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는 이야기/삼국사기

제5권(券第五) 신라본기(新羅本紀) 진덕왕(眞德王)

7390882@hanmail.net 2019. 11. 11. 18:34

진덕왕(眞德王)


진덕왕(眞德王)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승만(勝曼)이고, 진평왕(眞平王)의 친동생인 국반(國飯) 갈문왕(葛文王)의 딸이다. 또는 국분(國芬)이라고도 하였다. 어머니는 박씨(朴氏) 월명부인(月明夫人)이다. 승만(勝曼)은 생김새가 풍만하고 아름다웠으며, 키가 일곱 자였고 손을 내려뜨리면 무릎 아래까지 닿았다.

원년 정월 17일에 비담(毗曇)을 목을 베어 죽였는데, 연루되어 죽은 사람이 30명이었다.

2월에 이찬(伊湌) 알천(閼川)을 상대등(上大等)으로 삼고, 대아찬(大阿湌) 수승(守勝)우두주(牛頭州)의 군주(軍主)로 삼았다.

(唐)나라의 태종(太宗)이 사신을 보내서 부절(符節)을 가지고 앞 임금을 광록대부(光祿大夫)로 추증하고, 아울러 왕을 주국(柱國) 낙랑군왕(樂浪郡王)으로 책봉하였다.

가을 7월에 (唐)나라에 사신을 보내 은혜에 감사하였다.

연호를 태화(太和)로 바꾸었다.

8월에 혜성(彗星)이 남쪽에서 나타났고, 뭇 별들이 북쪽으로 흘러갔다.

겨울 10월에 백제의 군사가 무산(茂山)·감물(甘勿)·동잠(桐岑)의 세 성을 에워쌌으므로, 왕이 김유신(庾信)에게 보병과 기병 1만 명을 거느리고 가서 막게 하였다. 고전하여 기운이 다 빠졌는데, 유신(金庾信)의 부하 비령자(丕寧子)와 그의 아들 거진(擧眞)이 적진에 들어가 급히 공격하다가 죽었는데, 무리들이 모두 분발하여 쳐서 3천여 명의 목을 베었다.

11월에 왕이 몸소 신궁(神宮)에 제사를 지냈다.

2년 봄 정월에 (唐)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3월에 백제의 장군 의직(義直)이 서쪽의 변경을 침공하여 요거(腰車) 등 10여 성을 함락하였다. 왕이 이를 근심하여 압독주(押督州)의 도독(都督)인 김유신(金庾信)에게 명하여 이를 도모하게 하였다. 김유신(金庾信)은 이에 사졸(士卒)을 타이르고 격려하여 거느리고 나아갔다. 의직(義直)이 이에 대항하자 김유신(金庾信)은 군사를 세 길로 나누어 협격(挾擊)하였다. 백제의 군사가 패하여 달아났는데, 김유신(金庾信)은 달아나는 것을 추격하여 거의 다 죽였다.

왕이 기뻐하여 사졸들에게 상을 주었는데, 차등이 있었다.

겨울에 한질허(邯帙許)로 하여금 (唐)나라에 조공케 하였다. 태종(太宗)이 어사(御史)를 시켜서 물어보기를

“신라는 신하로서 대국(大國)의 조정을 섬기면서 어찌하여 따로 연호(年號)를 칭하는가?”라고 하였다. 한질허(邯帙許)가 대답하기를

“일찍이 천자(天子)의 조정에서 정삭(正朔)을 반포하지 않았기 때문에 선조 법흥왕(法興王) 이래로 사사로이 기년(紀年)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대국의 조정에서 명이 있었다면 작은 나라가 어찌 감히 그렇게 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태종이 그렇겠다고 여겼다.

이찬(伊湌) 김춘추(金春秋)와 그의 아들 문왕(文王)(唐)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태종(太宗)이 광록경(光祿卿) 유형(柳亨)을 보내서 교외에서 그를 맞이하여 위로하였다. 이윽고 다다르자 김춘추(金春秋)의 용모가 영특하고 늠름함을 보고 후하게 대우하였다. 김춘추(金春秋)국학(國學)에 가서 석전(釋奠)과 강론(講論)을 참관하기를 청하자 태종이 이를 허락하였다. 아울러 자기가 직접 지은 온탕비(溫湯碑)진사비(晉祠碑), 그리고 새로 편찬한 《진서(晉書)》를 내려 주었다.
어느 날 불러 사사로이 만나서 금과 비단을 매우 후하게 주고 묻기를
“경(卿)은 무슨 생각을 마음에 가지고 있는가?”라고 하였다. 김춘추(金春秋)가 무릎을 꿇고 아뢰기를

