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는 이야기/삼국사기

제25권(卷第二十五) 백제본기(百濟本紀) 개로왕(蓋鹵王)

7390882@hanmail.net 2020. 3. 11. 11:29

개로왕(蓋鹵王)


개로왕(蓋鹵王)의 이름은 경사(慶司)이니 비유왕(毗有王)의 맏아들이다. 혹은 근개루(近蓋婁)라고도 한다. 비유왕(毗有王)이 재위 29년에 사망하자 왕위를 이었다.

14년 겨울 10월 초하루 계유일에 일식이 있었다.

15년 가을 8월에 왕이 장수를 파견하여 고구려의 남쪽 변경을 침공하였다.

겨울 10월에 쌍현성(雙峴城)을 수축하고, 청목령(青木嶺)에 큰 목책을 설치하고, 북한산성(漢山城)의 병졸들을 나누어 그곳을 수비하게 하였다.

18년, (魏)나라에 사신을 보내 예방하고 왕이 다음과 같은 표문을 올렸다. “제가 동쪽 끝에 나라를 세웠으나, 이리와 승냥이 같은 고구려가 길을 막고 있으니, 비록 대대로 중국의 교화를 받았으나 번병(藩屛) 신하의 도리를 다할 수 없었습니다. 멀리 천자의 궁궐을 바라보면서 달려가고 싶은 생각은 끝이 없으나, 북쪽의 서늘한 바람으로 말미암아 대답을 들을 수 없었습니다. 생각하건대 폐하께서는 천명과 조화를 이루고 있으니 존경하는 심정을 이루 다 말할 수 없습니다. 삼가 본국의 관군장군(冠軍將軍) 부마도위(駙馬都尉) 불사후(弗斯侯) 장사(長史) 여례(餘禮)와 용양장군(龍驤將軍) 대방태수(帶方太守) 사마(司馬) 장무(張茂) 등을 보내어 험한 파도에 배를 띄워 아득한 나루를 찾아, 목숨을 자연의 운명에 맡기면서 제 정성의 만분의 일이라도 보내고자 하옵니다. 바라건대 천지신명이 감동하고 역대 황제의 신령이 크게 보호하여, 이들이 폐하의 거처에 도달하여 저의 뜻을 전하게 할 수 있다면, 아침에 듣고 저녁에 죽는다 하더라도 길이 여한이 없을 것입니다.” 표문에서 또한 말했다. “저와 고구려(髙句麗)는 조상이 모두 부여(扶餘) 출신이므로 선조 시대에는 고구려(髙句麗)가 옛 정을 굳건히 존중하였는데, 그의 조상 (釗, 고국원왕)가 경솔하게 우호 관계를 깨뜨리고 직접 군사를 거느려 우리 국경을 침범하여 왔습니다. 우리 조상 (須, 근수구왕)가 군사를 정비하여 번개 같이 달려가 기회를 타서 공격하니 잠시 싸우다가 (釗)의 머리를 베어 효시하였습니다. 이로부터 감히 남쪽을 돌아보지 못하다가 풍씨(馮氏)의 운수가 다하여, 남은 사람들이 고구려(髙句麗)로 도망해 온 이후로 추악한 무리가 차츰 세력을 쌓아 갔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결국 우리를 무시하고 침략하게 되었습니다. 원한을 맺고 전화(戰禍)가 이어진지 30여 년이 되었으니, 재정은 탕진되고 힘은 고갈되어 나라가 점점 쇠약해졌습니다. 만일 폐하의 인자한 생각이 먼 곳까지 빠짐없이 미친다면, 속히 장수를 보내 우리 나라를 구해 주소서. 그렇게 해준다면 저의 딸을 보내 후궁을 청소하게 하고, 자식과 아우를 보내 외양간에서 말을 기르게 하겠으며, 한 치의 땅, 한 명의 백성이라도 감히 저의 소유로 하지 않겠습니다.” 표문에서는 또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금 (璉)은 죄를 지어 나라가 스스로 남에게 잡아 먹히게 되었고, 대신과 호족들을 살육하기를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그들의 죄악은 넘쳐나서 백성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있으니, 지금이야말로 그들이 멸망할 시기로서 폐하의 힘을 빌릴 때입니다. 또한 풍족(馮族)의 군사와 군마는 집에서 키우는 새나 가축이 주인을 따르는 것 같은 심정을 가지고 있고, 낙랑(樂浪)의 여러 군은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하니, 황제의 위엄이 한 번 움직여 토벌을 행한다면 전투가 벌어질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저는 비록 명민하지는 않으나 힘을 다하여 우리 군사를 거느리고 위풍을 받들어 호응할 것입니다. 