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권(券第三) 신라본기(新羅本紀) 자비(慈悲) 마립간(麻立干)
자비(慈悲) 마립간(麻立干)
자비마립간(慈悲麻立干)127 신라 제20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458~479년이다. 자비왕은 수도의 방·리(坊·里) 이름을 정하고, 소백산맥 일대에 축성 사업을 진행하여 대고구려 방어망을 구축하는 데 힘썼다.닫기이 왕위에 올랐다. 눌지왕(訥祇王)128 신라 제19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417~458년이다. 《삼국유사》 권1, 왕력에는 내지왕(內只王)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영일냉수리신라비(503년 건립)에 나오는 ‘내지왕(乃智王)’도 눌지왕을 지칭하는 것임이 유력하다. 눌지왕대부터 김씨 직계 장자(長子)가 왕위를 이어갔고, 고구려의 간섭을 배제함으로써 신라 국가 발전의 기틀을 다졌다.닫기의 큰아들이다. 어머니는 김씨(金氏)로서 실성왕(實聖王)의 딸이다.
2년(459) 봄 2월에 시조묘(始祖廟)130 《삼국사기》 권32, 잡지1, 제사(祭祀)를 참고하면, 시조묘는 박혁거세의 사당으로 1년에 4차례 제사지냈다. 남해왕 3년(6)에 처음 세웠는데, 그는 친누이 아로(阿老)로 하여금 시조묘 제사를 주관하게 하였다. 이후의 왕은 일반적으로 즉위 의례의 차원에서 시조묘에 몸소 제사를 지냈다. 시조묘에 제사를 지내 하늘의 자손이라는 의식을 강조함으로써 왕권을 강화할 수 있었다(최광식, 《고대한국의 국가와 제사》, 한길사, 1994, 165~174쪽). 시조묘는 ‘조묘(祖廟)’ ‘국조묘(國祖廟)’ ‘선조묘(先祖廟)’ ‘조고묘(祖考廟)’ 등으로도 표기되었다.닫기에 배알하였다.
여름 4월에 왜인(倭人)131 신라본기에 나오는 왜인(倭人) 및 왜군(倭軍)의 실체에 대해서 일률적으로 말하기는 어렵겠지만, 왜인의 침략은 주로 식량과 사람의 약탈을 위해 게릴라식의 전술을 구사한 해적 행위였다(旗田巍, 《三國史記 新羅本紀にあらわれた‘倭’》, 《日本文化と朝鮮》 2, 朝鮮文化社 編, 1975 | 김기섭 역,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보이는 ‘왜’」, 《고대 한일관계사의 이해-왜-》, 이론과 실천, 1994, 109~118쪽 | 이종욱, 「광개토왕릉비와 《삼국사기》에 보이는 ‘왜병’의 정체」, 《한국사 시민강좌》 11, 일조각, 1992, 44~66쪽). 왜(倭)의 실체에 대한 자세한 분석은 연민수, 「5세기 이전의 신라의 대외관계」, 《고대한일관계사》, 혜안, 1998, 340~370쪽 참조.닫기이 병선(兵船) 1백여 척으로 동쪽 변경을 습격하고 나아가 월성(月城)132 신라 왕성(王城)으로서 성의 형태가 초생달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삼국사기》 권34, 잡지3, 지리1에 “혁거세 21년(서기전 37)에 궁성을 쌓아 금성(金城)이라고 했고, 파사왕 22년(101)에 금성의 동남쪽에 성을 쌓고 월성(月城) 혹은 재성(在城)이라고 했는데 둘레가 1,023보(步)였다. 신월성(新月城) 북쪽에 만월성(滿月城)이 있으니 둘레가 1,838보였고, 신월성 동쪽에 명활성(明活城)이 있으니 둘레가 1,906보였으며, 또한 신월성 남쪽에 남산성(南山城)이 있으니 둘레가 2,804보였다. 시조 이래로 금성에 거처하다가, 후세에 이르러 두 월성에 많이 거처하였다”고 되어 있다. 월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현재 경주시 인왕동이라는 것에 대해 이견이 없다. 다만 파사왕대 건조된 월성은 경주시 북천(北川) 남안(南岸)의 성동동에 있었고, 인왕동의 반월성은 문무왕이 왕궁을 짓게 됨에 따라 탈해왕릉이 문무왕 20년(680)에 이장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남천우, 「인왕동 왕궁의 건조시기에 대하여」, 《역사학보》 123, 1989 | 《유물의 재발견》, 학고재, 1997, 72~75쪽). 월성에 대한 종합적인 이해는 김낙중, 「신라 월성의 성격과 변천」, 《한국상고사학보》 27, 1998 참조.닫기을 포위하였는데 사방에서 날아오는 화살과 돌이 비오는 것과 같았다. 왕성을 지키자 적들이 장차 물러가려고 하였고, 군사를 내어 공격하여 그들을 패배시켰다. 북쪽으로 추격하여 바다 어구에 이르니 적들 중에 물에 빠져 죽은 사람이 반이 넘었다.
