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권(券第九) 신라본기(新羅本紀) 선덕왕(宣德王)
선덕왕(宣德王)
선덕왕(宣德王)357 신라의 제37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780년~785년이다. 나물왕의 10세손으로 김효방의 아들이고 이름은 良相이다. 764년 1월에 金邕의 뒤를 이어 아찬으로서 시중이 되었다가 768년 10월에 물러났다. 771년에 檢校使 肅正臺令 兼 修城府令 檢校感恩寺使 角干으로서 聖德大王神鐘 주조 사업에 참여하였다. 774년에 이찬으로서 상대등이 되었고 777년에 상소를 올려 당시의 정치 상황을 비판하였으며, 780년 4월에 김지정의 난을 진압한 후 왕위에 올라 下代 왕실을 열었다. 그는 浿江鎭 개척 이외에는 특별한 치적을 남기지 못하고 죽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98쪽).닫기이 왕위에 올랐다. 성은 김씨(金氏)이고 이름은 양상(良相)이다. 나물왕(奈勿王)358 신라의 제17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356년~402년이다. 김씨로서 왕위에 오른 두번째 임금으로, 那密 혹은 奈密 또는 毗庵眞空大師碑에서는 勿이라 하였다. 《삼국사기》에서는 나물을 ‘尼師今’이라 하였으나 《삼국유사》 王曆篇에서는 이 왕대부터 마립간이라 칭하였고, 《太平御覽》 권781에 인용된 《秦書》에도 나물왕을 마립간의 대칭인 新羅國王樓寒이라 하였다. 그래서 나물왕의 칭호는 이사금이 아니라 마립간이라 해야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하였다(武田幸男, 《新羅骨品制の再檢討》, 《東洋文化硏究所紀要》, 67, 1975). 혹은 당시에는 마립간과 이사금의 칭호가 병존하였다는 주장도 있다(末松保和, 《新羅三代考》, 《新羅史の諸問題》, 1954. 浜田耕策, 《新羅太王號の成立とその特質》, 《年譜朝鮮學》 1, 1990). 나물왕 이후에는 종전과 같은 3성 교립이 없어지고 김씨가 왕위를 세습하였으며, 대외적으로는 377년과 382년 두 차례에 걸쳐 前秦에 사신을 파견한 점으로 보아 신라가 이때부터 비약적으로 발전하였음을 알 수 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76쪽).닫기의 10대손으로, 아버지는 해찬(海湌) 359 신라 17관등 가운데 제4관등인 파진찬의 별칭으로 海干이라고도 하였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74쪽).닫기효방(孝芳)360 孝芳은 《삼국유사》 王曆篇에 보이는 ‘孝方’ 그리고 성덕왕 33년(734) 당에서 숙위하던 金忠信과 교대하기 위하여 입당하였다가 그 곳에서 죽은 ‘金孝方’과 동일인이다. 金孝方은 각간 元訓의 아들이고(《삼국유사》 王曆篇), 宣德王 金良相의 아버지로 宣德王代 開成大王으로 추봉되었다. 《삼국사기》 권9 신라본기 宣德王 즉위년조와 《삼국유사》 王曆篇 宣德王條에서는 ‘孝芳’이라 하였다. 734년에 金忠信이 당 현종에게 올린 이 표문에 의하면, 732년에 김충신과 숙위를 교대하러 온 김효방이 죽었기 때문에 계속 남아서 숙위했다고 한다. 그러므로 김효방은 김충신이 신라 귀국이 내정된 732년 9월부터 金思蘭이 김충신 대신으로 신라로 귀국한 733년 1월 사이에 당에서 죽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김효방의 아들 선덕왕 金良相의 어머니는 성덕왕의 딸 四炤夫人이었으므로 김효방은 당시 성덕왕의 사위였다고 하겠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98-299쪽).닫기이다. 어머니는 김씨(金氏) 사소부인(四炤夫人)361 《삼국유사》 王曆篇에서는 炤를 ‘召’로 표기하였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99쪽).닫기으로 성덕왕(聖德王)362 신라의 제33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712~737년이다. 신문왕의 둘째 아들로, 친형 효소왕을 이어 즉위하였다. 성덕왕은 나당전쟁으로 말미암아 관계가 소원해졌던 나당관계를 다시 긴밀히 하였고 백성들에게 丁田을 지급하여 민생을 안정시켰으며, 북쪽에 長城을 축조하고 동쪽에 毛伐郡城을 쌓아 외적의 침입에 대응하였다. 그리고 당으로부터 패강 지역을 賜與받아 원산만에서 대동강 이남의 국경을 확정지었다. 또한 성덕왕대에는 당의 요청을 받아들여 발해의 남쪽을 공격하였으나 성과없이 되돌아왔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59쪽).