또한 고구려(髙句麗)는 의롭지 못하여 반역하고 간계를 꾸미는 일이 많으니, 겉으로는 외효(隈囂)가 스스로 자신을 변방의 나라라고 낮추어 쓰던 말버릇을 본받으면서도, 속으로는 흉악한 화란과 행동을 꿈꾸면서, 남쪽으로는 유씨(劉氏)와 내통하기도 하고, 북쪽으로는 연연(蠕蠕)과 맹약을 맺어 강하게 결탁하기도 함으로써 폐하의 정책을 배반하려 하고 있습니다. 옛날 요(堯) 임금은 지극한 성인이었으나 단수(丹水)에서 전투를 하여 묘만(苗蠻)에 벌을 주었으며, 맹상군(孟嘗君)은 어질다고 소문이 났었으나 길가에서 남을 꾸짖기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작게 흐르는 물도 일찍 막아야 하는 것이니, 지금 만약 고구려(髙句麗)를 치지 않는다면 앞으로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지난 경진년 후에 우리 나라 서쪽 경계의 소석산(小石山) 북쪽 바다에서 10여 구의 시체를 보았고, 동시에 의복, 기물, 안장, 굴레 등을 얻었는데, 이를 살펴보니 고구려(髙句麗)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후에 들으니 이는 바로 황제의 사신이 우리 나라로 오다가 고구려(髙句麗)가 길을 막았기에 바다에 빠진 것이라 합니다. 비록 자세히는 알 수 없으나 매우 분하게 생각하였습니다. 옛날 (宋)나라신주(申舟)를 죽이니 초(楚)나라 장왕(莊王)이 맨발로 뛰어 나갔고, 새매가 풀어준 비둘기를 잡아 요리를 하니 신릉군(信陵君)이 식사를 하지 않았습니다. 적을 이기고 이름을 세우는 것은 대단히 아름답고 훌륭한 일입니다. 작은 변방도 오히려 만대의 신의를 생각하는데 하물며 폐하께서는 천지의 기를 모으고, 세력이 산과 바다를 기울일 수 있는데 어찌 고구려(髙句麗)와 같은 애숭이(小竪)로 하여금 황제의 길을 막게 합니까? 이제 북쪽 바다에서 얻었던 안장을 바쳐 증거로 삼고자 합니다.” 현조(顯祖)가 백제의 사신이 멀리 떨어진 곳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조공을 바쳤다하여 융숭하게 예우하고, 사신 소안(邵安)으로 하여금 그들을 데리고 백제로 가게 하였다. 이때 조칙을 내려 말했다. “글을 받고 아무 일 없이 지낸다는 말을 들으니 매우 기쁘다. 그대가 동쪽 한 구석, 오복(五服)의 밖에 있으면서 산과 바다를 멀리 여기지 않고 (魏)나라 조정에 정성을 바치니, 그 지극한 뜻을 가상히 여겨 가슴 속에 기억해 두리라. 내가 만대에 누릴 위업을 계승하여 사해에 군림하면서 모든 백성들을 다스리니, 이제 나라는 깨끗이 통일되고 8방에서 귀순하기 위하여 어린 아이를 업고 이 땅에 이르는 자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다. 평화로운 풍속과 성대한 군사는 여례 등이 직접 듣고 보았다. 그대는 고구려(髙句麗)불화하여 여러 번 침범을 당하였지만 만일 정의를 따르고 어진 마음으로 방어할 수 있다면 원수에 대하여 무엇을 걱정하겠는가? 이전에 사신을 파견하여 바다를 건너 국경 밖의 먼 나라를 위무하게 하였으나, 그 후 여러 해가 되도록 돌아오지 않으니 그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또는 그곳에 도착했는지 도착하지 못했는지를 알 수가 없었다. 그대가 보낸 안장을 예전 것과 비교하여 보니 중국의 산물이 아니었다. 의심되는 일을 사실로 단정하는 과오를 범할 수는 없는 일이다. 고구려를 침공할 계획은 별지에 상세히 밝힐 것이다.” 이 조서에서 이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게 되었도다. 즉, 고구려(髙句麗)는 국토의 지세가 험하다는 사실을 믿고 그대의 국토를 침범하였으니, 이는 자기 선대 임금의 오랜 원한을 갚으려고 백성들을 편안케 하는 큰 덕을 버린 것이다. 