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군조선과 고대중국의 관계역사(단군조선 번한, 마한과 하은주의 관계역사 13)

은(殷)나라 제15대왕 옥갑(沃甲)
은(殷)나라 왕 옥갑(沃甲)은 서기전 1490년부터 서기전 1466년까지 25년 재위하였다. 

은(殷)나라 제16대왕 조정(祖丁)
은(殷)나라 왕 조정(祖丁)은 서기전 1465년부터 서기전 1434년까지 32년 재위하였다.

은(殷)나라 제17대왕 남경(南庚)
은(殷)나라 왕 남경(南庚)은 서기전 1433년부터 서기전 1409년까지 25년 재위하였다.


은(殷)나라 제18대왕 양갑(陽甲)
은(殷)나라 왕 양갑(陽甲)은 서기전 1408년부터 서기전 1402년까지 7년 재위하였다.

은(殷)나라 제19대왕 반경(盤庚)
은(殷)나라 왕 반경(盤庚)은 서기전 1401년부터 서기전 1374년까지 28년 재위하였다.
반경(盤庚)은 수도를 다시 박(亳)으로 옮겼다. 반경(盤庚) 이전의 나라를 상(商)이라 하고 반경(盤庚) 이후를 은(殷)나라로 부르기도 한다. 

 

은(殷)나라의 수도는 처음 시조 성탕(成湯)이 하남성의 박(亳)에 두었다가, 서기전 1560년경에 제10대 중정(仲丁)이 하남성의 효(囂)로 옮겼으며, 서기전 1530년경에 제12대 하단갑(河亶甲)이 하북성의 상(相)으로 옮겼으며, 제13대 조을(祖乙)이 산서성의 경(耿, 刑)으로 옮겼다가 다시 산동성의 비(庇)로 옮겼고, 제17대 남경(南庚)이 산동성의 엄(奄)으로 옮겼으며, 제19대 반경(盤庚)이 다시 박(亳)으로 옮겼던 것이 된다. 그리하여 은(殷)나라의 수도는 최소한 6군데가 된다.

 

여기서 동서남북중으로 보면 산동성의 수도 비(庇)와 엄(奄)은 동경(東京), 동박(東亳)에 해당하고, 산서성의 수도 경(耿)은 서경(西京), 서박(西亳)에 해당하고, 하남성의 수도 효(囂)는 남경(南京), 남박(南亳)에 해당하며, 하북성의 수도 상(相)은 북경(北京), 북박(北亳)에 해당하고, 박(亳)은 중경(中京), 중박(中亳)에 해당하게 된다.


은(殷)나라 제20대왕 소신(小辛)
은(殷)나라 왕 소신(小辛)은 서기전 1373년부터 서기전 1353년까지 21년 재위하였다.

은(殷)나라 제21대왕 소을(小乙)
은(殷)나라 왕 소을(小乙)은 서기전 1752년부터 서기전 1325년까지 28년 재위하였다. 
서기전 1337년 갑진년(甲辰年) 소태(蘇台)단군 때 은주(殷主) 소을(小乙)이 조공하였다.<단군세기(檀君世紀)>
서기전 1337년은 은(殷)나라 왕 소을(小乙)의 16년이 되는 해가 된다.

은(殷)나라 제22대왕 무정(武丁)
은(殷)나라 왕 무정(武丁)은 서기전 1324년부터 서기전 1266년까지 59년 재위하였다.
무정(武丁)을 고종(高宗)이라고 부르는데, 은(殷)나라 주변의 단군조선 제후국들을 침공하여 무력을 펼쳤으나, 단군조선 본국(眞朝鮮, 眞韓)의 정벌을 받고 굴복하여 조공을 바쳤다.

삼국유사에서는 은(殷) 무정(武丁) 8년에 단군조선이 망하고 164년 후인 서기전 1122년에 은(殷)나라 기자(箕子)가 주무왕(周武王)에 의하여 조선(朝鮮)에 봉해졌다 기록하고 있으나, 은(殷)나라 무정(武丁) 8년은 서기전 1317년이 되어 서기전 1122년의 164년 이전이 되는 서기전 1286년과는 31년의 시차를 보이고 있다. 그래서 삼국유사의 기록은 중국기록만 보고서 계산한 것이며, 서기전 1286년은 은(殷)나라 무정(武丁) 39년이 되는 해가 되고, 3년상을 계산하면 38년이 된다. 삼국유사의 연대계산은 명백한 오류이다.

서기전 1291년 경인년(庚寅年)에 은주(殷主) 무정(武丁)이 귀방(鬼方)을 이기고 재침하였으나 은(殷)이 대패하여 화해를 청하고 공물을 바쳤다.<단군세기(檀君世紀)>
서기전 1291년은 은(殷)나라 무정(武丁) 34년이 되는 해이다.

