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권(券第五) 신라본기(新羅本紀) 진덕왕(眞德王)
진덕왕(眞德王)
진덕왕(眞德王)113 신라의 제28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647~654년이다. 《삼국유사》 권1, 왕력(王曆)1에는 ‘진덕여왕(眞德女王)’으로 기록되었다. ‘진덕(眞德)’의 ‘진(眞)’은 《방광대장엄경(方廣大莊嚴經)》 권3, 승족품(勝族品)의 진종설화(眞種說話)에서 채용한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김철준, 「신라 상대사회의 Dual Organization」 (하), 《역사학보》 2, 1952 | 《한국고대사회연구》, 서울대 출판부, 1990, 148쪽). 진덕왕(眞德王)을 마지막으로 성골(聖骨)의 왕통(王統)이 끊어졌는데, 《삼국사기》에서는 진덕왕대까지를 상대(上代)라 하였고, 《삼국유사》에서는 중고(中古)라 하였다.닫기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승만(勝曼)114 대승경전의 하나인 《승만사자후일승대방편방광경(勝鬘師子吼一乘大方便方廣經)》의 주인공인 승만부인(勝鬘夫人)에서 차용한 이름이다. 인도 아유타국(阿踰陁國)의 왕비인 승만부인은 불법(佛法)에 귀의한 재가녀(在家女)로서 10가지 큰 원(願)을 세우고 바른 진리를 거두어 들이는 것이 대승 정신의 체현이며 보살행의 실천임을 다짐하였다. 또 남편 우칭왕(友稱王)과 함께 7세 이상의 남녀에게 대승법으로 교화하여 온 나라의 백성들이 모두 불법을 행하였다 한다.닫기이고, 진평왕(眞平王)115 신라의 제26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579~632년이다.닫기의 친동생인 국반(國飯) 갈문왕(葛文王)117 갈문왕(葛文王)은 왕위계승권이 없는 준왕(準王)과 같은 존재로서 왕과의 일정한 관계를 기준으로 하여 책봉되었다. 곧 신라의 지배층인 왕족과 왕비족을 중신으로 한 사회적·정치적 관계를 표현해주는 것으로 시대에 따라 그 경향성도 변화하였다. 신라 초기 박씨왕 시대에는 왕비의 아버지가 주로 갈문왕에 책봉되었고, 눌지왕(訥祇王) 이후 마립간 시대에는 왕의 동생이 갈문왕에 책봉되었다. 그러다가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이후에는 죽은 아버지에 대한 추봉적(追封的) 의미의 갈문왕제만이 유지되었다(이기백, 「신라시대의 갈문왕」, 《역사학보》 58, 1973 | 《신라정치사회사연구》, 일조각, 1974 참조). 갈문왕에 대한 연구 성과는 송은정, 「신라 상대 갈문왕의 성격과 변화」, 《숙명한국사론》 2, 1996 참조.닫기의 딸이다. 또는 국분(國芬)116 석가모니의의 아버지인 정반왕(淨飯王)의 동생이며, 석가모니의 숙부의 이름을 차용한 것으로, 진덕왕(眞德王)의 아버지이다. 《삼국유사》 권1, 왕력(王曆)1에는 ‘국기안(國其安)’으로 기록되었다.닫기이라고도 하였다. 어머니는 박씨(朴氏) 월명부인(月明夫人)118 《삼국유사》 권1, 왕력(王曆)1에는 진덕왕(眞德王)의 어머니는 박씨 아니부인(阿尼夫人)으로 노추△△△(奴追△△△) 갈문왕(葛文王)의 딸이고, 월명부인(月明夫人)은 아니라고 기록되었다.닫기이다. 승만(勝曼)은 생김새가 풍만하고 아름다웠으며, 키가 일곱 자였고 손을 내려뜨리면 무릎 아래까지 닿았다.
원년 정월 17일에 비담(毗曇)을 목을 베어 죽였는데, 연루되어 죽은 사람이 30명이었다.