전쟁이 여러 해에 걸쳐 이어지니 변경을 단속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리하여 사신은 신포서(申包胥)의 정성을 겸하게 되고 나라는 (楚), (越)과 같이 위급하게 되었구나. 이제 마땅히 정의를 펴고 약자를 구하기 위하여 기회를 보아 번개처럼 공격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고구려(髙句麗)는 선대로부터 번방의 신하로 자처하며 오랫동안 조공을 바쳐왔다. 그들 스스로는 비록 이전부터 잘못이 있었으나, 나에게는 명령을 위반한 죄를 지은 일이 없다. 그대가 처음으로 사신을 보내와 그들을 곧 토벌하기를 요청하였으나, 사리를 검토해 보아도 토벌의 이유가 또한 충분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지난해에 예() 등을 평양(平壤)에 보내 고구려(髙句麗)의 상황을 조사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고구려(髙句麗)가 여러 번 주청하고 그 말이 사리에 모두 맞으니 우리 사신은 그들의 요청을 막을 수 없었고, 법관은 그들에게 죄명을 줄 만하지 못했던 바, 그들이 말하는 바를 들어 주고 () 등을 돌아오게 하였다. 만약 고구려(髙句麗)가 이제 다시 명령을 어긴다면, 그들의 과오가 더욱 드러날 것이므로 뒷날 아무리 변명을 하더라도 죄를 피할 길이 없을 것이니, 그렇게 된 연후에는 군사를 일으켜 그들을 토벌하더라도 이치에 합당할 것이다. 모든 오랑캐 나라들은 대대로 바다 밖에 살면서, 왕도가 창성하면 번방 신하로서의 예절을 다하고, 은혜가 중단되면 자기의 영토를 지켜 왔다. 따라서 중국과 예속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예전의 법전에도 기록되어 있으며, 호시(楛矢)를 바치는 일은 세시에 그쳤다. 그대가 강약에 대한 형세를 말하였으며 지난 시대의 사실들을 모두 열거하였지만, 풍속이 다르고 사정이 변하여 무엇을 주려 하여도 나의 생각과 맞지 않는다. 우리의 너그러운 규범과 관대한 정책은 아직 그대로 남아 있다. 이제 중국은 통일 평정되어 나라 안에 근심이 없다. 이에 따라 매번 동쪽 끝까지 위엄을 떨치고 국경 밖에 깃발을 휘날려 먼 나라의 굶주리는 백성을 구원하며, 먼 지방까지 황제의 위풍을 보이고 싶었다. 그러나 사실은 고구려가 그때마다 진정을 토로하였기 때문에 미처 토벌을 도모하지 못했던 것이다. 지금 그들이 나의 조칙에 순종하지 않는다면, 그대의 계책이 나의 뜻과 맞으니 큰 군사가 토벌의 길을 떠나는 것도 장차 멀다고는 할 수 없다. 그대는 미리 군사를 정돈하여 함께 군사를 일으킬 수 있도록 준비할 것이며, 때에 맞추어 사신을 보내 그들의 실정을 즉시 알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우리 군사가 출동하는 날, 그대가 향도의 선두가 된다면 승리한 후에는 역시 가장 큰 공로로 상을 받게 될 것이니, 이 또한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그대가 바친 포백과 해산물은 비록 모두 도착하지는 않았으나, 그대의 지극한 성의는 잘 알겠도다. 이제 별지와 같이 내가 여러 가지 물품을 보내노라.” 또한 고구려(髙句麗)(璉)에게 조서를 보내 (安) 등을 백제로 보호하여 보내도록 하였다. (安) 등이 고구려(髙句麗)에 이르자 (璉)이 예전에 여경(餘慶)과 원수를 진 일이 있다 하여, 그들을 동쪽으로 통과하지 못하게 하므로 (安) 등이 모두 돌아가니, (魏)나라에서는 곧 고구려(髙句麗) 왕에게 조서를 내려 엄하게 꾸짖었다. 그 후에 (安) 등으로 하여금 동래(東萊)를 출발하여 바다를 건너가서, 여경(餘慶)에게 조서를 주어 그의 정성과 절조를 표창하게 하였다. 그러나 (安) 등이 바닷가에 이르자 바람을 만나 표류하다가 끝내 백제에 도달하지 못하고 돌아갔다. 왕은 고구려(髙句麗)가 자주 변경을 침범한다 하여 (魏)나라에 표문을 올려 군사를 요청하였으나, (魏)나라에서는 듣지 않았다. 왕이 이를 원망하여 마침내 조공을 중단하였다.