여기서 귀방(鬼方)은 단군조선의 번조선과 은(殷)나라의 국경 부근으로서, 북경 서쪽이자 태원의 북쪽으로 추정되는데, 방향을 가리키는 말로 된 지역 이름이 되며, 북쪽이나 서남쪽을 귀신이 드나드는 방향이라고 하는 바, 은(殷)나라로 보면 북쪽이 귀방(鬼方)이 되고 단군조선으로 보면 서남쪽이 귀방(鬼方)이 되므로 위치상으로 일치하게 된다. 은(殷)나라의 북쪽과 단군조선의 서남쪽 즉 번조선의 서쪽은 주로 흉노족(匈奴族)들이 활동하던 무대였는데, 북적(北狄)에 해당하는 구이(九夷)의 땅임을 알 수 있다.

서기전 1289년 임진년(壬辰年)에 개사원(蓋斯原) 욕살(褥薩) 고등(高登)과 서여(西余)가 귀방(鬼方)을 멸하여 은(殷)나라 무정(武丁)을 토벌하였다. <단군세기(檀君世紀)>
서기전 1289년은 은(殷)나라 무정(武丁) 36년이 되는 해이다.

고등(高登)은 단군조선의 개사원(蓋斯原) 욕살(褥薩) 출신으로서 서기전 1287년 우현왕(右賢王)이 되었고, 이 고등(高登)의 손자인 색불루(索弗婁)가 서기전 1286년 세습하여 우현왕(右賢王)이 되었으며, 서기전 1286년에 소태(蘇台) 단군으로부터 선양(禪讓)을 받아 즉위하여 후기 단군조선의 시조가 되었다.

서여(西余)는 전기 단군조선의 종실로서 환서여(桓西餘)이며 서우여(徐于餘)라고도 기록되는 인물이다. 해성(海城)의 욕살(褥薩)로서 서기전 1286년에 소태(蘇台) 단군으로부터 살수(薩水)의 기수(奇首)로 봉해졌다가, 소태(蘇台) 단군이 서여(西余)에게 선양(禪讓)하려 하자 우현왕(右賢王) 색불루(索弗婁)와 마한(馬韓) 아라사(阿羅斯)가 극구 반대하는 바람에 무산되었고, 결국 우현왕(右賢王) 색불루(索弗婁)가 군사력을 기반으로 단군으로 즉위하여 소태(蘇台) 단군으로부터 선양을 받자, 소태(蘇台) 단군이 서우여(徐于餘)를 서인(庶人)으로 폐하였던 것이다. 이에 서우여(徐于餘)가 몰래 좌원(坐原)에서 군사를 일으키니 색불루(索弗婁) 단군의 신하인 개천령(蓋天齡)이 이때 전사하자 색불루(索弗婁) 단군이 직접 나서서 서우여(徐于餘)를 토벌하기 전에, 서우여(徐于餘)를 번한(番韓)으로 봉하겠다 설득하니, 서우여(徐于餘)가 이를 받아 들여 후기 단군조선의 번한의 시조가 되었던 것이다.

욕살(褥薩)은 고구려 때의 지방장관처럼 단군조선 시대에 단군 천왕으로부터 봉해진 지방장관이 된다. 때에 따라 욕살(褥薩)이 제후인 한(汗, 지방 왕)으로 승진되어 봉해지기도 하였다.

서기전 1285년 병신년(丙申年) 11월 단군 색불루(索弗婁)가 친히 구한의 군사를 이끌고 여러 차례 싸워 은(殷)나라 수도를 격파하여 화친을 맺었으나 다시 크게 싸워 대파하였으며, 이해에 은(殷)나라 무정(武丁)은 사신을 파견하여 조공을 약속하였다.<단군세기(檀君世紀)>
서기전 1285년은 은(殷)나라 무정(武丁) 40년이 되는 해이다.

이때 은(殷)나라의 수도는 서기전 1401년에 후기 은(殷)나라를 시작한 제19대 반경(盤庚)이 수도를 삼았던 곳으로서 소위 은허(殷墟)로 불리는 지금의 안양(安陽)인 하남성의 박(亳)이다.

서기전 1284년 정유년(丁酉年) 2월에 단군 색불루(索弗婁)가 은(殷)나라 군사를 추격하여 황하(黃河) 주변에서 승전의 축하를 받고 변한(弁韓)의 백성들을 회대(淮岱) 땅으로 옮겨 가축을 기르고 농사를 짓게 하였다.<단군세기(檀君世紀)>
서기전 1284년은 은(殷)나라 무정(武丁) 41년이 되는 해이다.

 

여기서 변한(弁韓)은 번한(番韓)을 다르게 표기한 것이 되고, 회대(淮岱)는 회수(淮水)와 대종(岱宗)인 태산을 가리킨다.
이때 단군조선의 색불루 천왕이 은(殷)나라 땅 깊숙이 정벌하여 호전적이던 은(殷)나라 왕 무정(武丁)의 버릇을 고친 것이 된다.