2월에 이찬(伊湌) 알천(閼川)을 상대등(上大等)으로 삼고, 대아찬(大阿湌) 119 신라 경위(京位) 17관등 중에서 5위의 관등이다. 《삼국사기》 권38, 잡지(雜志)7, 직관(職官) 상(上)에는 대아찬(大阿湌)에서 이벌찬(伊伐湌)까지는 오직 진골(眞骨)만이 받을 수 있었다고 기록되었다.닫기수승(守勝)120 유력한 진골(眞骨) 귀족으로 추정되지만, 이외의 다른 곳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아서 구체적인 행적은 알 수 없다.닫기을 우두주(牛頭州)의 군주(軍主)로 삼았다.강원도 춘천시 지역으로, 주양(走壤)·오근내(烏根乃) 또는 우수주(牛首州)·수약주(首若州)라고도 하였다. 637(선덕왕 6)에 우수주를 설치하였고, 668년(문무왕 8)에 비열홀주(比列忽州)를 설치하였으며, 673년(문무왕 13)에 다시 수약주를 설치하였다가 757년(경덕왕 16)에 삭주(朔州)로 개칭하였다. 《삼국사기》 권35, 잡지(雜志)4 지리(地理)2 삭주(朔州)조 참조.닫기
당(唐)나라의 태종(太宗)이 사신을 보내서 부절(符節)을 가지고 앞 임금을 광록대부(光祿大夫)로 추증하고, 아울러 왕을 주국(柱國) 낙랑군왕(樂浪郡王)으로 책봉하였다.郡王’은 당나라 從一品의 爵位인데, 진덕왕에게 이러한 작위를 내려준 사실은 《구당서》 권199 신라전, 《신당서》 권220 신라전, 《자치통감(資治通鑑)》 권198 貞觀 22년조에도 수록되어 있다.닫기
가을 7월에 당(唐)나라에 사신을 보내 은혜에 감사하였다.
연호를 태화(太和)로 바꾸었다. 원년)부터 650년(진덕왕 4)까지 4년 동안 사용된 신라의 마지막 연호(年號)이다. 태화 연호의 제정 시기에 대하여 《삼국유사》 권1, 왕력(王曆)1과 《삼국사기》 권31, 연표(年表) 하(下) 및 《삼국사기》 권41, 열전(列傳)1 김유신전(金庾信傳) 상(上)에는 648년(진덕왕 2)으로 기록되었다.닫기
8월에 혜성(彗星)이 남쪽에서 나타났고, 뭇 별들이 북쪽으로 흘러갔다.
겨울 10월에 백제의 군사가 무산(茂山)·감물(甘勿)·동잠(桐岑)의 세 성125 茂山城은 현재의 전북 무주군 무풍면이고, 甘勿城은 현재의 경북 김천시 開寧面에 비정되며, 桐岑城은 현재의 경북 구미시 인의동 일대로 추정된다. 한편 《삼국사기》 권28 백제본기 의자왕 7년(647) 10월조에, 이때 백제 장군 義直이 步騎 3천을 거느리고 신라 茂山城 아래에 나아가 주둔하면서 병사를 나누어 甘勿·桐岑의 두 城을 공격하였다고 한다.닫기을 에워쌌으므로,126 《삼국사기》 권28, 백제본기6 의자왕(義慈王) 7년 10월조에 동일한 내용의 기사가 수록되어 있다.닫기 왕이 김유신(金庾信)에게 보병과 기병 1만 명을 거느리고 가서 막게 하였다. 고전하여 기운이 다 빠졌는데, 김유신(金庾信)의 부하 비령자(丕寧子)127 성씨와 출신지는 기록이 없어서 알 수 없다. 647년(진덕왕 원년)에 백제와의 전투에서 신라군이 고전할 때 아들 거진(擧眞), 종[奴] 합절(合節)과 함께 전사하여 신라군이 승리를 거두게 하였다. 진덕왕(眞德王)이 눈물을 흘리며 예(禮)로써 반지산(反地山)애 합장하고, 그 처자와 구족(九族)에게 상을 후하게 내렸다. 《삼국사기》 권47, 열전(列傳)7 비령자전(丕寧子傳) 참조.닫기와 그의 아들 거진(擧眞)이 적진에 들어가 급히 공격하다가 죽었는데, 무리들이 모두 분발하여 쳐서 3천여 명의 목을 베었다.비령자(丕寧子)의 아들이다. 647년(진덕왕 원년)에 백제와의 전투에서 신라군이 고전할 때 아버지 비령자, 종[奴] 합절(合節)과 함께 전사하였다. 《삼국사기》 권47, 열전(列傳)7 비령자전(丕寧子傳) 참조.닫기
11월에 왕이 몸소 신궁(神宮)에 제사를 지냈다.