21년 가을 9월에 고구려 왕 거련(巨璉)이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와서 수도 한성(漢城)을 포위했다. 왕이 싸울 수가 없어 성문을 닫고 있었다. 고구려 사람들이 군사를 네 방면으로 나누어 협공하고, 또한 바람을 이용해서 불을 질러 성문을 태웠다. 백성들 중에는 두려워하여 성 밖으로 나가 항복하려는 자들도 있었다. 상황이 어렵게 되자 왕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기병 수십 명을 거느리고 성문을 나가 서쪽으로 도주하려 하였으나 고구려 군사가 추격하여 왕을 죽였다. 이보다 앞서 고구려 장수왕(長壽王)이 백제를 치기 위하여, 백제에 가서 첩자 노릇을 할 만한 자를 구하였다. 이때 중 도림(道琳)이 이에 응하여 말했다. “소승이 원래 도는 알지 못하지만 나라의 은혜에 보답코자 합니다. 원컨대 대왕께서는 저를 어리석은 자로 여기지 마시고 일을 시켜 주신다면 왕명을 욕되게 하지 않을 것을 기약합니다.” 왕이 기뻐하여 비밀리에 그를 보내 백제를 속이도록 하였다. 이에 도림(道琳)은 거짓으로 죄를 지어 도망하는 체하고 백제로 왔다.