서기전 1280년 신축년(辛丑年)에 은주(殷主) 무정(武丁)이 번한(番韓)을 거쳐 천왕(단군)에게 글을 올리고 방물을 바쳤다.
서기전 1280년은 은(殷)나라 무정(武丁) 45년이 되는 해이다.

이때 번한(番韓)의 임금은 서여(西余, 徐于余)이다. 천자(天子) 무정(武丁)이 상국(上國)이 되는 천왕격(天王格)의 나라인 번한(番韓)을 통하여 그 상국(上國)인 진조선(眞朝鮮) 천왕(天王)에게 조공을 바친 것이 된다.

서기전 1266년 을묘년(乙卯年)에 22대 색불루(索弗婁) 단군 때 남국(藍國)이 강성하여 고죽군(孤竹君)과 함께 적(은나라)을 쫓아 남으로 엄독홀(奄瀆忽)에 이르러 은(殷)나라 국경 근처에 거하고, 여파달(黎巴達)로 하여금 병사를 나누어 진격하여 빈(邠), 기(岐)의 땅에 웅거하도록 하여 유민들과 나라를 세워 여(黎)라고 하였으며, 서융(西戎)과 함께 은(殷)나라의 제후들 사이에 차지하도록 하였으니, 천황의 교화가 멀리 항산(恒山) 이남의 땅까지 미쳤다.<단군세기(檀君世紀)>
서기전 1266년은 은(殷)나라 무정(武丁)의 마지막 해인 59년이 되는 해이다.

여기서 남국(藍國)은 단군조선의 군국(君國)으로서 산동지역에 있던 소위 남이(藍夷)라고 기록되는 나라이다.
여기서 보면 고죽국(孤竹國)은 남국(藍國)과 함께 은(殷)나라를 공격한 것이 되어 단군조선의 제후국임이 분명해진다.

엄독홀(奄瀆忽)은 서기전 1430년경 은(殷)나라 제17대 남경(南庚)이 수도로 삼았던 엄(奄)이 있던 곳이 되는데, 이때에 이르러 다시 단군조선의 영역이 된 것이다.
여파달(黎巴達)은 여씨(黎氏)가 되고 나라에 공을 세워 빈(邠), 기(岐)의 땅에 세운 나라를 여(黎)라 한 것이 된다.

빈(邠)과 기(岐)는 관중(關中)에 있는 땅으로 견이(畎夷)가 사는 곳이기도 한데, 서기전 1200년경 은(殷)나라의 서방 제후국이던 주(周)나라의 근거지이기도 하다.

서융(西戎)은 서쪽에 있던 융족(戎族)을 가리키는데, 서이(西夷)를 낮추어 부른 명칭이 되고, 서이(西夷)는 곧 단군조선의 구이(九夷) 중의 하나인 백이(白夷)가 된다. 여기 서융(西戎)에는 은(殷)나라 북쪽의 이족이 되는 흉노(匈奴)나 견이(畎夷)들이 빈(邠), 기(岐)의 땅으로 옮겨가 살았던 것으로 보아 이들을 통칭한 것이 된다.

항산(恒山)은 태항산맥(太行山脈)에 있는 산으로서 고대중국의 동서남북의 4악 중 북악(北岳)이 되는데, 단군조선의 군국(君國)인 고죽국(孤竹國)과 제후국(諸侯國)인 기후국(箕侯國)의 사이가 되는 태항산맥(太行山脈) 중 해발 약 3,000미터가 되는 지금의 오대산(五臺山)이 될 것이다.

은(殷)나라 서쪽에는 세부적으로 서이(西夷), 견이(畎夷), 서융(西戎), 종융(踵戎), 여(黎) 등의 나라가 있는 것이 된다.

이상의 은(殷)나라 무정(武丁)과 관련된 기록은 은(殷)나라 644년 중에서 말기의 200년간의 역사가 되는데, 서기400년경 신라시대 박제상(朴堤上) 선생이 지은 부도지(符都誌)에서, 부루씨(夫婁氏)가 천부삼인(天符三印)을 이어받아 천웅(天雄)의 법(法)을 행하고, 일찍이 운해주(雲海州)와 긴밀하게 연락하여 하토(夏土)가 하나로 돌아오기를 시도하였으나 이도(異道)가 심하여 마침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는 기록과 일맥상통한다.

즉, 색불루(索弗婁) 천왕이 후기 단군조선을 막 시작하고서, 운해주(雲海州)에 해당하는 중국내륙 중에서 황하 남쪽이자 양자강 유역 사이가 되는 회대(淮岱)지역의 단군조선의 제후국인 남국(藍國) 등과 함께 도(道)를 잃은 무정(武丁)의 은(殷)나라를 공격하여 통일을 이루고자 하였으나, 하(夏)나라 땅을 이어 하(夏)나라의 제도(制度)를 그대로 답습한 은(殷)나라가 결국 다른 길을 감으로써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을 가리키는 것이 된다.

 

출처; 데일리전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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