2년 봄 정월에 당(唐)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3월에 백제의 장군 의직(義直)130 647년(의자왕 7) 10월에 무산성(茂山城) 전투에서 신라의 김유신(金庾信)에게 패하였고, 648년 3월에 신라의 요거성(腰車城) 등 10성을 함락하였으며, 같은 해 4월에 옥문곡(玉門谷) 전투에서 신라군에게 패하였다. 660년(의자왕 20) 6월 백제가 멸망할 때에는 좌평(佐平)이었다.닫기이 서쪽의 변경을 침공하여 요거(腰車) 등 10여 성131 《자치통감(資治通鑑)》 권197, 태종(太宗) 정관(貞觀) 22년 9월 기축(己丑)조, 《책부원귀(冊府元龜)》 권995, 외신부(外臣部) 교침(交侵) 정관 22년 9월 기축조에 이와 관련된 기사가 수록되어 있다. 한편 요거성(腰車城) 등 10성의 위치를 지금의 경상남도 합천군 부근의 지역으로 비정하는 견해도 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57쪽).닫기을 함락하였다. 왕이 이를 근심하여 압독주(押督州)132 지금의 경상북도 경산시 지역이다. ‘압독(押督)’을 ‘압량(押梁)’이라고도 하였다. 이 지역은 본래 압독국(押督國) 또는 압량소국(押梁小國)이 있었는데, 102년(파사왕 23)에 신라에 항복하였다. 642년(선덕왕 11)에 주(州)를 설치하였다가 661년(무열왕 8)에 다시 군(郡)으로 삼았으며, 경덕왕(景德王)대에 장산군(獐山郡)으로 개칭하였다. 한편 《삼국유사》 권1, 왕력(王曆)1에는 압량국이 신라에 복속된 것은 지마이사금(祇摩尼師今)대라고 기록되었다. 《삼국사기》 권34, 잡지(雜志)3 지리(地理)1 양주(良州) 장산군(獐山郡)조 참조.닫기의 도독(都督)인 김유신(金庾信)에게 명하여 이를 도모하게 하였다. 김유신(金庾信)은 이에 사졸(士卒)을 타이르고 격려하여 거느리고 나아갔다. 의직(義直)이 이에 대항하자 김유신(金庾信)라의 김유신(金庾信)은 백제의 의직(義直)에게 대양성(大梁城) 밖에서 저지를 받고 옥문곡(玉門谷)까지 쫓겨 갔다가, 거기서 반격의 기틀을 잡았다. 《삼국사기》 권28, 백제본기6 의자왕(義慈王) 8년 4월조 | 《삼국사기》 권41, 열전(列傳)1 김유신전(金庾信傳) 상(上)조 참조.닫기은 군사를 세 길로 나누어 협격(挾擊)하였다. 백제의 군사가 패하여 달아났는데, 김유신(金庾信)은 달아나는 것을 추격하여 거의 다 죽였다.)은 백제의 장군 8명을 사로잡아 대야성(大耶城)이 함락될 때 죽은 김춘추(金春秋)의 사위인 김품석(金品釋) 부부의 유해(遺骸)와 교환하였다. 그리고 승세를 몰아서 백제의 경계 안으로 쳐들어가서 악성(嶽城) 등 12성을 함락시켰으며, 20,000명을 죽이고, 9,000명을 사로잡았다. 《삼국사기》 권41, 열전(列傳)1 김유신전(金庾信傳) 상(上)조 참조.닫기
왕이 기뻐하여 사졸들에게 상을 주었는데, 차등이 있었다.
