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는 이야기/삼국사기

제44권(卷第四十四) 열전(列傳) 장보고(張保皐) 정년(鄭年)

7390882@hanmail.net 2020. 5. 2. 10:48

장보고(張保皐) 정년(鄭年)


장보고(張保皐) 신라본기에는 궁복(弓福)과 정년(鄭年) 혹은 정연(連)은 모두 신라 사람이다. 다만  고향과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알 수 없다.

모두 싸움을 잘하였는데, 정년(鄭年)은 또 바다 속에서 잠수하여 50리를 다녀도 숨이 막히지 않았다. 그 용맹과 씩씩함을 비교하면, 장보고(張保皐)가 조금 미치지 못하였다. 정년(鄭年)이 장보고(張保皐)를 형으로 불렀다. 보고(張保皐)는 나이로, 정년(鄭年)은 기예로 항상 서로 맞지 않아 서로 아래에 들지 않으려 하였다.

두 사람은 당(唐)나라에 가서 무령군소장(武寧軍小將)이 되어 말을 타고 창을 사용하는데, 대적할 자가 없었다.

후에 장보고(張保皐)가 귀국하여 대왕을 뵙고,
“중국(中國)을 두루 돌아보니, 우리 나라 사람들을 노비(奴婢로 삼고 있습니다. 바라건대, 청해(淸海)에 진영을 설치하여 도적들이 사람을 붙잡아 서쪽으로 데려가지 못하게 하십시오.”라고 아뢰었다. 청해(淸海)는 신라(新羅) 해로(海路)의 요충지로, 지금은 그곳을 완도(莞島)라 부른다.

왕이 장보고(張保皐)에게 만 명을 주었다. 이후 해상(海上)에서 우리 나라 사람을 파는 자가 없었다.

