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난의 불교유산②
푸난의 불교유산②
양나라에서 연결된 푸난과 백제 네트워크
519년 천축에서 단향목으로 조각한 석가모니상과
보리수잎 등을 중국에 봉헌했다. 546년에는 중국
요청으로 불교용품 및 경전 240종류를 보낸다.
이처럼 푸난과 중국은 상호 관심을 기울였으며
교류 내용 안에 불교가 다수 포함된다.
백제와 양의 통교가 전체의 3분의1로서, ‘양서’의
기록과 구성이 대체로 비슷하면서도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몇 가지 중요한 기사를 담고 있다.
백제국사도는 6세기 초 웅진시대의 백제사 연구
특히 백제의 대외관계사에 있어 중요한 자료다.
양나라에 있어서 인도불교의 유입처 기능을 했던 푸난에 남아있는 석불들(호찌민역사박물관).
중국과 푸난의 잦은 교섭
푸난인이 해상교역에 능했음을 말해주는 여러 증거가 있다. 5세기 푸난의 수도는 현재의 파남(巴南) 부근에 있었다. 유리한 자연조건과 풍부한 산물 그리고 한 시대를 떨친 부남대박(扶南大舶)이 푸난을 강국으로 만들었다.
오나라 손권시대에 쓰인 <남주이물지(南州異物志)>에서는 대형 선박이 길이 61m 이상이고, 600~700명의 사람과 1만 호 이상의 화물을 수용한다고 했다. 부남대박은 조선술이 발달했고, 대형 선박을 건조해 무역에 임했음을 시사한다. 조선술과 항해술이 일정 수준에 도달했다는 뜻이다.
푸난이 본격적으로 중국과 소통하던 시점은 양나라 시대다. <양서(梁書)> ‘제이전(諸夷傳)’은 건강(지금의 난징)에 수도를 두고 있던 양의 활발했던 대외관계를 잘 보여준다. 484년 푸난의 사신이 백자 조각, 상아 스투파, 유리그릇 같은 진품을 봉헌한다. 양나라가 들어서면서 푸난은 502년부터 539년 사이에 무려 열세 차례나 사신을 보낸다. 중국과 푸난의 지속적인 해상교류가 존재했다는 증거들이다. 503년 산호로 만든 불상을 보냈고, 중국은 교진여도사발마(憍陳如闍邪跋摩, 인도 계통의 카운딘야, Kaundinya를 말한다)를 푸난왕으로 책봉한다. 왕의 책봉은 중국 대외 외교책인 기미체제에 푸난도 편입되었음을 뜻한다. 기록에는 없지만, 중국식 관복을 푸난 왕에게 하사했을 것이다.
519년에는 천축에서 단향목으로 조각한 석가모니상과 보리수잎, 보석 화제주(火薺珠)와 울금(鬱金), 소합(蘇合) 등을 중국에 봉헌했다. 539년에는 황제보살로 불릴 정도로 불교에 심취했던 양무제가 조를 내려 승려 운보(雲寶)에게 사자를 따라가서 부처님의 머리카락을 받아오게 했다. 푸난의 상황이 전체적으로 인도에서 건너온 불교의 유입처로 기능하고 있었으며, 양은 푸난을 매개삼아 불교를 받아들이고 있었다는 증거들이다. 546년에는 중국의 요청으로 불교 승려 파라마르타(Paramartha, 혹은 Gunaratna)와 불교용품 및 경전 240종류를 함께 보낸다. 이처럼 푸난과 중국은 상호 관심을 기울였으며 교류 내용 안에 불교가 다수 포함된다.
<남제서(南齊書)> ‘만․동남이전(蠻·東南夷傳)’에는 “송말 푸난왕의 성은 교진여(僑陣如), 이름은 사야발마(Kaundinya Jayavarman)로서 상인과 상품을 광주에 보내 교역했다. 천축 승려 나가선(那伽仙)이 화물선을 빌려 귀국하다가 풍랑을 만나 임읍에 이르러 그 재물을 모두 빼앗겼다”고 했다. 나가선은 상선을 통해 푸난까지 올 수 있었는데, 중국의 성스러운 군주가 천명을 받았다고 설명했다. 푸난과 남중국해 광주 사이에 상선이 정기적으로 오갔으며 이를 통해 송말까지 불교가 유입되고 있었다.
양나라에서 만난 푸난과 백제 사신
526∼536년 무렵 양나라에 파견된 외국인 사절을 그림으로 그려 해설한 ‘양직공도’의 백제국사도.
난징의 난징박물원(南京博物院)에는 526∼536년 무렵 양나라에 파견된 외국인 사절을 그림으로 그려 해설한 <양직공도>가 전해온다. 일부가 소실되어 현재는 12국의 사신 그림과 기록이 남아 있는데, 매우 다양한 버전이 전해온다.