닫기의 딸이다. 왕비는 구족부인(具足夫人)으로 각간(角干) 363 신라 17관등 중 제1관등이다. 이벌찬의 다른 이름이다. 角干이란 관등이 생겨나게 된 배경에 대해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祇摩尼師今 즉위년조에 伊飡과 摩帝 伊飡이 각자 자기 딸을 태자에게 소개하는 과정에서 딸이 태자의 관심을 끌지 못한 許婁가 섭섭해 하자, 왕이 허루에게 酒多의 관등을 주면서 伊飡보다 上位에 있도록 한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하고 있다. 그리고 주다에 대해서는 “酒多後云角干”이라고 설명하고 있다(《삼국사기》 권1 신라본기 祇摩尼師今 즉위년조에 “王謂許婁曰 此地名大 公於此 置盛饌美 以宴之 宜位酒多 在伊飡之上 以摩帝之女 配太子焉 酒多後云角干”이라 한 기사 참조). 酒多는 ‘술한’이고 角干은 ‘한’이어서 음운상 서로 통한다(서의식, 《신라상대 ‘간’층의 형성·분화와 중위제》, 53쪽 | 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449쪽).닫기양품(良品)364 《삼국유사》 王曆篇에서는 狼品으로 표기하였다. 양품의 행적에 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99쪽).닫기의 딸이다. 또는 아찬(阿飡) 365 신라 17관등제에서 제6관등이다. 《삼국사기》 職官志(직관지) 上(상)에 아찬의 다른 표기로 阿尺干·阿粲이 나온다. 한편 《梁書》 권54 신라전에는 謁旱支로, 迎日冷水里新羅碑와 蔚珍鳳坪新羅碑 및 丹陽新羅赤城碑에는 阿干支로, 大邱戊戌塢作碑와 《隋書》 권81 열전 신라전에는 阿尺干으로, 昌寧新羅眞興王拓境碑에는 阿干으로 표기되고 있다. 이러한 표기들은 阿干支-阿干-阿湌-阿干의 순서로 변천되었다고 한다(권덕영, 「신라관등 아찬·내마에 대한 고찰」, 《국사관논총》 21, 1991, 36~49쪽). 이 阿湌=阿尺干은 斯盧國의 首長으로서의 干 아래에 두어졌던 阿尺을 격상시켜 만든 것으로 보인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452-453쪽).닫기의공(義恭)의 딸이라고도 하였다.
크게 사면했다.
2년(781년)378 정덕본, 을해목활자본에는 三으로 되어 있으나, 《삼국사절요》에는 二로 되어 있으며 다음 기사에 3월이 다시 나오므로 二로 수정되어야 한다. 이에 2월로 번역했다.닫기 봄 2월에 몸소 신궁(神宮)379 신라 시조가 탄생한 곳에 세워 제사지내던 건물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하면, 신궁은 제21대 炤知王 9년에 설치되고 그 17년에 왕이 친히 제사지낸 후, 역대 왕들은 대개 즉위 이듬해 정월 또는 2월에 卽位儀禮로서 신궁에 親祀하였는데, 다만 신라 中代까지는 眞興王, 武烈王, 文武王, 孝成王을 제외한 모든 왕이 여기에 親祀하였고, 下代에는 神宮 親祀의 빈도가 줄기는 하나 제55대 景哀王까지 이어졌다. 神宮에 奉祀된 主神에 대해서는, (1) 시조묘의 主神과 같은 朴赫居世로 보는 견해, (2) 金閼智라는 견해, (3) 奈勿王이라는 견해, (4) 味鄒王이라는 견해, (5) 신궁의 主神은 朴氏나 金氏의 祖上神이 아니라 國家神인 天地神이라는 견해(최광식, 「신라의 신궁 설치에 대한 신고찰」, 《한국사연구》 43, 1983, 65~74쪽), (6) 그 主神이 신라 始祖이기는 하지만 신궁에서 그를 제사지내는 것은 祭天儀禮 또는 郊祀制度의 성격을 가진다는 견해(신종원, 「삼국사기 제사지 연구」, 《사학연구》 38, 1984, 17~27쪽) 등이 있다. 또한 신궁 설치의 역사적 의의에 대해서는, 학설에 따라 (1) 奈勿王系 金氏 血族集團의 결속에 따른 종교적 상징으로 보는 설(이기동, 《신라골품제사회와 화랑도》, 일조각, 1984), (2) 巫俗과 같은 고유신앙 자체 내의 사상적 통일정책의 성공을 뜻한다는 설(최광식, 「신라의 신궁 설치에 대한 신고찰」, 《한국사연구》 43, 1983) 등이 있으나, 그것을 신라가 중앙집권적 고대국가로 성장함에 따른 국가의식의 자주적 표현이라고 보는 점에서는 대개 일치하고 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p4~5쪽).닫기에 제사 지냈다.
가을 7월에 사자를 보내 패강(浿江)380 패강은 시대와 사용자에 따라 압록강, 대동강, 임진강 등 여러가지로 사용되었다. 여기서의 浿江은 大洞江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452-453쪽).닫기 남쪽의 주와 군을 위로했다.
3년(782년) 봄 윤 정월에 당(唐)에 사신을 보내 조공했다.
