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는 이야기/삼국사기

제22권(卷第二十二) 고구려본기(髙句麗本紀) 보장왕(寶藏王) 하(下)

7390882@hanmail.net 2020. 2. 15. 16:33

제22권(卷第二十二)


고구려본기(髙句麗本紀) 제10(第十)

보장왕(寶藏王) 하(下)


보장왕(寶藏王) 6년~20년

6년(647) 태종(太宗)이 다시 군사를 보내려고 하니 조정이 의논하기를 “고구려는 산에 의지하여 성을 쌓아서 갑자기 쳐서 빼앗을 수 없습니다. 앞서 천자의 수레가 친히 정벌하였을 때 그 나라 사람들은 논밭을 갈고 씨를 뿌려 가꿀 수 없었으며, 이긴 성도 실은 그 곡식을 거두어 들였으나 계속되는 가뭄으로 백성의 태반이 식량이 부족하였습니다. 지금 만약 적은 부대를 자주 보내어 번갈아서 그 강역을 어지럽혀, 저들이 명을 받아 출동하는데 피곤하게 하고, 쟁기를 놓고 보루로 들어가게 하면 수 년 사이에 천리가 매우 쓸쓸하게 되어 인심이 저절로 이반할 것이니, 압록(鴨渌)북쪽은 싸우지 않고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황제가 이 말에 따랐다. 좌무위대장군(左武衞大將軍) 우진달(牛進達)을 청구도(靑丘道) 행군대총관(行軍大摠管)으로 삼고, 우무위장군(右武衞將軍) 이해안(李海岸)을 부총관(副摠管)으로 삼아, 병력 만여 인을 동원하여 보내 누선(樓船)을 타고 내주(萊州)에서 바다를 건너 들어가게 하였다. 또 태자 첨사(詹事) 이세적(李丗勣)을 요동도(遼東道) 행군대총관(行軍大摠管)으로 삼고, 우무위장군(右武衞將軍) 손이랑(孫貳郞) 등을 부총관(副摠管)으로 삼아, 병력 3천 인을 거느리고 영주도독부(營州都督府) 병력을 따라 신성도(新城道)에서 들어가게 했는데, 두 군대는 모두 물에 익숙하여 잘 싸우는 자들을 선발하여 배속시켰다.

이세적(李世勣)의 군대가 이미 요수(遼水)를 건너 남소(南蘇) 등 여러 성을 지나가자, 모두 성을 등지고 대적하여 싸웠으나, 세적(世勣)이 이를 격파하고 그 성 바깥 주위에 불을 지르고 돌아갔다.

가을 7월에 우진달(牛進逹)이해안(李海岸)이 우리 국경에 들어와 모두 백여 차례 석성(石城)을 공격하여 빼앗고 나아가 적리성(積利城) 아래에 이르렀다. 우리 병력 만여 인이 출전하였으나 이해안(李海岸)이 이를 공격하여 이겼다. 아군의 죽은 자가 3천인이었다.

태종(太宗)송주(宋州) 자사(刺史) 왕파리(王波利) 등에게 명령하여 강남(江南) 12주의 공인(工人)들을 징발하여 큰 배 수백 척을 만들어 우리를 정벌하고자 하였다.

겨울 12월에 왕이 둘째 아들 막리지(莫離支) 임무(任武)를 당(唐)에 들여보내 사죄하게 하니, 황제가 이를 허락하였다.

7년(648) 봄 정월에 사신을 (唐)에 들여보내 조공하였다. 황제가 조서를 내려 우무위대장군(右武衞大將軍) 설만철(薛萬徹)을 청구도(青丘) 행군대총관(行軍大摠管)으로 삼고, 우위장군(右衛將軍) 배행방(裴行方)을 부총관(摠管)으로 삼아, 병력 3만여 인과 누선(樓舡) 전함을 이끌고 내주(萊州)에서 바다를 건너서 공격하게 하였다.

여름 4월에 오호진(烏胡鎭) 장수 고신감(古神感)이 병력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와서 공격하였다. 우리 보병과 기병 5천을 만나 역산(易山)에서 싸워 이를 격파하였다. 그날 밤에 아군 만여 인이 신감(神感)의 배를 습격하였으나 신감(神感)이 숨겨놓은 병력을 출동시켜 패하였다.

