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상왕국 촐라 나가파티남의 중국 불탑
해상왕국 촐라 나가파티남의 중국 불탑
나가파티남에 있었던 13세기 중국탑(1846년 선교사 Walter Elliot 그림)은 높이 30여m에 이르는 거대한 탑으로 인도-중국 불교관계사를 조명할 대표적 불교유적으로 꼽을 수 있다.
13세기 인도-중국 불교관계사 소중한 증거물
12~13세기 나가파티남으로 남중국의 천주
광주 등지의 상선이 많이 들어왔고 반대로
인도 상인이 남중국 항구로 들어갔다
…
나가파티남에 ‘사묘’가 세워졌고 무역상의
재력과 종교적 헌신이 탑을 가능하게 했다
높이 30여 m에 달했다는 중국탑 주변에서
근년에 많은 청동 불상이 발굴, 인도-중국
양국 교류가 번번했음을 뒷받침하고 있다
나가파티남의 중국탑
남인도 남쪽 벵갈만 해안에 중국 상선이 많이 드나들던 국제항구 나가파티남(Nagapattinam)이 있다. 중국에서 사리팔단(沙里八丹)으로 부르던 곳인데 주변에서 진주 채취로 유명했다. 원나라 시대에 <도이지략>을 쓴 왕대연은 세계를 누빈 ‘중국의 이븐 바투타’ 같은 존재다. 그는 ‘부자들은 금은으로 진주의 값을 떨어뜨려 사 두었다가, 배가 이르면 중국인에게 파니 그 이득이 어찌 가볍겠는가’라고 기록했다.
그 나가파티남 북쪽 1마일(1.6㎞) 지점에 일명 ‘중국탑(지나탑)’이라 부르는 토탑(土塔)이 있었다. 벽돌을 구워서 쌓아올린 탑이다. 남인도에서 중국인의 존재는 나가파티남에 세워진 공식적 불교사원으로 입증된다. 나가파티남에서 중국인의 불교신앙은 팔라바왕국(275~897)의 나라시마바르만(Narasihmavarman) 2세 이래로 이루어졌던 일이다. 그러나 팔라바왕국이 촐라에게 멸망한 이후, 주 항구를 나가파티남으로 옮기면서 마하발라푸람은 쇠락하게 된다.
해상강국 촐라는 왕성하게 대중국 무역에 종사하였고, 중국 상선이 빈번하게 찾아들어온 결과 중국탑을 세운 것으로 여겨진다. 탑은 원나라 시기인 1267년에 만들어졌다. <도이지략>에서 토탑에 관하여 상세하게 기록했다. 오로지 힌두의 땅으로만 알려져 있지만, 13세기에 불탑이 들어설 정도의 상황이었음을 말해준다.
“토탑은 팔단(八丹)의 평원에 있고, 나무와 바위로 둘러싸여 있는 곳에는 흙벽돌로 만든 높이 몇 장(丈) 되는 탑이 있다. 한자로 ‘함순(咸淳) 3년(1267) 8월에 공사를 마쳤다’고 쓰여 있다. 전하는 소문에 의하면 중국 사람이 그해 그곳으로 돌아와 돌에 새긴 것이다. 지금까지 마멸되지 않았다고 한다. 기후는 대체로 덥고 가을과 겨울에는 조금 썰렁하다. 풍속은 선량하다. 민간에서는 대부분 상향성불(桑香聖佛)을 모시는데 금은으로 만든 그릇으로 제사한다. 남녀는 머리카락을 자르고 몸은 칠(漆)한 것 같고 흰 천으로 싸맨다. 추장이 있다. 그곳에서는 면포, 화포(花布), 대수건포(大手巾布), 빈랑이 난다. 교역하는 상품은 설탕, 오색견, 청단(靑緞), 소목(蘇木) 등이다.”
팔라바와 촐라왕국이 있던 첸나이박물관의 불상.
남인도 최대의 해상강국 촐라
이 불탑은 촐라시대에 세워졌다. 타밀나두의 촐라는 해양실크로드 문명사에서 인도양을 ‘교역의 바다’로 물들인 나라다. 촐라는 판디아, 체라와 함께 남인도에 존재하던 삼국이다. 이들 나라는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아 늘 충돌했으며 성장과 쇠퇴를 거듭하면서 13세기까지 공존했다. 혹자는 체라와 촐라, 판디아 삼국에 팔라바까지 넣어서 사국으로 보기도 한다. 흥망성쇠를 거듭하던 팔라바는 891년 촐라에 흡수되면서 멸망했다.