2월에 왕이 한산주(漢山州)를 두루 돌며 살펴보고 백성들을 패강진(浿江鎭)383 《與地勝覽(여지승람)》 권51 平壤(평양) 古跡(고적), 浿江鎭條(패강진조)에 《삼국사기》의 이 기사와, 헌덕왕 18년 조의 “命牛岑太守白永, 築浿江長城”이란 기사를 인용한 후 “或云鎭在黃海道牛峯縣之浿江”이라 하였음과 같이 이때의 浿江鎭은 牛峯縣(우봉현 : 지금의 김천 방면)으로 봄이 옳을 듯하다(이병도, 《역주 삼국사기》 상, 을유문화사, 1996, 243쪽).닫기으로 옮겼다.
가을 7월에 시림(始林)385 ‘林’의 옛 명칭. 앞의 주석 27 참조. 《삼국유사》에서는 이를 “鳩林”이라고도 하였다. 여기서 ‘始’는 ‘새’의 音을 따서 쓴 것이고, ‘·鳩’는 그 訓을 취한 것일 뿐이라는 견해도 있다. 이병도, 《국역 삼국사기》, 을유문화사, 1977, 13쪽(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60쪽).닫기의 벌판에서 군사를 크게 사열했다.
4년(783년) 봄 정월에 아찬(阿飡) 386 신라 17관등제에서 제6관등이다. 《삼국사기》 職官志(직관지) 上(상)에 아찬의 다른 표기로 阿尺干·阿粲이 나온다. 한편 《梁書》 권54 신라전에는 謁旱支로, 迎日冷水里新羅碑와 蔚珍鳳坪新羅碑 및 丹陽新羅赤城碑에는 阿干支로, 大邱戊戌塢作碑와 《隋書》 권81 열전 신라전에는 阿尺干으로, 昌寧新羅眞興王拓境碑에는 阿干으로 표기되고 있다. 이러한 표기들은 阿干支-阿干-阿湌-阿干의 순서로 변천되었다고 한다(권덕영, 「신라관등 아찬·내마에 대한 고찰」, 《국사관논총》 21, 1991, 36~49쪽). 이 阿湌=阿尺干은 斯盧國의 首長으로서의 干 아래에 두어졌던 阿尺을 격상시켜 만든 것으로 보인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452-453쪽).닫기체신(體信)387 경덕왕 22년(763)에 급찬으로서 일본에 파견된 金體信과 동일인으로, 혜공왕 7년(771)에 檢校副使 執事部侍郞 아찬으로서 성덕대왕신종의 주조 사업에 참여하였으며 宣德王 4년에 대곡진 군주가 되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99-300쪽).닫기을 대곡진(大谷鎭)88 지금의 평산(平山)(이병도, 《역주 삼국사기》 상, 을유문화사, 1996, p.243). 현재의 황해도 平山에 있던 軍鎭으로 곧 패강진을 가리킨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300쪽).닫기 군주(軍主)389 신라에서 지방에 파견한 최고의 外官이다. 軍主의 성격에 대해서는, (1) 신라의 최대 지방행정조직인 州에 파견된 長官으로 보는 견해와, (2) 신라의 주요 군사적 전진기지인 停에 파견된 將軍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다만 후자의 견해는, 中古期 말 이후 본격화된 통일 전쟁의 과정에서 軍主가 州 전체에 대한 지방관으로 변모해 갔으리라고 추정하여, 전자의 견해와 부분적으로 일치한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67쪽).닫기로 삼았다.
2월에 서울(경도, 京都)에 눈이 세 자나 내렸다.
5년(784년) 여름 4월에 왕이 왕위를 양보하려 했으나, 여러 신하들이 세 번이나 글을 올려 말렸으므로 그만두었다.
6년(785년) 봄 정월에 당(唐) 덕종(德宗)390 당나라 代宗의 맏아들로 이름은 适이었다. 779년 5월에 즉위하여 804년 1월까지 재위하였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94쪽).닫기이 호부낭중(戶部郎中) 391 나라의 재정을 담당하던 당나라 戶部 소속의 관직으로, 정원은 2명이고 관품은 從5品上이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300쪽).닫기개훈(蓋塤)을 보내, 부절 정덕본에는 待로 되어 있으나, 을해목활자본에는 持로 되어 있다.닫기392 대나무나 돌 혹은 옥으로 만든 일종의 信標로, 그 위에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그것을 兩分하여 각각 하나씩 가지고 있다가 필요시에 합하여 眞僞를 확인하였다. 符節은 주로 외국에 가는 사신 혹은 군대 출병시의 장군 등이 지참하여 왕명을 수행하였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41-142쪽).닫기을 가지고393 정덕본에는 待로 되어 있으나, 〈을해목활자본〉에는 持로 되어 있다. 내용으로 보아 持로 수정되어야 하므로 수정해 번역했다.닫기 왕을 검교태위(檢校太衛) 계림주자사(鷄林州刺史) 영해군사(寧海軍使) 신라왕(新羅王)으로 책봉했다.위는 正1品職이다.닫기
이달에 왕이 병으로 자리에 누워 오랫동안 낫지 않았으므로 조서를 내려 말했다.
13일에 이르러 죽으니 시호를 선덕(宣德)이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