겨울에 한질허(邯帙許)136 유력한 진골(眞骨) 귀족으로 추정되지만, 이외의 다른 곳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아서 구체적인 행적은 알 수 없다.닫기로 하여금 당(唐)나라에 조공케 하였다. 태종(太宗)이 어사(御史)137 어사대(御史臺)에 속한 관리를 말한다. 당(唐)나라의 어사대에는 대부(大夫) 1명, 중승(中丞) 2명과 그 아래에 시어사(侍御史),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 감찰어사(監察御史) 등이 있었다. 시어사는 백료(百僚)의 탄핵을 맡고, 전중시어사는 조정의 공봉의식(供奉儀式)을 규찰하며, 감찰어사는 군현(郡縣)을 순찰하였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58쪽).닫기를 시켜서 물어보기를
“신(臣)의 나라는 바다 모퉁이에 치우쳐 있으면서도 천자(天子)의 조정을 섬긴지 여러 해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백제는 강하고 교활하여 여러 차례 함부로 침략해 왔습니다. 더욱이 지난해에는 군사를 크게 일으켜서 깊숙이 쳐들어와 수십 개의 성을 쳐서 함락시켜 조회할 길을 막았습니다. 만약 폐하께서 당나라의 군사를 빌려주어 흉악한 것을 잘라 없애지 않는다면 저희 나라의 인민은 모두 포로가 될 것이며, 산 넘고 바다 건너 행하는 조회도 다시는 바랄 수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태종이 매우 옳다고 여겨서 군사의 출동을 허락하였다. 김춘추(金春秋)는 또 장복(章服)을 고쳐서 중국의 제도에 따를 것을 청하자146 장복(章服)은 각종 무늬와 기호를 넣어서 만든 공복(公服)이다. 《삼국유사》 권1, 기이(紀異)2 태종춘추공(太宗春秋公)조와 《삼국유사》 권4, 의해(義解)5 자장정율(慈藏定律)조에는 자장법사(慈藏法師)가 당나라 황제에게 청해 가지고 와서 비로소 신라에 시행하였다고 기록되었다.닫기 이에 내전(內殿)에서 진귀한 옷을 꺼내어 김춘추(金春秋)와 그를 따라 온 사람에게 주었다. 조칙(詔勅)으로 김춘추(金春秋)에게 관작을 주어 특진(特進)147 당(唐)나라의 정2품의 문산관(文散官) 벼슬이다.닫기으로 삼고, 문왕을 좌무위장군(左武衛將軍)148 당(唐)나라 중앙 군제(軍制)의 하나인 좌무위(左武衛)에 속한 종3품의 무관직(武官職)으로, 무위는 궁궐을 호위하는 부대의 하나이다. 당나라에서는 좌·우무위를 두고, 대장군(大將軍) 각 1명, 장군 각 2명을 두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59쪽). 《구당서(舊唐書)》 권199, 신라전(新羅傳), 《신당서(新唐書)》 권220, 신라전, 《자치통감(資治通鑑)》 권199, 태종(太宗) 정관(貞觀) 22년 12월 계미조, 《책부원귀(冊府元龜)》 권974, 외신부(外臣部) 포이(褒異) 정관 22년 12월조에 동일한 내용의 기사가 수록되어 있다.닫기으로 삼았다.
이 해에 처음으로 중국의 영휘(永徽)라는 연호를 사용하였다.179 당(唐)나라 고종(高宗)대의 연호(年號)로, 650년부터 655년까지 사용되었다. 신라에서 최초로 사용한 당나라의 연호이다.닫기라는 연호를 사용하였다.