“신(臣)의 나라는 바다 모퉁이에 치우쳐 있으면서도 천자(天子)의 조정을 섬긴지 여러 해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백제는 강하고 교활하여 여러 차례 함부로 침략해 왔습니다. 더욱이 지난해에는 군사를 크게 일으켜서 깊숙이 쳐들어와 수십 개의 성을 쳐서 함락시켜 조회할 길을 막았습니다. 만약 폐하께서 나라의 군사를 빌려주어 흉악한 것을 잘라 없애지 않는다면 저희 나라의 인민은 모두 포로가 될 것이며, 산 넘고 바다 건너 행하는 조회도 다시는 바랄 수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태종이 매우 옳다고 여겨서 군사의 출동을 허락하였다. 김춘추(金春秋)는 또 장복(章服)을 고쳐서 중국의 제도에 따를 것을 청하자 이에 내전(內殿)에서 진귀한 옷을 꺼내어 김춘추(金春秋)와 그를 따라 온 사람에게 주었다. 조칙(詔勅)으로 김춘추(金春秋)에게 관작을 주어 특진(特進)으로 삼고, 문왕을 좌무위장군(左武衛將軍)으로 삼았다.

본국으로 돌아올 때 3품(品) 이상에게 명하여 송별 잔치를 열게 하여 우대하는 예(禮)를 극진히 하였다. 김춘추(金春秋)가 아뢰기를
“신에게 일곱 아들이 있습니다. 바라건대 고명하신 폐하의 옆을 떠나지 않고 숙위(宿衛) 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라고 하였다. 그의 아들 문왕과 대감(大監) ▣▣에게 명하였다. 김춘추(金春秋)가 돌아오는 길에 바다 위에서 고구려(高句麗)의 순라병을 만났다. 김춘추(金春秋)를 따라간 온군해(溫君解)가 높은 사람이 쓰는 모자와 존귀한 사람이 입는 옷을 입고 배 위에 앉아 있었는데, 순라병이 보고 그를 김춘추(金春秋)로 여기고 잡아 죽였다. 김춘추(金春秋)는 작은 배를 타고 본국에 이르렀다. 왕이 이를 듣고 슬퍼하여 온군해(溫君解)를 대아찬(大阿湌)으로 추증하고, 그 자손에게 후하게 상을 주었다.
3년 봄 정월에 비로소 중국의 의관(衣冠)을 착용하였다.
가을 8월에 백제의 장군 은상(殷相)이 무리를 거느리고 와서 석토(石吐) 등 일곱 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왕이 대장군(大將軍) 김유신(庾信)과 장군(將軍) 진춘(陳春)·죽지(竹旨)·천존(天存) 등에게 명하여 나아가 막게 하였다. 이곳저곳으로 이동하며 10여 일 동안 싸웠으나 해결이 나지 않았으므로 도살성(道薩城) 아래에 나아가 주둔하였다. 김유(金庾信)이 여러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오늘 틀림없이 백제인들이 와서 염탐할 것이다. 너희들은 짐짓 모르는 척하고 함부로 검문하지 말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사람을 시켜서 군영 안을 돌아다니면서 말하기를
“방어벽을 견고히 하고 움직이지 말라! 내일 응원군이 오는 것을 기다려서 그 후에 싸움을 결판내겠다.”라고 하였다. 첩자가 이를 듣고 돌아가서 은상(殷相)에게 보고하자 은(殷相) 등은 군사가 증원될 것이라고 하면서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김유신(金庾信) 등이 진격하여 크게 이기고 장사(將士) 1백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고 군졸 8천 9백 8십 명의 목을 베었으며, 전마(戰馬) 1만 필을 획득하였고, 병기와 같은 것은 이루 헤아릴 수가 없었다.
4년 여름 4월에 명을 내려서 진골(眞骨)로서 관직에 있는 사람은 아홀(牙笏)을 갖게 하였다.
6월에 (唐)나라에 사신을 보내 백제의 무리를 깨뜨린 사실을 알렸다.
왕이 비단을 짜고 오언태평송(五言太平頌)을 지어 김춘추(金春秋)의 아들인 법민(法敏)을 보내 (唐)나라의 황제에게 바쳤다. 그 글에서 말하기를
대당(大唐)은 큰 왕업(王業)을 개창하니 높디높은 황제의 포부 빛나도다.
전쟁을 그치니 천하가 안정되고 전 임금 이어받아 문치(文治)를 닦도다.
하늘을 본받음에 기후가 순조롭고 만물을 다스림에 저마다 빛나도다.
지극한 어짊은 해 달과 짝하고 시운(時運)을 어루만져 태평으로 나아가네.
깃발들은 저다지도 번쩍거리며 군악 소리 어찌 그리 우렁찬가!
명을 어기는 자 외방(外方) 오랑캐여 칼날에 엎어져 천벌을 받으리라.
순후한 풍속 곳곳에 퍼지니 원근에서 다투어 상서(祥瑞)를 바치도다.
사철이 옥촉(玉燭)처럼 고르고 해와 달은 만방을 두루 도네.
산악의 정기 어진 재상 내리시고 황제는 신하를 등용하도다.
삼황오제(三皇五帝) 한 덕(德)을 이루니 길이길이 빛나리 우리 당나라.”라고 하였다.
고종(高宗)이 가상하게 여기고 법민을 태부경(太府卿)으로 삼아서 돌려보냈다.