4년(461) 봄 2월에 왕이 서불한(舒弗邯) 133 신라 경위(京位) 17관등 중 1위인 이벌찬(伊伐湌)의 별칭이다. 《삼국사기》 권38, 잡지7, 직관(職官) 상을 살펴보면 이외에 이벌간(伊罰干), 우벌찬(于伐湌), 각간(角干), 각찬(角餐), 서발한(舒發翰)으로 불리었다.닫기미사흔(未斯欣)34 《삼국유사》 권1, 왕력에는 각간(角干) 미질희(未叱希)·미흔(未欣)이라 했고, 《삼국유사》, 권1, 기이2, 나물왕 김제상에는 미해(美海)·미토희(未吐喜)로 표기되어 있다. 한편 《일본서기(日本書紀)》 권9, 신공황후(神功皇后) 섭정전기(攝政前紀) 9년 겨울 10월조에는 ‘미질기지(微叱己知)’, 섭정 5년조에는 ‘미질허지(微叱許智)’로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닫기의 딸을 왕비로 삼았다.
여름 4월에 용이 금성(金城)136 신라 시조 혁거세 때 쌓은 궁성(宮城)이다. 신라 상고기(上古期)에 월성(月城)과 함께 왕성으로 사용되다가 중고기 이후에 월성에 그 지위를 넘겨 주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1, 경주부, 고적에는 부의 동쪽 4리에 있는 토성(土城)으로 둘레가 2,407척이라고 되어 있다. 금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월성의 서북쪽 내지 알천[북천] 부근으로 보는 견해와(강종원, 「신라 왕경의 형성과정」, 《백제연구》 23, 1992, 220쪽 | 전덕재, 「이사금시기 신라의 성장과 6부」, 《신라문화》 21, 동국대 신라문화연구소, 2003, 176~178쪽), 박씨 세력의 활동 무대인 나정·알영정 근처, 즉 경주평야 남쪽 지금의 교동 일대로 비정한 연구가 있다(이종욱, 《신라상대왕위계승연구》, 영남대학교 출판부, 1980, 58~59쪽). 금성의 위치에 대한 연구사 검토는 전덕재, 《신라 왕경의 역사》, 새문사, 2009, 170~174쪽에 자세하며, 황보은숙, 「금성의 위치 비정」, 《신라문화》 34, 2009에서도 이를 종합적으로 다루고 있다.닫기의 우물에 나타났다.
가을 7월에 크게 사열(査閱)하였다.
8년(465) 여름 4월에 큰 물난리가 나서 산 17곳이 무너졌다.
5월에 사벌군(沙伐郡)에 누리(蝗)의 피해가 있었다.
10년(467) 봄에 담당 관청에 명해 전함(戰艦)을 수리하도록 했다.
가을 9월에 하늘이 붉어졌고 큰 별이 북쪽에서 동남쪽으로 흘러갔다.
11년(468) 봄에 고구려와 말갈142 신라사에서의 말갈은 정약용이 《여유당전서》 6, 지리집(地理集), 강역고(彊域考), 말갈전(靺鞨傳)에서 동예(東濊)로 본 이후 통설화되었다. 다만 백제본기와 신라본기의 말갈을 각각 영서·영동 지방에 세력기반을 둔 맥계(貊系) 말갈(靺鞨)과 예계(濊系) 말갈(靺鞨)로 나누어 이해하기도 한다(문안식, 《한국 고대사와 말갈》, 혜안, 2003, 15~198쪽). 한편 통일전쟁기 이전의 말갈은 동예를 신라 말 고려 초에 개서(改書)한 것이며, 통일전쟁기 이후의 말갈은 읍루-물길-말갈로 이어지는 집단으로 구분해 이해한 연구도 있다(노태돈,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말갈의 실체」, 《한반도와 만주의 역사 문화》, 이병근 외,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3, 281~319쪽).닫기이 북쪽 변경(邊)의 실직성(悉直城)143 실직에 있던 신라의 성이다. 《삼국사기》 권35, 지리2, 명주(溟州)에 따르면, 실질국(悉直國)은 파사왕 때 복속되었고, 지증왕 6년(505)에 주(州)로 삼아 이사부(異斯夫)를 군주(軍主)로 파견한 삼척군(三陟郡)이다. 지금의 강원도 삼척시이다.닫기을 습격하였다.