황제가 우리가 곤궁하고 피폐하였다고 하여 명년에 30만 무리를 동원하여 한 번에 멸망시킬 것을 의논하니, 혹자가 말하기를 “대군이 동으로 정벌하려면 모름지기 한 해를 견딜 식량을 준비하여야 하고, 가축과 수레로는 실어 나를 수 없으니 마땅히 배를 갖추어 물로 운반해야 합니다. 수(隋)나라 말에 검남(劍南)은 도적의 피해가 없었고, 요동(遼東)전쟁에도 검남(劍南)은 참여하지 않아 그 백성들이 부유하므로 마땅히 그들에게 배를 만들게 해야 합니다.” 하니, 황제가 그에 따랐다.

가을 7월에 왕도의 여자가 아들을 낳았는데 몸 하나에 머리가 둘이었다.

태종(太宗)이 좌령좌우부(左領左右府) 장사(長史) 강위(强偉)를 검남도(劍南道)로 보내 나무를 베어 배를 만들게 하였는데, 큰 것은 혹 길이가 1백 척(尺)이나 되고 넓이가 그 반이나 되었다. 별도로 사신을 보내 물길(水道)로 가서 무협(巫峽)에서 강주(江州)·양주(楊州)에 이르러 내주(萊州)로 나가게 하였다.

9월에 노루 떼가 강을 건너 서쪽으로 달려가고 이리 떼가 서쪽으로 가는 것이 3일이나 끊이지 않았다.

태종(太宗)이 장군 설만철(薛萬徹) 등을 보내 쳐들어왔다. 바다를 건너 압록강으로 들어와 박작성(泊灼城) 남쪽 40리 되는 곳에 도달하여 진영을 멈추니, 박작성주(泊灼城主) 소부손(所夫孫)이 보병과 기병 1만여 명을 거느리고 이를 막았다. 만철(萬徹)이 우위장군(右衛將軍) 배행방(裴行方)을 보내 보병과 여러 군대를 거느리고 이를 이기니, 우리 병력이 무너졌다. 행방(行方) 등이 병력을 보내 성을 포위하였으나, 박작성(泊灼城)은 산에 의지하여 방어시설을 해놓고 압록수(鴨渌水)로 굳게 막혔으므로, 공격하였지만 빼앗지 못하였다. 우리 장수 고문(高文)이 오골(烏骨), 안지(安地) 등 여러 성의 병력 3만여 인을 거느리고 나와 지원하였는데, 두 진으로 나누어 설치하였다. 만철(萬徹)이 군사를 나누어 이에 대응하니 아군이 패하여 무너졌다. 황제는 또 내주자사(萊州刺史) 이도유(李道裕)에게 명령하여 양곡과 기계를 옮겨 오호도(烏胡島)에 쌓아두게 하고 장차 한꺼번에 크게 공격하려 하였다.

8년(649) 여름 4월에 당(唐) 태종(太宗)이 죽었다. 요동(遼東)전쟁을 그만두라고 유언하였다.