사신도와 7행 160여 자의 짧은 글로 구성된 백제국사(百濟國使) 부분은 한국학계의 과도할 만한 주목을 받아왔다. 백제 사신이 양에 출현했고 그밖의 다른 나라 사신과 같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들과 국제적 교류가 있었음이 틀림없다. 백제와 양의 통교가 전체의 3분의1로서, 양서(梁書)의 기록과 구성ㆍ내용이 대체로 비슷하면서도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몇 가지 중요한 기사를 담고 있다. 백제국사도는 6세기 초 웅진(熊津)시대의 백제사 연구, 특히 백제의 대외관계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자료다.
<일본서기>의 다음 기록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성명왕(聖明王)이 전부(前部) 내솔(柰率) 진모귀문(眞牟貴文)과 호덕(護德) 기주기루(己州己婁) 그리고 물부(物部) 시덕(施德) 마기모(麻奇牟) 등을 보내어 부남의 물품과 노예 두 명을 바쳤다.” 성명왕은 백제 성왕(재위 523~554)이다. 백제와 푸난과 일본의 관계가 엿보인다. 푸난의 물자와 사람을 백제가 어떻게 확보했는지는 알 수 없다. 6세기 중엽 이미 백제와 푸난이 교섭하고 있었고, 그 결과 일본에도 푸난에 대한 정보가 들어갔음이 분명하다. 백제와 푸난이 직접 교섭한 것인지, 양을 비롯한 중국 남조(南朝)를 매개로 한 것인지는 밝혀야 할 과제다.
푸난은 초기부터 오와 국교를 맺고 활발한 인적ㆍ물적 교류를 했음은 앞에서 밝힌 바와 같다. 중국에 빈번하게 사신도 파견했다. 푸난은 268년, 285년, 287년에 서진에 사신을 보냈다. 이 시점은 마한 세력이 서진에 사신을 보낸 시점과 중첩된다. 푸난과 중국 남조가 오랫동안 교섭했을 것이다. 천축에서 당대의 무역국가 푸난으로 상선이 오고 중국에서도 상선이 푸난에 당도하고 있었다. 512년 마한과 푸난이 동시에 사신을 파견했다는 <양서(梁書)>의 기록에 백제와 푸난 사신이 동시에 그려진 것을 보면 두 나라 사신이 중국에서 조우했을 가능성이 높다.
양나라에 있어서 인도불교의 유입처 기능을 했던 푸난에 남아있는 석불들(호찌민역사박물관).
마라난타는 어디를 거쳐 왔을까
백제 불교가 바다를 통해 전파됐다는 설은 설득력 있는 주장으로 인용된다. 그 정확한 실체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이럴 때 ‘중간단계 이론’, 즉 유추하여 설득 가능한 이론을 찾아내는 것이 중요하다. 마라난타(摩羅難陀)는 384년(침류왕 원년)에 남조의 동진을 거쳐 백제로 건너왔다. <해동고승전>과 <삼국유사>에 백제에 불교를 전한 인도 승려 마라난타의 행적이 등장한다. <해동고승전>에서는 천축어로 마라난타가 동학(童學, 사미승)이라는 뜻이라 설명한다. 마라난타는 인도 북부의 간다라에서 중국으로 들어왔는데, 처음부터 불교를 전파하는 데 뜻을 두었다. 마라난타의 교화에 힘입어 백제는 392년(아신왕 원년) 2월에 ‘불법을 숭상하고 복을 구하라’라고 하는 교서를 반포한다.
마라난타는 침류왕을 설득해 불사를 봉행하며 백제 최초로 절을 창건하고 10인의 백제인을 출가시켰다. 4세기 후반 마라난타의 백제국 출현은 천축에서 중국을 거쳐 한반도에 이르는 불교의 바닷길이 존재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천축에서 중국 남조로 향하는 오랜 바닷길이 존재했을 것이다. 천축에서 직접 백제에 당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반드시 중국을 거쳤다. 그런데 천축에서 그대로 중국으로 들어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중간에 매개한 나라, 즉 징검다리 삼아서 거친 나라가 존재했다. 아무래도 푸난 같은 당대의 국제무역 국가가 주목된다.
6세기 전반, 푸난과 백제 사신이 양나라 궁궐에서 조우한 것은 느닷없는 일이 아니다. 그 이전에도 푸난은 끊임없이 사신을 양에 보냈으며, 백제도 양과 부단하게 접촉하고 있었다. 푸난 자체가 힌두와 불교를 모두 숭상하는 상황이었다.
주강현 해양문명사가 [불교신문 373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