논하여 말한다. 삼대(三代)180 중국 고대의 하(夏)·은(殷)·주(周) 세 왕조를 말한다.닫기가 정삭(正朔)을 고치고 후대에 연호(年號)를 일컫는 것은 모두 통일을 크게 여겨서 백성들이 듣고 보는 것을 새롭게 하기 위함이다. 이러한 까닭에 때를 타고 나란히 일어나 둘이 마주 서서 천하를 다툰다든지, 간교한 사람이 틈을 타고 일어나 제왕의 자리를 엿보는 경우가 아니면 변두리의 작은 나라로서 천자(天子)의 나라에 신하로 속한 자라면 진실로 사사로이 연호를 칭할 수 없다. 신라와 같은 나라는 한결같은 마음으로 중국을 섬겨서 사신의 배와 공물 바구니가 길에서 서로 마주볼 정도로 잇달았다. 그런데도 법흥왕(法興王)이 스스로 연호를 칭한 것은 알지 못할 일이다. 그 후에도 그 잘못된 허물을 이어받아 여러 해를 지냈다. 태종(太宗)의 꾸지람을 듣고도 오히려 머뭇거리다가 이때에 와서야 당나라의 연호를 받들어 행하였다. 비록 어쩔 수 없이 한 일이라고 할지라도, 이는 잘못을 저지르고 능히 허물을 고친 것이라고 할 만하다.
5년 봄 정월 초하루에 왕이 조원전(朝元殿)181 조원전(朝元殿)에 대한 기록은 651년(진덕왕 5)에 처음으로 보이고, 868년(경문왕 8) 8월에 중수되었다. 806년(애장왕 7) 3월과 878년(헌강왕 4) 8월에 조원전에서 일본국사(日本國使)를 인견(引見)하였다.닫기에 나아가서 백관(百官)으로부터 새해 축하인사를 받았다. 새해를 축하하는 예식(禮式)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2월에 품주(稟主)183 조주(祖主) 또는 조주(租主)라고도 하였으며, 국왕의 가신(家臣)적 기국에서 비롯되었다. 품주가 설치된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품주에 속한 최초의 관직인 전대등(典大等)이 565년(진흥왕 26)에 설치되었기 때문에 이 무렵으로 추정된다. 처음에는 국가의 재정을 총괄하였으나 584년(진평왕 6)에 공부(貢賦)에 관한 일을 조부(調府)로 이관하면서 재정 지출에 관한 업무만 관장하였고, 651년(진덕왕 5)에 집사부(執事部)와 창부(倉部)로 분리되면서 폐지되었다(이기백, 「품주고」 《이상백박사회갑기념논총》, 1964 | 《신라정치사회사연구》, 일조각, 1974, 135~140쪽).닫기를 집사부(執事部)184 651년(진덕왕 5)에 품주(稟主)를 개편하여 설치된 관청으로, 왕정의 기밀 사무를 담당하였다. 집사부는 진덕왕(眞德王) 대에 왕권을 배경으로 정치적인 실권을 장악하였던 김춘추(金春秋)와 김유신(金庾信) 세력이 화백회의(和白會議)와 상대등(上大等)으로 대표되는 귀족 세력과 대항하여 왕권의 전제화를 이루기 위한 목적에서 설치한 것으로 이해한다(이기백, 「신라 집사부의 성립」, 《진단학보》 25·26·27, 1964 | 《신라정치사회사연구》, 일조각, 1974, 152~153쪽). 829년(흥덕왕 4)에 집사성(執事省)으로 개칭하였다. 《삼국사기》 권38, 잡지(雜志)7, 직관(職官) 상(上) 집사성(執事省)조 참조.닫기로 고치고 파진찬(波珍湌) 185 신라 경위(京位) 17관등 중에서 4위의 관등이다. 《삼국사기》 권38, 잡지(雜志)7, 직관(職官) 상(上)에는 해간(海干)·파미간(破彌干)이라고도 기록되었다.닫기죽지(竹旨)를 집사(執事) 중시(中侍)186 집사부(執事部)의 장관으로, 대아찬(大阿湌)에서 이찬(伊湌)까지의 진골(眞骨) 귀족이 임명되었다. 중시는 왕의 행정적인 대변자의 역할을 수행하고, 왕권의 방파제 내지는 전위적인 역할을 담당하여 중대(中代) 전제왕권(專制王權)의 강화·유지에 큰 기능을 하였다(이기백, 「신라 집사부의 성립」, 《진단학보》 25·26·27, 1964 | 《신라정치사회사연구》, 일조각, 1974, 164~167쪽). 747년(경덕왕 6)에 시중(侍中)으로 개칭되었다. 《삼국사기》 권38, 잡지(雜志)7, 직관(職官) 상(上) 집사성(執事省)조 참조.닫기로 삼아 기밀사무를 관장케 하였다.
