은 것이다. 그대의 나라가 신하의 예를 닦는다면 잃은 것을 반드시 회복할 것이다.” 하였다. 연수(延壽)는 이를 믿고 다시 방비를 하지 않았다.

황제가 밤에 문무관을 불러 일을 계획하고 명령을 내리기를 이세적(李世勣)은 보병과 기병 1만 5천을 거느리고 서쪽 고개에서 진을 치고, 장손무기(長孫無忌)우진달(牛進達)은 정예 병력 1만 1천을 기습병력으로 삼아 거느리고 산의 북쪽에서 좁은 골짜기로 나와 그 뒤를 공격하게 하였다. 황제는 스스로 보병과 기병 4천을 거느리고, 북과 피리를 가지고 깃발을 눕히고 산으로 올라갔다. 황제는 여러 군대에게 명령을 내려 북과 피리 소리를 들으면 일제히 나와 분발하여 공격하게 하고, 이어서 담당 관리에게 명하여 조당(朝堂) 옆에 항복을 받을 장막을 치게 하였다. 이날 밤에 별똥별이 연수(延壽)의 진영에 떨어졌다. 이튿날 연수(延壽) 등이 홀로 이세적(李世勣)의 군사가 적은 것을 보고 병력을 정돈하여 싸우려고 하였다. 황제가 무기(無忌)의 군대에서 먼지가 일어나는 것을 보고, 북을 치고 피리를 불며 깃발을 들도록 명령하니, 여러 군대가 북을 치고 소리를 지르며 일제히 진격하였다. 연수(延壽) 등은 두려워 병력을 나누어 막으려 하였으나 그 군진이 이미 어지러워졌다. 마침 천둥과 번개가 쳤다. 용문인(龍門人) 설인귀(薛仁貴)가 기이한 복장을 하고 크게 소리치며 진에 깊이 들어가니, 향하는 곳마다 대적하는 자가 없이 아군은 흩어 쓰러졌다. 대군이 이 기회를 타서 공격하니 아군은 크게 무너져 죽은 자가 3만여 명이었다. 황제가 설인귀(薛仁貴)를 바라보고 유격장군(遊擊將軍)의 벼슬을 내렸다. 연수(延壽) 등은 남은 무리를 거느리고 산에 의지하여 스스로 수비하였다. 황제가 여러 군대에 명하여 이를 포위하게 하고, 장손무기(長孫無忌)는 교량을 모두 철거하여 돌아갈 길을 끊으니, 연수(延壽)혜진(惠)이 무리 3만 6천 8백 명을 거느리고 항복을 청하였다. 군문에 들어가 절하고 엎드려 목숨을 청하니, 황제가 욕살(褥薩) 이하 관장 3천 5백인을 가려 내지(內地)로 옮기고, 나머지는 모두 놓아주어 평양(平瀼)으로 돌아가게 하고, 말갈(靺鞨) 3천 3백인은 거두어 모두 구덩이에 묻었다. 획득한 말이 5만 필과 소가 5만 두와 명광개(明光鎧) 1만 벌이고 다른 기계도 그 정도였다. 거둥했던 산 이름을 고쳐 주필산(駐蹕山)이라 하였다. 고연수(高延壽)를 홍려경(鴻臚卿)으로, 고혜진(高惠)을 사농경(司農卿)으로 삼았다.