논하여 말한다. 처음에 태종(太宗)요동(遼東)에서 일을 일으키려 할 때 말리는 사람이 하나가 아니었다. 또 안시성(安市城)에서 군대를 돌린 후에는 스스로 성공할 수 없었던 것을 깊이 후회하고 탄식하여 말하기를 “만일 위징(魏徵)이 살아 있었다면 나로 하여금 이번 걸음을 하도록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고 하였다. 다시 정벌하려 할 때에 사공(司空) 방현령(房玄齡)이 병중에서 표(表)를 올려서 시정하기를 요청하여 말하기를 “노자(老子)는 ‘만족할 줄 알면 욕되지 않고, 그칠 줄을 알면 위태롭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폐하(陛下)는 위세와 명성 그리고 공덕이 이미 족하다고 말할 수 있고 토지를 개척하고 강역을 넓혔으니 또한 그만둘 만합니다. 또 폐하께서 한 명의 중죄인을 판결할 때마다 반드시 세 번 되풀이하고 다섯 번 아뢰게 하며, 간소한 반찬을 올리게 하고 음악을 중지한 것은 사람의 목숨을 소중히 여기시는 것입니다. 이제 죄가 없는 사졸들을 몰아서 창칼 아래에 내버려두어 간과 뇌장을 쏟아내고 비참하게 죽게 하는 것은 불쌍하지 아니합니까? 지난번에 고구려가 신하의 절개를 어겼다면 죽이는 것도 옳으며 백성을 습격하여 빼앗고 소란하게 했다면 멸망시켜도 옳으며, 나중에 중국의 근심이 될 것이라면 없애버리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지금 이 3조항이 없는데 앉아서 중국을 번거롭게 하여, 안으로 앞 시대의 부끄러움을 씻고 밖으로 신라를 위하여 복수한다고 하지만 어찌 얻는 것이 적고 잃는 것은 크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바라오니 폐하께서는 고구려가 제 스스로 지난 허물을 뉘우쳐 깨닫고 새 길로 들어서도록 허락하시고, 파도를 헤치고 갈 배를 불사르고 모집에 응한 군사를 돌려보내면, 자연히 화(華)와 이(夷)가 기뻐하며 의지할 것이며 먼 지방에서는 공경하고 가까운 지방은 편안하게 될 것입니다.”하였다. 양공(梁公)이 죽으려 할 때 한 말이 지성스럽기가 이와 같았으나 황제는 따르지 않고 동쪽 지역을 쓸쓸하게 만들어 자신이 즐거워하려다 죽은 뒤에야 그만 두었다. 사론(史論)에서 “큰 것을 좋아하고 공을 세우는 것을 즐거워하여 멀리 전쟁을 하도록 하였다”고 말한 것은 이를 두고 말함이 아니겠는가? 유공권(柳公權)소설(小說)에 말하기를 “주필(蹕)의 전쟁에서 고구려(髙句麗)와 말갈(靺鞨)군사를 합하니 사방 40리(里)여서 태종(太宗)이 이를 바라보고 두려워하는 기색이 있었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6군이 고구려에 패하여 거의 떨쳐 일어나지 못하게 되었을 때 시중드는 자가 알리기를 ‘영공(英公)의 대장기, 흑기(黑旗)가 포위되었다.’고 하자 황제가 크게 두려워하였다.”고 하였다. 비록 마침내 스스로 빠져나갔지만 위태롭고 두려워함이 저와 같았는데 《신·구당서》와 사마광(司馬公)의 《자치통감》에서 언급하지 않은 것은 어찌 나라를 위하여 숨긴 것이 아니겠는가?

9년(650) 여름 6월에 반룡사(盤龍寺)보덕화상(普德和尙)이 나라에서 도교를 받들고 불교를 믿지 않는다고 하여 남쪽으로 완산(完山) 고대산(孤大山)으로 옮겨갔다.

가을 7월에 서리와 우박이 곡식을 해쳐 백성이 굶주렸다.

11년(652) 봄 정월에 사신을 당()에 들여보내 조공하였다.

13년(654) 여름 4월에 사람들이 혹 말하기를 “마령(馬嶺) 위에서 신인(神人)을 보았는데 ‘너희 임금과 신하가 사치스러움에 도가 없으니 곧 패망하리라.’고 말하였다.”고 하였다.

겨울 10월에 왕이 장군 안고(安固)를 보내 출병하여 말갈(靺鞨)병력과 함께 거란(契丹)을 공격하였는데, 송막도독(松漠都督) 이굴가(李窟哥)가 이를 막아 신성(新城)에서 아군을 크게 패퇴시켰다.

14년(655) 봄 정월. 이에 앞서 우리가 백제·말갈(靺鞨)과 더불어 신라의 북쪽 변경을 침범하여 33성을 빼앗았다. 신라왕 김춘추(金春秋)가 당(唐)에 사신을 보내 구원을 청하였다.

2월에 고종(高宗)이 영주도독(營州都督) 정명진(程名振)과 좌위중랑장(左衞中郎將) 소정방(蘇定方)을 보내 병력을 거느리고 와서 공격하였다.

여름 5월에 정명진(程名振) 등이 요수(遼水)를 건너오므로 우리측 사람들이 그 병력이 적은 것을 보고, 문을 열고 귀단수(貴端水)를 건너 맞아 싸웠다. 명진(名振) 등이 분발하여 공격해서 크게 이기고 천여 명을 죽이고 사로잡고, 그 외곽과 촌락을 불태우고 돌아갔다.

15년(656) 여름 5월에 서울(王都)에 쇠처럼 강한 비가 내렸다.

겨울 12월에 사신을 (唐)에 들여보내 황태자 책봉을 축하하였다.

17년(658) 여름 6월에 (唐)의 영주도독(營州都督) 겸 동이도호(東夷都護) 정명진(程名振)과 우령군중랑장(右領軍中郎將) 설인귀(薛仁貴)가 병력을 거느리고 와서 공격하였으나 이길 수 없었다.