가을 9월에 하슬라(何瑟羅)145 지금의 강원도 강릉시 일대이다. 하서량(河西良)으로도 불렀다(《삼국사기》 권35, 지리2, 명주).닫기사람 중 15세 이상인 자를 징발해 이하(泥河)146 이하의 위치에 대한 기존 견해는 크게 남한강 상류설과 강릉 일대설로 나눌 수 있는데, 대관령 북쪽의 이현(泥峴)에서 발원하는 연곡천(連谷川)으로 추정된다.닫기에 성을 쌓았다. 이하(泥河)는 일명 이천(泥川)이라고도 하였다.
12년(469) 봄 정월에 서울(경도, 京都)의 방(坊)·리(里) 이름을 정했다.
여름 4월에 나라 서쪽에 큰 물난리가 나서 민가가 떠내려가고 무너졌다.
가을 7월에 왕이 물난리를 당한 주(州)·군(郡)을 다니며 위로하였다.
13년(470)에 삼년산성(三年山城)148 삼년산성의 위치는 충북 보은군으로 보는 데에 이견이 없다. 《삼국사기》 권34, 잡지3, 지리1, 상주(尙州)와 《신증동국여지승람》 권16, 보은현(報恩縣) 건치연혁 참조. 삼년산성은 신라가 소백산맥을 넘어 서북방으로 진출하는 데 있어 중요한 거점 성으로 기능하였다. 삼년산성의 발굴조사 개요는 성주탁, 「신라 삼년산성 연구」, 《백제성지연구》, 서경, 2002이 참고되며, 최근의 재조사 및 종합적 연구는 《삼년산성-기본자료 및 종합 보존·정비계획안-》, 보은군·충북대학교 중원문화연구소, 2001에 잘 정리 되어 있다닫기을 쌓았다. 삼년(三年)이라는 것은 공사를 시작한 지 3년 만에 완공하였기 때문에 그렇게 불렀다.
14년(471) 봄 2월에 모로성(芼老城)149 모로성의 위치는 경북 군위군 효령현에 비정한 연구가 있다(진전좌우길(津田左右吉), 「나제경계고」, 《조선역사지리》 上, 1913 : 아세아문화사 간, 1986, 218쪽 | 酒井改藏, 「三國史記の地名考」, 《朝鮮學報》 54, 조선학회(朝鮮學會), 1970, 40쪽). 하지만 음운상의 유사로만 이끌어낸 것이어서 따르기 어렵다.닫기을 쌓았다.
3월에 서울(경도, 京都)에 땅이 갈라졌는데(地裂), 가로 세로가 2장(丈)150 길이를 나타내는 단위로 1장은 10척(尺)과 같다. 1척은 시대에 따라 길이가 다른데, 한나라 때에는 약 23cm, 당나라 때에는 24.5cm였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이와 비슷했을 경우도 추정되며 고려시대 이후는 약 30cm 전후였다. 한편 1장은 일반적으로 사람의 키 정도 길이를 의미하기도 한다.닫기이었으며 탁한 물이 솟아올랐다.
겨울 10월에 전염병이 크게 돌았다.
가을 7월에 명활성(明活城)156 《삼국사기》 권34, 잡지3, 지리1에 “혁거세 21년(서기전 37)에 궁성을 쌓아 금성(金城)이라고 했고, 파사왕 22년(101)에 금성의 동남쪽에 성을 쌓고 월성(月城) 혹은 재성(在城)이라고 했는데 둘레가 1,023보(步)였다. 신월성(新月城) 북쪽에 만월성(滿月城)이 있으니 둘레가 1,838보였고, 신월성 동쪽에 명활성(明活城)이 있으니 둘레가 1,906보였으며, 또한 신월성 남쪽에 남산성(南山城)이 있으니 둘레가 2,804보였다. 시조 이래로 금성에 거처하다가, 후세에 이르러 두 월성에 많이 거처하였다”고 되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1, 경주부 고적에는 명활성이 월성의 동쪽에 있으며, 돌로 쌓았고 둘레가 7,818척이라고 되어 있다. 한편 1988년 명활산성 안에서 551년 경 산성의 축조와 관련된 역역동원(力役動員)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 명활산성작성비가 발견되었다. 구체적인 내용은 「경주 명활산성비」, 《역주 한국고대금석문》 제2권(신라1·가야편), 한국고대사회연구소 편,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1992, 41~49쪽 참조.닫기을 수리하였다.