황제가 백암성(白巖城)에서 이기고 이세적(李世勣)에게 일러 말하기를 “내가 들으니 안시성(安市城)은 성이 험하고 병력이 정예이며, 그 성주가 재능과 용기가 있어 막리지(莫離支)의 난에도 성을 지키고 항복하지 않아, 막리지(莫離支)가 이를 공격하였으나 함락시킬 수 없어 그에게 주었다. 건안성(建安城)은 병력이 약하고 식량이 적어 만일 불의에 나가 이를 공격한다면 반드시 이길 것이다. 공이 먼저 건안성(建安城)을 공격하는 것이 좋겠다. 건안성(建安城)이 떨어지면 안시성(安市城)은 내 배 안에 있는 것이니, 이것이 병법에 ‘성에는 공격하지 않는 곳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고 하였다. 대답하여 말하기를 “건안성(建安城)은 남쪽에 있고 안시성(安市城)은 북쪽에 있으며, 우리 군량은 모두 요동(遼東)에 있는데 지금 안시성(安市城)을 지나 건안성(建安城)을 공격했다가, 만약 고구려인들이 우리 군량 보급로를 끊는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먼저 안시성(安市城)을 공격하고 안시성(安市城)이 떨어지면, 북을 치며 나아가 건안성(建安城)을 빼앗아야 합니다.”라 하였다.

황제가 말하기를 “공으로 장수를 삼았으니 어찌 공의 책략을 쓰지 않겠는가? 나의 일을 그르치지는 말라.”고 하였다. 세적(世勣)이 드디어 안시성(安市城)을 공격하는데 안시인(安市人)들이 황제의 깃발과 일산을 보고 문득 성에 올라가 북을 치고 소리를 질렀다. 황제가 화를 내자 세적(世勣)이 성을 빼앗는 날에는 남자는 모두 구덩이에 묻어버리기를 청하였다. 안시인(安市人)들이 이 말을 듣고 더욱 굳게 지키니 공격이 오래되어도 함락되지 않았다. 고연수(高延壽)·고혜진(高惠) 황제에게 청하여 말하기를 “저희가 이미 대국에 몸을 맡겼으니 그 정성을 감히 바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천자께서 빨리 큰 공을 이루어야 저희가 아내와 자식을 만날 수 있습니다. 안시성(安市城) 사람들은 그 집을 돌보고 아껴서 사람마다 자진해서 싸우므로 빨리 함락할 수 없습니다. 지금 저희가 고구려의 10여 만 무리를 가지고서도 황제의 깃발을 바라보고 무너졌으니, 우리나라 사람들의 간담도 부서질 것입니다. 오골성(烏骨城)의 욕살(耨薩)은 늙어서 굳게 지킬 수 없습니다. 병력을 옮겨 그곳으로 가면 아침에 도착하여 저녁에 이길 것이며, 그 나머지 길을 막는 작은 성들은 필시 기세만 보고도 달아나고 무너질 것입니다. 그런 후에 물자와 양식을 거두어서 북을 치고 나아가면 평양(平壤) 반드시 지키지 못할 것입니다.”라 하였다.
여러 신하들도 또한 말하기를 “장량(張亮)병력이 사성(沙城)에 있으니 그를 부르면 이틀 밤에 도착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고구려가 두려워하는 것을 이용하여 힘을 합쳐 오골성(烏骨城)을 함락시키고, 압록수(鴨渌水)를 건너 곧바로 평양(平壤)을 빼앗는 것이 이번 거사에 달렸습니다.”라 하였다.
황제가 이에 따르려고 하자, 홀로 장손무기(長孫無忌) 말하기를 “천자가 친히 정벌하는 것은 여러 장수와는 달라서 위태로움을 이용하여 다행을 바랄 수 없습니다. 지금 건안(建安)과 신성(新城)의  오랑캐 무리가 10만입니다. 만약 오골(烏骨)로 향한다면 모두 우리의 뒤를 밟을 것입니다. 먼저 안시성(安市城)을 격파하고, 건안성(建安城)을 빼앗은 연후에 오래 말을 달려 전진해가는 것만 못합니다. 이것이 만전의 계책입니다.”라 하였다. 황제가 이에 그만두었다.