장보고(張保皐)가 이미 귀하게 되었을 때, 정년(鄭年)은 관직에서 떨어져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리며 사수(泗水)연수현(漣水縣)에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수비하는 장수 풍원규(馮元規)에게,
“내가 동으로 돌아가서 장보고(張保皐)에게 걸식하려고 한다.”고 말하였다. 풍원규(馮元規)가,
“그대와 장보고(張保皐)의 사이가 어떠한가? 어찌하여 가서 그 손에 죽으려 하는가?”라고 하였다.
정년(鄭年)은,
“굶주림과 추위로 죽는 것은 전쟁에서 깨끗하게 죽는 것만 같지 못하다. 하물며 고향에 가서 죽는 것이랴?”라고 말하였다.
마침내  떠나 장보고(張保皐)를 찾아 뵈었다. 그에게 술을 대접하여 극히 환대하였다.
술자리가 끝나기 전에 왕이 시해되어 나라가 어지럽고 임금의 자리가 비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장보고(張保皐)가 군사를 나누어 5천 명을 정년(鄭年)에게 주며, 정년(鄭年)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면서,
“그대가 아니면 환란을 평정할 수 없다.”고 말하였다. 정년(鄭年)이 왕경에 들어가 반역자를 죽이고, 왕을 세웠다.
왕이 장보고(張保皐)를 불러 재상으로 삼고, 정년(鄭年)을 대신 청해(清海)를 지키게 하였다. 이것은 신라(新羅)의 전기(傳記)와는 매우 많이 다르나, 두목(杜牧)이 전(傳)을 지었기 때문에 둘 다 남겨 둔다.
논하여 말한다. 두목(杜牧)이 다음과 같이 썼다.
“천보(天寶) 연간(742~755), 안록산(安祿山)의 난(亂)에 삭방절도사(朔方節度使) 안사순(安思順)이 안록산(安祿山)의 사촌동생이었기 때문에 사약(賜藥)을 마시고 죽었으므로 조서를 내려 곽분양(郭汾陽)으로 그를 대신하게 하였다. 열흘 후에 다시 이임회(李臨淮)에게 조서를 내려 부절(符節)을 지니고 삭방(朔方)의 병력을 반으로 나누어, 동쪽으로 (趙)·(魏) 지방에 나가게 하였다.
안사순(安思順) 때에는 곽분양(郭汾陽)이임회(李臨淮)가 모두 아문도장(牙門都將)으로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아, 비록 같은 상에서 음식을 먹더라도 항상 서로 흘겨보면서 한 마디의 말도 하지 않았다. 곧 곽분양(郭汾陽)안사순(安思順)을 대신하자, 이임회(李臨淮)는 도망하려 하였으나 계획을 단호히 행하지 못하였다. 이임회(李臨淮)에게 조서(詔書)를 내려 곽분양(郭汾陽)에게 병력을 절반 나누어 받아 동쪽을 토벌하게 하였다.
이임회(李臨淮)가 가서, ‘내 한 죽음은 달게 받겠으니, 처자는 살려 주시오.’라고 청하였다. 곽분양(郭汾陽)이 달려 내려가 손을 잡고 마루 위로 올라와 마주앉아, ‘지금 나라가 어지럽고 임금이 도성을 떠나 피란하였는데, 그대가 아니면 동쪽을 칠 수 없소. 어찌 사사로운 분(忿)을 품을 때이겠는가.’라고 말하였다. 곧 작별하게 되자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서로 충의(忠義)로 격려하였다. 마침내 큰 도둑을 평정한 것은 실로 두 사람의 힘이었다.
그 마음이 배반하지 않을 것을 알고 그 재능이 일을 맡길 만한 것을 안 후에, 마음을 의심하지 않고 군사를 나누어 줄 수 있는 것이다. 평생에 분한을 쌓아 그 마음을 알기가 어렵다. 분노하면 반드시 단점만 보이는 것이니, 그 재능을 아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 이 점에서 장보고(張保皐)곽분양(郭汾陽)의 어짊이 같다고 할 수 있다. 정년(鄭年)장보고(張保皐)에게 투탁할 때 반드시, ‘저는 귀하고 나는 천하니 내가 낮추면 마땅히 옛날의 원한으로 나를 죽이지 않을 것이다.’라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장보고(張保皐)가 과연 죽이지 않았으니, 사람에게 공통되는 인정이다. 이임회(李臨淮)가 곽분양(郭汾陽)에게 죽음을 청한 것 또한 사람의 상정(常情)이다.
보고(張保皐)가 정(鄭年)에게 일을 맡긴 것은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며, 정(鄭年)은 또한 주림과 추위로 감동하기 쉬웠다. 곽분양(郭汾陽)과 이임회(李臨淮)는 평생을 대립하였다. 이임회(李臨淮)의 명령은 천자에게서 나온 것으로 보고(張保皐)와 비교하면분양(郭汾陽)이 여유로웠다. 이것은 성현도 의심하여 망설이다가 이루거나 그르치는 경우이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착하고 의로운 마음(仁義)이 잡정(雜情)과 함께 섞이어 잡정(雜情)이 이기면 인의(仁義)가 없어지고, 인의(仁義)가 이기면 잡정(雜情)이 사그라진다. 저 두 사람은 인의(仁義)의 마음이 이미 이겼고, 또 그들의 자질이 밝았기 때문에 마침내 공(功)을 이룬 것이다.
세간에서는 주공(周公)·소공(召公)을 백대의 스승으로 일컫고 있으나, 주공(周公)이 어린아이를 보좌할 때에 소공(召公)은 그를 의심하였다. 주공(周公)의 거룩함과 소공(召公)의 어짊으로, 젊어서는 문왕(文王)을 섬기고 늙어서는 무왕(武王)을 도와 천하를 평정하였지만, 주공(周公)의 마음을 소공(召公) 또한 알지 못하였다. 진실로 인의(仁義)의 마음이 있다 하더라도, 자질이 밝지 않으면 비록 소공(召公)도 오히려 그러하거늘, 하물며 그 아래에 있는 사람이랴? 속담에,
‘나라에 한 사람만 있어도, 그 나라는 망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대체로 나라가 망하는 것은 사람이 없어서가 아니다. 그 망할 때를 당하여 어진 사람이 쓰여지지 않아서이다. 진실로 어진 사람을 쓴다면 한 사람으로 족할 것이다.”
송기(宋祁)가 썼다.
“아아! 원한으로써 서로 질투하지 않고 나라의 우환을 앞세운 것은 ()나라에는 기해(祁奚)가 있고, (唐)나라에는 곽분양(郭汾陽)과 장보고(張保皐)가 있다. 누가 동이(東夷)에 사람이 없다고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