17년(474)에 일모(一牟)157 《삼국사기》 권36, 잡지5, 지리3, 웅주(熊州)조에 “燕山郡 本百濟一牟山郡 景德王改名”이라 하였고, 《신증동국여지승람》 권15, 문의현(文義縣) 건치연혁에는 “本百濟一牟山郡 新羅改燕山郡 高麗屬淸州”라고 되어 있다. 곧 일모성의 위치는 지금의 충북 청원군 문의이다.닫기·사시(沙尸)158 사시성의 위치는 충남 홍성군 충북 옥천군으로 보는 견해가 있는데 확실하지는 않다. 전자를 대표하는 연구는 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89쪽이 있고, 후자를 대표하는 연구는 酒井改藏, 「三國史記の地名考」, 《朝鮮學報》 54, 조선학회(朝鮮學會), 1970, 40쪽과 양기석, 「신라의 청주지역 진출」, 《신라 서원소경 연구》, 서경, 2001, 17쪽이 있다.닫기·광석(廣石)159 광석성은 충북 영동군으로 위치 비정하는 경우가 있다(酒井改藏, 「三國史記の地名考」, 《朝鮮學報》 54, 조선학회(朝鮮學會), 1970, 40쪽). 하지만 근거가 빈약하다.닫기·답달(沓達)160 《삼국사기》 권34, 잡지3, 지리1, 상주(尙州)에 “化寧郡 本荅達匕郡(一云 沓達) 景德王改名”이라고 하였고,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8, 상주목 속현(屬縣)에 화령현(化寧縣)이 속해 있다. 화령은 상주시 화서면이므로 답달성의 위치는 경북 상주시 부근으로 추정된다.닫기·구례(仇禮)161 구례성의 위치는 충북 청산면(酒井改藏, 「三國史記の地名考」, 《朝鮮學報》 54, 조선학회(朝鮮學會), 1970, 40쪽), 또는 충북 옥천군으로 추정하기도 하지만(신형식, 《한국고대사의 신연구》, 일조각, 1984, 208쪽), 근거가 빈약하다.닫기·좌라(坐羅) 162 좌라성의 위치를 음운상의 비슷함을 근거로 충북 영동군 황간면으로 비정한 견해가 있지만(酒井改藏, 「三國史記の地名考」, 《朝鮮學報》 54, 조선학회(朝鮮學會), 1970, 40쪽), 확실하지는 않다.닫기등의 성을 쌓았다.
가을 7월에 고구려 왕 거련(巨連)163 고구려 제20대 장수왕(長壽王)으로 재위 기간은 413~491년이다. 그의 이름은 연(璉)이라고도 했다. 《삼국사기》 권18, 고구려본기6, 장수왕 즉위년 참조닫기이 몸소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를 공격하였다. 4 巨連은 고구려 장수왕의 이름으로 連을 ‘璉’으로도 적는다. 거련에 대해서는 《삼국사기》 권18 고구려본기 장수왕 즉위년조 참조. 한편 《삼국사기》 권18 고구려본기에서는 고구려가 백제를 침공한 때를 장수왕 63년(475) 9월의 일로 기록하고 있어 신라본기와 1년의 차이가 있다.닫기백제왕 경(慶)165 백제 제21대 개로왕(蓋鹵王)으로 재위 기간은 455~475년이다. 근개루(近蓋婁)라고도 했는데, 이름은 경사(慶司)이다. 《삼국사기》 권25, 백제본기3, 개로왕 즉위년 참조.닫기이 아들 문주(文周)를 보내 구원을 요청하였다. 왕이 군사를 내어 구해주려 했으나 미처 도착하기도 전에 백제가 이미 함락되었고, 경(慶)165 백제 제21대 개로왕(蓋鹵王)으로 재위 기간은 455~475년이다. 근개루(近蓋婁)라고도 했는데, 이름은 경사(慶司)이다. 《삼국사기》 권25, 백제본기3, 개로왕 즉위년 참조.닫기 역시 피살되었다.