여러 장수가 급히 안시성(安市城)을 공격하였다. 황제가 성 안에서 닭과 돼지 소리가 나는 것을 듣고 세적(世勣)에게 말하기를 “성을 포위한 지 오래되어 성 안에서 나는 연기가 날로 작아지더니 이제 닭과 돼지가 심하게 우니, 이는 필시 군사에게 먹여 밤에 나와서 우리를 습격하려고 하는 것이다. 마땅히 엄중하게 병력이 대비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날 밤에 아군 수백 인이 성에 줄을 매어 타고 내려갔다. 황제가 이 소식을 듣고 몸소 성 아래에 이르러 병력을 소집하여 급히 공격하니, 아군에 죽은 자가 수십 인이고 나머지 군사는 물러나 달아났다. 강하왕(江夏王) 도종(道宗)이 무리를 독려하여 성의 동남 모퉁이에 토산을 쌓아 성에 대한 침략이 가까이 다가오니 성 안에서도 역시 성을 더욱 높여서 이를 막았다. 사졸이 순번을 나누어 하루에 6~7회 맞붙어 싸웠다. 충거(衝車)와 포석(礮石)으로 그 망루와 성가퀴를 무너뜨리면, 성 안에서도 따라서 목책(木柵)을 세워 그 무너진 곳을 막았다. 도종(道宗)이 발을 다쳐 황제가 친히 그를 위해 침을 놓아 주었다. 산을 쌓기를 밤낮을 쉬지 않고 무릇 60일에 인원 50만을 동원하였다. 산꼭대기가 성에서 몇 길(丈) 떨어져 아래로 성 안을 내려다 볼 수 있게 되었다. 도종(道宗)이 과의(果毅) 부복애(傅伏愛)로 하여금 병력을 거느리고 산꼭대기에 주둔하여 적에 대비하게 하였는데, 산이 무너지면서 성을 눌러 성이 무너졌다. 마침 복애(伏愛)가 사사로이 통솔하는 곳을 떠나 있었다. 아군 수백 인이 성이 무너진 곳으로 나가 싸워서 마침내 토산을 빼앗아 웅거하여 주위를 깎아 이를 지켰다. 황제가 화가 나서 복애(伏愛)참하여 머리를 내걸고, 여러 장수에게 명하여 이를 공격하게 하였는데, 3일이 지나도록 이기지 못하니, 도종(道宗) 맨발로 깃발 아래에 나아가 죄를 청하였다. 황제가 말하기를 “너의 죄는 당연히 죽을 것이나 단지 짐(朕)한무제(漢武帝)왕회(王恢)를 죽인 것이 진목공(秦穆公)이 맹명(孟明)을 등용한 것만 같지 못하다고 생각하고, 또 개모성(蓋牟城)요동성(遼東)격파한 공이 있는 까닭에 특별히 너를 용서할 뿐이다.”고 하였다.
황제는 요하(遼河)의 좌측이 일찍 춥고, 풀이 마르고 물이 얼어 병사와 말이 오래 머물기 어렵고, 또 양식이 다 되어가므로 군사를 돌리도록 명하였다. 먼저 요주(遼)·개주() 2주의 호구를 뽑아 요하(遼河)를 건너게 하고 안시성(安市城) 아래에서 병력을 시위하고 돌아갔다. 성 안에서는 모두 자취를 감추고 나오지 않았으나, 성주가 성에 올라 절을 하고 작별 인사를 하였다. 황제는 그가 성을 고수한 것을 가상하게 여겨 비단 1백 필을 주고 임금 섬김을 격려하였다. 세적(世勣)도종(道宗)에게 명하여 보병과 기병 4만 명을 거느리고 후군(後軍)을 삼게 하였다. 요동(遼東)에 이르러 요수(遼水)를 건너는데 요택(遼澤)이 진흙과 바닥에 고인 물로 수레와 말이 지나갈 수 없었다. 무기(無忌)에게 명하여 1만 인을 거느리고 풀을 베어 길을 메우고, 물이 깊은 곳은 수레로서 다리를 만들게 하였다. 황제는 스스로 말채찍에 잡초를 묶어 일을 도왔다.
