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권(券第三) 신라본기(新羅本紀) 실성(實聖) 이사금(尼師今)
실성(實聖) 이사금(尼師今)
실성이사금(實聖尼師今)048 신라 제18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402~417년이다. 《삼국유사》 권1, 왕력에는 실주왕(實主王)·보금(寶金)이라고도 표기되어 있다. 그는 모계(母系)가 석씨(昔氏)였고 혈연상 나물왕 직계가 아니어서 이들과 정치적으로 대립하였다.닫기이 왕위에 올랐다. 알지(閼智)의 후손으로 이찬(伊湌) 049 신라 경위(京位) 17관등 중 2위이다. 《삼국사기》 권38, 잡지7, 직관(職官) 상에 따르면, 이척찬(伊尺湌)이라고도 했다.닫기대서지(大西知)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이리부인(伊利夫人) 또는 기리부인(企利夫人)으로 아간(阿干) 석등보(昔登保)051 阿干은 신라의 제6관등인 阿湌의 다른 표기이다. 석등보에 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으나, 《삼국유사》 王曆篇에서는 아간 昔登保를 《昔氏登也阿干》 이라 하였다.닫기의 딸이다. 2 《삼국유사》 권1, 왕력에는 실성왕의 어머니를 아간(阿干) 석등야(昔登也)의 딸인 예생부인(禮生夫人)이라고 하였다.닫기왕비는 미추왕(味鄒王)의 딸이다. 053 《삼국유사》 권1, 왕력에는 실성왕의 왕비의 이름을 아류부인(阿留夫人)으로 기록하였다.닫기실성(實聖) 신라 제18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402~417년이다. 《삼국유사》 권1, 왕력에는 실주왕(實主王)·보금(寶金)이라고도 표기되어 있다. 그는 모계(母系)가 석씨(昔氏)였고 혈연상 나물왕 직계가 아니어서 이들과 정치적으로 대립하였다.닫기은 키가 7척(尺) 5촌(寸)이고 두뇌가 명철하고 사리에 통달해서 멀리 내다보는 식견이 있었다. 나물(奈勿)054 신라 제17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356~402년이다. 미추왕에 이어 김씨로는 두 번째로 왕위에 올랐는데, 나물왕 이후 왕위가 김씨로 세습된다. 신라(新羅)라는 국호를 가지고 중국에 사신을 파견하는 등 나물왕대는 신라사에서 비약적인 발전기로 평가받고 있다. 그의 호칭은 《삼국유사》 권1, 기이2, 나물왕(奈勿王) 김제상(金堤上)에도 ‘나밀(那密)’이 별칭으로 전해지며, 비로암진공대사비에는 ‘나물(��勿)’, 《태평어람(太平御覽)》 권781, 사이부(四夷部) 동이신라전(東夷新羅傳)에는 ‘루한(樓寒)’으로 되어 있다. 이로써 볼 때 ‘奈’의 음가가 ‘나’와 ‘내’의 두 가지이지만 신라인들은 ‘나물’왕으로 불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왕호로서의 이사금(尼師今)도 《삼국유사》 권1, 왕력에는 나물대부터 ‘마립간(麻立干)’을 칭한 것으로 되어 있어 《삼국사기》와 차이가 난다.닫기이 죽고 그 아들이 어려서 나라 사람들이 실성(實聖)을 세워 왕위를 잇도록 하였다.