18년(475) 봄 정월에 왕이 명활성(明活城)167 《삼국사기》 권34, 잡지3, 지리1에 “혁거세 21년(서기전 37)에 궁성을 쌓아 금성(金城)이라고 했고, 파사왕 22년(101)에 금성의 동남쪽에 성을 쌓고 월성(月城) 혹은 재성(在城)이라고 했는데 둘레가 1,023보(步)였다. 신월성(新月城) 북쪽에 만월성(滿月城)이 있으니 둘레가 1,838보였고, 신월성 동쪽에 명활성(明活城)이 있으니 둘레가 1,906보였으며, 또한 신월성 남쪽에 남산성(南山城)이 있으니 둘레가 2,804보였다. 시조 이래로 금성에 거처하다가, 후세에 이르러 두 월성에 많이 거처하였다”고 되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1, 경주부 고적에는 명활성이 월성의 동쪽에 있으며, 돌로 쌓았고 둘레가 7,818척이라고 되어 있다. 한편 1988년 명활산성 안에서 551년 경 산성의 축조와 관련된 역역동원(力役動員)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 명활산성작성비가 발견되었다. 구체적인 내용은 「경주 명활산성비」, 《역주 한국고대금석문》 제2권(신라1·가야편), 한국고대사회연구소 편,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1992, 41~49쪽 참조.닫기으로 옮겨 거주하였다.
19년(476) 여름 6월에 왜인(倭人)169 신라본기에 나오는 왜인(倭人) 및 왜군(倭軍)의 실체에 대해서 일률적으로 말하기는 어렵겠지만, 왜인의 침략은 주로 식량과 사람의 약탈을 위해 게릴라식의 전술을 구사한 해적 행위였다(旗田巍, 《三國史記 新羅本紀にあらわれた‘倭’》, 《日本文化と朝鮮》 2, 朝鮮文化社 編, 1975 | 김기섭 역,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보이는 ‘왜’」, 《고대 한일관계사의 이해-왜-》, 이론과 실천, 1994, 109~118쪽 | 이종욱, 「광개토왕릉비와 《삼국사기》에 보이는 ‘왜병’의 정체」, 《한국사 시민강좌》 11, 일조각, 1992, 44~66쪽). 왜(倭)의 실체에 대한 자세한 분석은 연민수, 「5세기 이전의 신라의 대외관계」, 《고대한일관계사》, 혜안, 1998, 340~370쪽 참조.닫기이 동쪽 변경(邊)에 침입하였다. 왕이 장군 덕지(德智)170 자비왕 6년(463)에 벌지와 함께 삽량성에서 왜병을 물리쳤고, 같은 왕 16년(473)에 우장군(右將軍)이 되었으며, 소지왕 17년(495)에도 고구려와의 전투에서 백제를 구원하고 승리를 이끌었다.닫기에게 명해 공격하여 물리치고 2백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20년(477) 여름 5월에 왜인(倭人)171 신라본기에 나오는 왜인(倭人) 및 왜군(倭軍)의 실체에 대해서 일률적으로 말하기는 어렵겠지만, 왜인의 침략은 주로 식량과 사람의 약탈을 위해 게릴라식의 전술을 구사한 해적 행위였다(旗田巍, 《三國史記 新羅本紀にあらわれた‘倭’》, 《日本文化と朝鮮》 2, 朝鮮文化社 編, 1975 | 김기섭 역,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보이는 ‘왜’」, 《고대 한일관계사의 이해-왜-》, 이론과 실천, 1994, 109~118쪽 | 이종욱, 「광개토왕릉비와 《삼국사기》에 보이는 ‘왜병’의 정체」, 《한국사 시민강좌》 11, 일조각, 1992, 44~66쪽). 왜(倭)의 실체에 대한 자세한 분석은 연민수, 「5세기 이전의 신라의 대외관계」, 《고대한일관계사》, 혜안, 1998, 340~370쪽 참조.닫기이 군사를 일으켜 다섯 방면의 길(오도, 五道)로 침입해 왔지만 마침내 성과없이 돌아갔다.
21년(478) 봄 2월 밤에 붉은 빛이 한 필의 표백한 명주를 편 것처럼 땅에서 하늘까지 뻗쳤다.
겨울 10월에 서울(경도, 京都)에 지진(地震)이 일어났다.
22년(479) 봄 2월 3일에 왕이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