겨울 10월에 황제가 포구(蒲溝)에 이르러 말을 멈추고 길 메우기를 독려하였다. 여러 군대가 발착수(渤錯水)를 건너니 폭풍이 불고 눈이 내려서 사졸이 더욱 축축이 젖어 죽는 자가 많았다. 명령을 내려 길에 불을 피워 군대를 기다리게 하였다. 무릇 현도(玄菟)·횡산(橫山)·개모(盖牟)·마미(磨米)·요동(遼東)·백암(白岩)·비사(卑沙)·협곡(夾谷)·은산(銀山)·후황(後黃)의 10성을 함락시키고, 요주()·개주()·암주() 3주의 호구를 옮기어 중국으로 들어간 자가 7만 인이었다. 고연수(髙延壽)는 스스로 항복한 후에 늘 분하여 탄식하다가 얼마 후에 근심으로 죽고, 혜진(真)은 끝내 장안(長安)에 이르렀다. 신성(新城)·건안(建安)·주필(駐蹕)의 세 번 큰 싸움에서 아군과 당(唐)의 병마가 죽은 것이 매우 많았다. 황제는 성공하지 못한 것을 깊이 후회하고 탄식하여 말하기를 “위징(魏徵)이 만일 있었으면 나로 하여금 이번 걸음을 하지 않게 하였을 것이다.”라 하였다.
논하여 말한다. 당() 태종(太宗)총명하고 좀처럼 세상에 나타나기 드문 임금이다. 난을 평정함은 탕왕(湯王)무왕(武王)에 비할 만하고, 다스리는 것은 성왕(成王)·강왕(康王)에 가깝다. 병력을 운용함에 이르러서는 기묘한 계책을 냄이 끝이 없고 향하는 곳마다 대적할 자가 없었다. 그러나 동방을 정벌하는 일에서는 안시(安市)에서 패하였으니 그 성주는 가히 호걸로 보통 사람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역사에 그 성명이 전하지 않으니 양자(楊子)가 말하기를 “(齊)와 (魯)의 대신이 역사에 그 이름이 전하지 않는다.”고 한 것과 다를 것이 없다. 매우 애석하다고 할 것이다.

5년(646) 봄 2월당() 태종(太宗)이 수도로 돌아가 이정(李靖)에게 일러 말하기를 “내가 천하의 무리를 가지고 작은 오랑캐에게 곤란을 당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하고 하였다. 이정(李靖)이 말하기를 “이는 도종이 해명할 것입니다.”고 하였다. 황제가 도종(道宗)을 돌아보며 물으니, 도종(道宗)주필산(駐蹕山)에 있을 때 빈 틈을 타서 평양(平壤)빼앗자고 한 말을 자세히 진술하였다. 황제가 원망하며 그러하다고 여기며 말하기를 “당시에 매우 바빠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여름 5월에 왕과 막리지(莫離支) 개금(蓋金)이 사신을 보내 사죄하고 아울러 두 미녀를 바쳤다. 황제가 이들을 돌려보내며 사신에게 말하기를 “여색은 사람들이 소중히 여기는 바이지만 그들이 친척을 떠나 마음 상하게 하는 것이 불쌍해서 나는 취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동명왕(東明王) 어머니의 소상(塑像)이 사흘 동안 피눈물을 흘렸다. 처음에 황제가 돌아갈 때 활집을 개소문(蓋蘇文)에게 주었는데, 그는 이것을 받고도 사례하지 않았고, 더욱 교만하고 방자하였다. 비록 사신을 보내 글을 올렸지만 그 말이 모두 기만하고 현혹하는 것이었다. 또 당(唐) 사신을 접대하는 것도 거만하게 하였고, 늘 변방에 틈이 있는지를 엿보았다. 여러 번 칙령을 내려 신라를 공격하지 말라고 하였으나 침략을 멈추지 않았다. 태종(太宗)이 그 조공을 받지 않도록 명령하고 다시 이를 토벌할 것을 의논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