원년(402) 3월에 왜국(倭國)과 우호를 통하고 나물왕(奈勿王)056 신라 제17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356~402년이다. 미추왕에 이어 김씨로는 두 번째로 왕위에 올랐는데, 나물왕 이후 왕위가 김씨로 세습된다. 신라(新羅)라는 국호를 가지고 중국에 사신을 파견하는 등 나물왕대는 신라사에서 비약적인 발전기로 평가받고 있다. 그의 호칭은 《삼국유사》 권1, 기이2, 나물왕(奈勿王) 김제상(金堤上)에도 ‘나밀(那密)’이 별칭으로 전해지며, 비로암진공대사비에는 ‘나물(��勿)’, 《태평어람(太平御覽)》 권781, 사이부(四夷部) 동이신라전(東夷新羅傳)에는 ‘루한(樓寒)’으로 되어 있다. 이로써 볼 때 ‘奈’의 음가가 ‘나’와 ‘내’의 두 가지이지만 신라인들은 ‘나물’왕으로 불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왕호로서의 이사금(尼師今)도 《삼국유사》 권1, 왕력에는 나물대부터 ‘마립간(麻立干)’을 칭한 것으로 되어 있어 《삼국사기》와 차이가 난다.닫기의 아들 미사흔(未斯欣)057 《삼국유사》 권1, 왕력에는 각간(角干) 미질희(未叱希)·미흔(未欣)이라 했고, 《삼국유사》, 권1, 기이2, 나물왕 김제상에는 미해(美海)·미토희(未吐喜)로 표기되어 있다. 한편 《일본서기(日本書紀)》 권9, 신공황후(神功皇后) 섭정전기(攝政前紀) 9년 겨울 10월조에는 ‘미질기지(微叱己知)’, 섭정 5년조에는 ‘미질허지(微叱許智)’로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닫기을 볼모로 삼았다.
2년(403) 봄 정월에 미사품(未斯品)059 실성왕 2년(403)에 서불한이 되어 국정을 맡았다가 실성왕 7년(408)에 실성왕이 對馬島를 정벌하려고 할 때 미사품이 이를 만류하여 중지하게 했다는 사실 외에는 알려진 바가 없다.닫기을 서불한(舒弗邯)060 신라 경위(京位) 17관등 중 1위인 이벌찬(伊伐湌)의 별칭이다. 《삼국사기》 권38, 잡지7, 직관(職官) 상을 살펴보면 이외에 이벌간(伊罰干), 우벌찬(于伐湌), 각간(角干), 각찬(角餐), 서발한(舒發翰)으로 불리었다.닫기으로 삼아 군무와 국정에 관한 일을 맡겼다.
가을 7월에 백제가 변경(邊)에 침입하였다.
3년(404) 봄 2월에 몸소 시조묘(始祖廟)063 《삼국사기》 권32, 잡지1, 제사(祭祀)를 참고하면, 시조묘는 박혁거세아로(阿老)최광식, 《고대한국의 국가와 제사》, 한길사, 1994닫기에 배알하였다.
4년(405) 여름 4월에 왜병(倭兵)이 와서 명활성(明活城)064 《삼국사기》 권34, 잡지3, 지리1에 “혁거세 21년(서기전 37)에 궁성을 쌓아 금성(金城)이라고 했고, 파사왕 22년(101)에 금성의 동남쪽에 성을 쌓고 월성(月城) 혹은 재성(在城)이라고 했는데 둘레가 1,023보(步)였다. 신월성(新月城) 북쪽에 만월성(滿月城)이 있으니 둘레가 1,838보였고, 신월성 동쪽에 명활성(明活城)이 있으니 둘레가 1,906보였으며, 또한 신월성 남쪽에 남산성(南山城)이 있으니 둘레가 2,804보였다. 시조 이래로 금성에 거처하다가, 후세에 이르러 두 월성에 많이 거처하였다”고 되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1, 경주부 고적에는 명활성이 월성의 동쪽에 있으며, 돌로 쌓았고 둘레가 7,818척이라고 되어 있다. 한편 1988년 명활산성 안에서 551년 경 산성의 축조와 관련된 역역동원(力役動員)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 명활산성작성비(明活山城作城婢)가 발견되었다. 구체적인 내용은 「경주 명활산성비」, 《역주 한국고대금석문》 제2권(신라1·가야편), 한국고대사회연구소 편,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1992, 41~49쪽 참조.닫기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왕이 기병을 이끌고 독산(獨山)065 《동경잡기(東京雜記)》 권1, 산천(山川)에 따르면, 독산은 향교산(鄕校山)이라고도 하는 데 신광현 동쪽 2리의 벌판 가운데 우뚝 솟아 있다고 한다. 그 위에 토성이 두 겹으로 있고 안에 우물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독산이 왜구의 침입 루트상에 있는 점을 감안하면 이 기록대로 지금의 경북 포항시 신광면에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닫기의 남쪽 길목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두 번 싸워 그들을 격파하여 3백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5년(406) 가을 7월에 나라 서쪽에 누리(蝗)가 곡식을 해쳤다.