18년(659) 가을 9월에 아홉 마리의 호랑이가 한꺼번에 성으로 들어와서 사람을 잡아먹으므로 잡으려 했으나 잡지 못하였다.

겨울 11월에 (唐)의 우령군중랑장(右領軍中郎將) 설인귀(薛仁貴) 등이 우리 장군 온사문(溫沙門)과 횡산(橫山)에서 전투를 하여 이를 패배시켰다.

19년(660) 가을 7월에 평양(平壤)의 강물이 모두 3일이나 핏빛이었다.

겨울 11월에 (唐)이 좌효위대장군(左驍衛大將軍) 계필하력(契苾何力)패강도(浿江道) 행군대총관(行軍大㧾管)으로, 좌무위대장군(左武衛大將軍) 소정방(蘇定方)을 요동도(遼東) 행군대총관(行軍大㧾管)으로, 좌효위장군(左驍衛將軍) 유백영(劉伯英)을 평양도(平壤道) 행군대총관(行軍大㧾管)으로, 포주자사(蒲州刺史) 정명진(程名振)을 누방도(鏤方道) 총관(㧾管)으로 삼아 병력을 거느리고 길을 나누어 와서 공격하였다.

20년(661) 봄 정월에 (唐)하남(河南)·하북(河北)·회남(淮南)의 67주에서 병력을 모집하여 4만 4천여 명을 얻어서 평양(平壤)·누방(鏤方)의 진영으로 나아가고, 또 홍려경(鴻臚卿) 소사업(蕭嗣業)을 부여도(扶餘) 행군총관(行軍摠管)으로 삼아 위구르(회흘, 回紇) 등 여러 부의 병력을 거느리고 평양(平壤)으로 나아가게 하였다.
여름 4월에 임아상(任雅相)으로 패강도(浿江道) 행군총관(行軍㧾管)을, 계필하력(契苾何力)으로 요동도(遼東) 행군총관(行軍㧾管)을, 소정방으로 평양도(平壤道) 행군총관(行軍㧾管)을 삼아, 소사업(蕭嗣業) 및 여러 오랑캐 병력과 함께 모두 35군이 바다와 육지로 길을 나누어 나란히 전진하게 하였다. 황제가 스스로 대군을 거느리려고 하자, 울주자사(蔚州刺史) 이군구(李君球)가 건의하여 말하기를 “고구려는 작은 나라인데 어찌 중국을 기울어뜨릴 일이 있겠습니까? 만약 고구려를 멸망시키면 반드시 병력을 내어 지켜야 합니다. 적게 내면 위엄이 떨쳐지지 않고, 많이 내면 사람들이 불안해 할 것이니, 이는 천하가 나라를 지키러 옮겨 다니는 일로 피로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신이 생각하건대 정벌하는 것이 정벌하지 않는 것만 같지 못하고, 멸망시키는 것이 멸망시키지 않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하였다. 또한 마침 무후(武后)도 시정해주기를 요청하였으므로 황제가 그제야 중지하였다.

여름 5월에 왕이 장군 뇌음신(惱音信)을 보내 말갈(靺鞨)의 무리를 거느리고 신라의 북한산성을 포위하여 열흘이나 풀어주지 않았으므로, 신라는 식량길이 끊겨 성 안에서 매우 위태롭게 여겼다. 갑자기 큰 별이 우리 진영에 떨어지고, 또 천둥이 치고 비가 오고 벼락이 치니 뇌음신(惱音信) 등이 의심하고 놀라서 뒤로 물러났다.

가을 8월에 소정방(蘇定方)이 아군을 패강(浿江)에서 격파하고 마읍산(馬邑山)을 빼앗고 드디어 평양성(平壤城)을 포위하였다.

9월에 개소문(蓋穌文)이 그 아들 남생(男生)을 보내 정예 병력 수만으로 압록강을 지키니 여러 군대가 건너 올 수 없었다. 계필하력(契苾何力)이 도착하였을 때 얼음이 크게 얼었으므로 하력(何力)이 무리를 이끌고 얼음을 타고 물을 건너 북을 치고 소리 지르며 진격하니 아군이 무너져 달아났다. 하력(何力)이 수십 리를 추격하여 3만인을 죽이니 나머지 무리가 모두 항복하고 남생(男生)은 겨우 몸을 피하였다. 마침 군사를 돌리라는 조서가 있어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