이 해에 처음으로 중국의 영휘(永徽)라는 연호를 사용하였다.

논하여 말한다. 삼대(三代)가 정삭(正朔)을 고치고 후대에 연호(年號)를 일컫는 것은 모두 통일을 크게 여겨서 백성들이 듣고 보는 것을 새롭게 하기 위함이다. 이러한 까닭에 때를 타고 나란히 일어나 둘이 마주 서서 천하를 다툰다든지, 간교한 사람이 틈을 타고 일어나 제왕의 자리를 엿보는 경우가 아니면 변두리의 작은 나라로서 천자(天子)의 나라에 신하로 속한 자라면 진실로 사사로이 연호를 칭할 수 없다. 신라와 같은 나라는 한결같은 마음으로 중국을 섬겨서 사신의 배와 공물 바구니가 길에서 서로 마주볼 정도로 잇달았다. 그런데도 법흥(法興王)이 스스로 연호를 칭한 것은 알지 못할 일이다. 그 후에도 그 잘못된 허물을 이어받아 여러 해를 지냈다. 태종(太宗)의 꾸지람을 듣고도 오히려 머뭇거리다가 이때에 와서야 나라의 연호를 받들어 행하였다. 비록 어쩔 수 없이 한 일이라고 할지라도, 이는 잘못을 저지르고 능히 허물을 고친 것이라고 할 만하다.

5년 봄 정월 초하루에 왕이 조원전(朝元殿)에 나아가서 백관(百官)으로부터 새해 축하인사를 받았다. 새해를 축하하는 예식(禮式)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2월에 품주(稟主)집사부(執事部)로 고치고 파진찬(波珍湌) 죽지(竹旨)를 집사(執事) 중시(中侍)로 삼아 기밀사무를 관장케 하였다.

파진찬(波珍湌) 김인문(金仁問)(唐)나라에 보내 조공하고 머무르며 숙위(宿衛)하게 하였다.

6년 봄 정월에 파진찬(波珍湌) 천효(天曉)를 좌리방부령(左理方府令)으로 삼았다.

(唐)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3월에 서울(경도, 京都)에 큰 눈이 왔고, 왕궁(王宮)의 남쪽 문이 아무 까닭이 없이 저절로 무너졌다.

7년 겨울 11월에 (唐)나라에 사신을 보내 금총포(金總布)를 바쳤다.

8년 봄 3월에 왕이 죽었다. 시호(諡號)를 진덕(眞德)이라 하고 사량부(沙粱部)에 장사를 지냈다. (唐)나라의 고종(高宗)이 듣고 영광문(永光門)에서 애도를 표하고 태상승(太常丞) 장문수(張文收)를 사신으로 보내서 부절(符節)을 가지고 조문케 하였으며,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를 추증하고 비단 3백 단(段)을 내려 주었다.
나라 사람들은 시조(始祖) 혁거세(赫居世)부터 진덕왕(眞德王)까지의 28왕을 일컬어 성골(聖骨)이라 하고, 무열왕(武烈王)부터 마지막 왕까지를 일컬어 진골(眞骨)이라고 하였다. 나라 영호징(令狐澄)의 《신라기(新羅記)》에서 말하기를
“그 나라의 왕족은 제1골(第一骨)이라 하고, 나머지 귀족은 제2골(第二骨)이라고 한다.”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