당시의 백제 왕 근개루(近蓋婁)는 장기와 바둑(博奕)을 좋아하였다. 도림(道琳)이 대궐 문에 이르러 “제가 어려서부터 바둑을 배워 상당한 묘수의 경지를 알고 있으니, 왕께 들려 드리고자 합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그를 불러들여 대국을 하여 보니 과연 국수였다. 왕은 마침내 그를 상객으로 대우하고 매우 친하게 여겨 서로 늦게 만난 것을 한탄하였다. 도림(道琳)이 하루는 왕을 모시고 앉아서 말했다. “저는 다른 나라 사람인데 왕께서 저를 멀리 여기시지 않고 많은 은혜를 베풀어 주셨으나, 다만 한 가지 재주로 보답했을 뿐이고, 아직 털끝만한 이익도 드린 적이 없습니다. 이제 한 말씀 올리려 하오나 왕의 뜻이 어떠한지 알 수 없습니다.” 왕이 말했다. “말해 보라. 만일 나라에 이롭다면 이는 선생에게서 바라는 것이로다.” 도림(道琳)이 말했다. “대왕의 나라는 사방이 모두 산, 언덕, 강, 바다이니 이는 하늘이 만든 요새이지 사람의 힘으로 된 지형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사방의 이웃 나라들이 감히 엿볼 마음을 갖지 못하고 다만 받들어 섬기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왕께서는 마땅히 숭고한 기세와 부유한 치적으로 남들을 놀라게 해야 할 것인데, 성곽은 수축되지 않았고 궁실은 수리되지 않았습니다. 또한 선왕의 해골은 들판에 가매장되어 있으며, 백성의 가옥은 자주 강물에 허물어지니, 이는 대왕이 취할 바가 아니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왕이 말했다. “좋다! 내가 그리 하겠다.” 이에 왕은 백성들을 모조리 징발하여, 흙을 쪄서 성을 쌓고, 그 안에는 궁실, 누각(樓閣), 대사(臺榭)를 지으니 웅장하고 화려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또한 욱리하(郁里河)에서 큰 돌을 캐다가 관(槨)을 만들어 아버지의 해골을 장사하고, 사성(蛇城) 동쪽으로부터 숭산(崇山) 북쪽까지 강을 따라 둑을 쌓았다. 이로 말미암아 창고가 텅 비고 백성들이 곤궁하여져서 나라는 누란의 위기를 맞게 되었다.
이에 도림(道琳)이 도망해 돌아와서 왕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였다. 장수왕(長壽王)이 기뻐하며 백제를 치기 위하여 장수들에게 군사를 나누어 주었다. 근개루(近蓋婁)가 이 말을 듣고 아들 문주(文周)에게 말했다. “내가 어리석고 총명하지 못하여, 간사한 사람의 말을 믿다가 이렇게 되었다. 백성들은 쇠잔하고 군대는 약하니, 비록 위급한 일을 당하여도 누가 기꺼이 나를 위하여 힘써 싸우려 하겠는가? 나는 당연히 나라를 위하여 죽어야 하지만 네가 여기에서 함께 죽는 것은 유익할 것이 없으니, 난리를 피하여 있다가 나라의 왕통을 잇도록 하라.” 문주(文周)가 곧 목협만치(木劦滿致)조미걸취(祖彌桀取)를 데리고 남쪽으로 떠났다. 목협(木劦), 조미(祖彌)모두 복성(複姓)인데,《수서(隋書)》에서는 목협(木劦)을 두 개의 성(二姓)으로 보았으니 어느 것이 옳은지 알 수 없다. 이때 고구려의 대로(對盧) 제우(齊于), 재증걸루(再曾桀婁), 고이만년(古尒萬年)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북쪽 성을 공격한 지 7일 만에 함락시키고, 남쪽 성으로 옮겨 공격하자 성안이 위험에 빠지고 왕은 도망하여 나갔다. 재증(再曾), 고이(古尒)는 모두  복성(複姓)이다. 고구려 장수 걸루(桀婁) 등이 왕을 보고 말에서 내려 절을 하고, 왕의 낯을 향하여 세 번 침을 뱉고서 죄목을 따진 다음 아차성(阿且城) 밑으로 묶어 보내 죽이게 하였다. 걸루(桀婁)만년(萬年)은 원래 백제 사람으로서 죄를 짓고 고구려로 도망했었다.
논하여 말한다. (楚)나라 명왕(明王)도망하였을 때 운공(隕公) (辛)의 동생 (懷)가 왕을 시해하려 하며 말하였다.평왕(平王)이 내 아버지를 죽였으므로 내가 그 아들을 죽이는 것이 또한 옳지 않습니까?” (辛)이 말하였다. “임금이 신하를 토죄(討罪)하는 데 누가 감히 원수로 삼겠는가? 임금의 명령은 하늘같은 것이니, 하늘의 명령으로 죽었다면 장차 누구를 원수라 할 것인가? 걸루(桀婁) 등은 스스로 죄를 지었기 때문에 나라에 용납되지 못하였는데도, 적병을 인도하여 전에 모시던 임금을 죽였으니 그 의롭지 못함이 심하다. 어떤 사람은 “그러면 오자서(伍子胥)(楚)나라 수도 (郢)에 들어가서, 평왕(平王)의 시체에 채찍질한 것은 무엇이라 말할 것인가?”라고 말할 것이다. 이에 대해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양자법언(陽子法言)에는 이를 평하여, ‘덕(德)에 기반을 둔 행동이 아니다’라고 말하였다. 이른바 덕(德)이란 ‘인(仁)’과 ‘의(義)’가 있을 뿐이니, 오자서(伍子胥)의 잔인함이 운공(隕公)의 어짊만 같지 못하다.” 하였다. 이 설로 논하자며, 걸루(桀婁) 등이 의롭지 못하다는 것이 명백히 드러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