겨울 10월에 서울(경도, 京都)에 지진(地震)이 일어났다.
11월에 얼음이 얼지 않았다.
6년(407) 봄 3월에 왜인(倭人)066 신라본기에 나오는 왜인(倭人) 및 왜군(倭軍)의 실체에 대해서 일률적으로 말하기는 어렵겠지만, 왜인의 침략은 주로 식량과 사람의 약탈을 위해 게릴라식의 전술을 구사한 해적 행위였다(旗田巍, 《三國史記 新羅本紀にあらわれた‘倭’》, 《日本文化と朝鮮》 2, 朝鮮文化社 編, 1975 | 김기섭 역,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보이는 ‘왜’」, 《고대 한일관계사의 이해-왜-》, 이론과 실천, 1994, 109~118쪽 | 이종욱, 「광개토왕릉비와 《삼국사기》에 보이는 ‘왜병’의 정체」, 《한국사 시민강좌》 11, 일조각, 1992연민수, 「5세기 이전의 신라의 대외관계」, 《고대한일관계사》, 혜안, 1998닫기이 동쪽 변경(邊)을 침입하였다.
여름 6월에 또 남쪽 변경(邊)을 침입하여 1백 명을 노략질해 갔다.
7년(408) 봄 2월에 왕이 왜인(倭人)067 신라본기에 나오는 왜인(倭人) 및 왜군(倭軍)의 실체에 대해서 일률적으로 말하기는 어렵겠지만, 왜인의 침략은 주로 식량과 사람의 약탈을 위해 게릴라식의 전술을 구사한 해적 행위였다(旗田巍, 《三國史記 新羅本紀にあらわれた‘倭’》, 《日本文化と朝鮮》 2, 朝鮮文化社 編, 1975 | 김기섭 역,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보이는 ‘왜’」, 《고대 한일관계사의 이해-왜-》, 이론과 실천, 1994, 109~118쪽 | 이종욱, 「광개토왕릉비와 《삼국사기》에 보이는 ‘왜병’의 정체」, 《한국사 시민강좌》 11, 일조각, 1992, 44~66쪽). 왜(倭)의 실체에 대한 자세한 분석은 연민수, 「5세기 이전의 신라의 대외관계」, 《고대한일관계사》, 혜안, 1998, 340~370쪽 참조.닫기이 대마도(對馬島)068 한반도와 일본의 九州 사이에 있는 섬으로, 행정구역상으로는 일본 長崎縣에 속해 있고 주로 砂岩으로 된 완만한 산지로 구성되었다. 이곳은 신라를 자주 침범하던 倭寇들의 소굴이었으므로 실성왕 7년(408)에 정벌하려고 하였으나 미사품의 만류로 그만두었다.닫기에 군영을 두고 무기와 군량을 쌓아 두어 우리를 습격하려고 한다는 말을 듣고서, 그들이 일어나기 전에 우리가 먼저 정예 군사를 뽑아 적의 군영을 격파하고자 하였다. 서불한(舒弗邯) 069 신라 경위(京位) 17관등 중 1위인 이벌찬(伊伐湌)의 별칭이다. 《삼국사기》 권38, 잡지7, 직관(職官) 상을 살펴보면 이외에 이벌간(伊罰干), 우벌찬(于伐湌), 각간(角干), 각찬(角餐), 서발한(舒發翰)으로 불리었다.닫기미사품(未斯品)이 말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