해양사적 관점에서 볼 때, 해상강국으로 이름을 떨친 촐라의 약진이 주목된다. 서양인이 남인도 서해안을 코르만델이라고 부를 때, 그 자체가 촐라를 뜻하는 촐라마다람(Colamadalam)에서 나왔을 정도로 타밀에서 해양은 촐라세력이 주도권을 쥐고 있었다.
팔라바왕조의 존속 시기에 촐라왕국도 병존했다. 촐라도 기원전 3세기부터 서기 1279년까지 남인도에 존재하던 장구한 역사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촐라가 팔라바를 흡수함으로서 팔라바의 동남아 영역이 흡수된 측면도 있다. 촐라의 약진에는 기왕에 팔라바 왕국이 쌓아올린 해양력이 보태졌을 것이다. 말레이반도 등지에 퍼져있던 불교·힌두 소왕국은 인도의 왕권이 바뀌면 그대로 접수되면서 지속됐을 것이다. 이들 소왕국은 원거리에 위치하여 상대적으로 자율성을 지닌 왕국이었고, 왕권 그 자체보다 상인에 의해 경영된 ‘거점 식민도시’ 성격을 지녔기 때문이다.
왕성한 해상활동을 말해주는 팔라바왕국의 동전.
촐라는 전기와 중기, 후기를 나누어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스리랑카를 경영하는 등 기반을 확장해나가던 초기 촐라는 체라·판디아 연합군에게 밀리며 쇠퇴하게 된다. 마침내 250년경 판디아에 점령당하면서 전기 촐라는 막을 내린다. 촐라 부족들은 한동안 약소왕국으로 근근 명맥을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조용히 명목을 유지하던 촐라가 9세기 후반부터 다시 부상한다. 역사는 ‘갑작스레’ 촐라가 9세기에 부상한 것으로 서술하는 경향이 강하나, 촐라 상인이 끊임없이 국제무역에 종사해 부를 축적하고 있었다. 촐라의 번영에 노련한 촐라 상인과 경제력이 뒷받침되어 있었던 것이다.
촐라는 9세기부터 13세기 중엽까지 존립했다. 300여 년 동안 남아시아에서 동남아까지 세력을 떨치는 해상제국으로 번영했다. 촐라 해군력은 중세 인도 해군력의 절정이다. 촐라 해군은 대양해군으로서의 자질을 갖추고 100만의 병력을 보유한 아시아 최대의 해군이었다. 중세 촐라시기에 해당하는 9~11세기 동안 해군 규모는 점차 커지고 지위 또한 높아졌다. 촐라 해군은 당시 아시아에서 강력한 해양 및 외교부대로 성장했다. 해상무역로 또한 아라비아에서 중국으로 확장됐다.
프랑스 선교사가 목격하고 기록하다
기왕의 촐라왕국 수도가 내륙으로 들어간 강항이었다면, 대단위 원정 등을 위하여 코르만델 해변에 해항(海港)을 만들게 된다. 나가파티남은 촐라 후반기(9~12세기)에 번성하던 항구다. 해군이 주둔했고, 국제 상선이 출발하던 곳이다. 석호(lagoon)의 모래톱이 발달하여 외해로부터 방어해주는 천연 항구로 입지조건이 우수하여 그 안쪽에 선박이 머물렀다. 12~13세기에 나가파티남으로 남중국 천주, 광주 등지의 상선이 많이 들어왔고, 반대로 인도 상인이 남중국 항구로 들어갔다.
그러다보니 나가파티남에 사묘(寺廟)가 세워졌다. 반대로 천주에는 1218년 촐라왕국에 의해 힌두사원이 세워졌다. 무역 상인의 재력과 종교적 헌신이 탑을 가능하게 했다. 높은 탑을 조성하려면 많은 비용이 요구되었을 것이다.
1867년 프랑스 예수회 선교사가 마침 이곳을 방문하여 벽돌과 목재로 만들어진 중국탑을 목격했다. 탑은 높이가 30여 m에 달했다고 한다. 선교사는 그림으로 그려서 기록으로 남겼다. 근년에는 탑 주변에서는 많은 청동 불상이 발굴되는 등 주변 불적이 확인되었다. 이 탑은 인도-중국 불교관계사의 소중한 증거물이다. 그만큼 양국의 교류와 통상이 빈번하고 총량이 많았기에 탑을 세울 정도로 재력이 뒷받침됐고, 상호 방문이 번번했다는 증거다. 불교의 저력은 녹녹하지 않게 남인도 바닷가에서 13세기에 증거를 남긴 것이다.
주강현 해양문명사가 [불교신문 371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