파진찬(波珍湌) 김인문(金仁問)187 무열왕(武烈王) 김춘추(金春秋)의 둘째 아들이고, 어머니는 문명왕후(文明王后)이며, 문무왕(文武王)의 동생이다. 자(字)는 인수(仁壽)이다. 어려서부터 유가서(儒家書)와 장자(莊子)·노자(老子)·불서(佛書)를 섭렵하였다. 특히 예서(隷書)를 잘 썼으며, 활쏘기와 말타기에 능하였고, 향악(鄕樂)을 잘하였다. 651년(진덕왕 5)에 파진찬(波珍湌)으로서 23세 때 처음으로 당(唐)나라에 가서 숙위(宿衛)한 이후에 모두 7차례나 당나라에 갔다 왔고, 22년 동안이나 체류하면서 대당외교(對唐外交)를 담당하였다. 656년(무열왕 3)에 귀국하여 압독주 군주(押督州 軍主)를 지내면서 장산성(獐山城)을 쌓아 그 공로로 식읍(食邑) 300호를 받았고, 660년(무열왕 7)에는 당나라의 부대총관(副大摠管)으로 백제 원정군에 참여하였다. 662년(문무왕 2)에는 김유신(金庾信) 등과 함께 평양(平壤) 부근에 있던 당나라의 소정방(蘇定方)에게 식량을 전달하였고, 664년에는 각간(角干)으로 승진하였다. 668년(문무왕 8)에는 대당총관(大幢摠管)으로 고구려의 원정군에 참여하여 평양성(平壤城)을 함락시킨 후에 이적(李勣)을 따라서 당나라에 다시 갔다. 같은 해 12월에 고구려 원정의 공으로 대각간(大角干)으로 승진하였다. 나당전쟁(羅唐戰爭) 중인 674년(문무왕 14)에 당나라가 문무왕의 관작(官爵)을 빼앗고 그를 신라왕(신라왕(新羅王))으로 삼아서 귀국케 하다가 문무왕의 관작이 회복되어 당나라로 다시 돌아갔다. 이후에 계속 당나라의 수도인 장안(長安)에서 체류하다가 694년(효소왕 3) 4월 29일에 66세의 나이로 그곳에서 죽었다. 이듬해 유해가 고국으로 송환되어 서원(西原)의 태종 무열왕릉 아래에 묻혔다. 《삼국사기》 권44, 열전(列傳)4, 김인문전(金仁問傳) 참조. 김인문에 대한 연구 성과는 김수태, 「나당관계의 변화와 김인문」, 《백산학보》 52, 1999 | 권덕영, 「김인문 소전」, 《문화사학》 21, 2004 참조.닫기을 당(唐)나라에 보내 조공하고 머무르며 숙위(宿衛)하게 하였다.
6년 봄 정월에 파진찬(波珍湌) 천효(天曉)188 진골(眞骨) 귀족으로 추정되지만, 이외의 다른 곳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아서 구체적인 행적은 알 수 없다.닫기를 좌리방부령(左理方府令)189 신라 중앙 관서 중의 하나인 좌리방부(左理方府)의 장관이다. 좌이방부는 형률(刑律)을 담당하였으며, 651년(진덕왕 5)에 설치되었다. 영(令)은 2명으로 급찬(級湌)에서 잡찬(迊湌)까지의 관등이 임명되었다. 《삼국사기》 권38, 잡지(雜志)7, 직관(職官) 상(上) 좌리방부(左理方府)조 참조.닫기으로 삼았다.
당(唐)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3월에 서울(경도, 京都)에 큰 눈이 왔고, 왕궁(王宮)의 남쪽 문이 아무 까닭이 없이 저절로 무너졌다.
7년 겨울 11월에 당(唐)나라에 사신을 보내 금총포(金總布)를 바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