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군조선 연대기( 흘달천왕의 역사 81)

조선(朝鮮) 제13대 흘달(屹達) 천왕(天王)의 역사

 

지방행정 단위인 주현(州縣)을 정하다 
서기전 1767년 갑오년(甲午年)에 주(州)와 현(縣)을 정하고 직책의 분권제도를 세웠다. 관리는 권력을 겸하지 않고 정치는 법칙을 넘어 섬이 없으니, 백성들은 고향을 떠나지 않고 스스로 일하는 곳에서 편안하여 거문고 노랫소리가 넘쳐 흘렀다. 

단군조선 초기에 이미 경(京), 이궁(離宮), 국(國), 주(州), 원(原), 성(城), 읍(邑), 구(區), 가(家) 등의 행정단위가 정립되었던 것이 되는데, 이때에 이르러 주(州)와 현(縣)의 제도를 재정비한 것이 된다.

여기서 국(國)은 군후국(君侯國)을 가리키는데 소국(小國)은 대략적으로 지름 100리(里) 이상의 나라가 될 것이고, 주(州)는 국토를 크게 나눈 지역단위가 되며, 원(原)은 그 크기가 주(州)보다는 적으며 지방장관인 욕살(褥薩)이 봉해지는 행정단위가 되고, 성(城)은 성곽을 가진 도시(都市)를 가리키고 지방장관인 욕살이 봉해지는 행정단위가 되며 경우에 따라 국(國)이 되기도 한다.

또, 현(縣)은 주(州)와 원(原)보다 적은 행정단위가 되고, 읍(邑)은 성곽이 없는 도시로서 대략 반지름이 10리(里) 정도에 걸치는 마을들의 중심지 역할을 하면서 최소한 10가(家) 이상으로 이루어지며, 구(區)는 4가(家)로 이루어지고, 가(家)는 대략 20호(戶) 정도로 이루어지는 것이 되며, 1호(戶)에는 대략 10명의 식구(食口)가 있는 것이 된다. 

주(州)와 현(縣)을 정하고 분직(分職)의 제도를 세웠다는 것은 주와 현의 관리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권력의 범위 내에서만 권력을 행사하며 다른 직책을 겸하지 않고, 법과 규칙에 따라 다스리게 하였다는 것인데, 환배달조선의 삼사오가 제도 또한 권력분립을 기초로 하고 있는 것이 된다.

주와 현의 관리들이 정치를 잘하여 이에 백성들이 고향을 버리지 않고 정착하여 일하는 곳에서 스스로 편안함을 즐기어 거문고를 타며 노래부르는 소리가 온땅에 넘쳐 흘렀다는 것이 된다. 그야말로 태평시대이다. 

하은(夏殷)의 전쟁과 단군조선의 원조(援助), 하나라 멸망과 은나라 건국
서기전 1767년 겨울에 은(殷)나라 사람이 하나라를 정벌하니 하나라 왕 걸(桀)이 도움을 청하였으며, 흘달 천왕이 읍차(邑借) 말량(末亮)으로 하여금 구환(九桓)의 군대를 이끌고 가서 전쟁일을 돕게 하니, 탕(湯)이 사신을 보내 사죄하였다. 이에 말량에게 명을 내려 돌아오게 하였는데, 걸(桀)이 그것을 어기고 병사를 보내어 길을 막고 금지맹약(禁止盟約)을 깨려고 하였다. 결국 은나라 사람들과 함께 하나라 걸을 정벌하기로 하여 몰래 신지(臣智) 우량(于亮)을 파견하여 견군(畎軍)을 이끌고 가서 낙랑(樂浪)과 합쳐서 관중(關中)의 빈기(邠岐)의 땅으로 진격하여 그곳에 머물며 관제(官制)를 설치하였다. 이때 번한(番韓) 소전(少佺)이 장군 치운(蚩雲)을 파견하여 탕(湯)을 도와 걸(桀)을 치게 하였다. 

서기전 1767년은 하(夏)나라가 멸망하기 1년전이 되는데, 이윤(伊尹)을 재상(宰相)으로 삼은 은(殷)나라의 탕(湯)이 군사를 일으켜 하나를 정벌하자 하나라 걸왕이 단군조선에 구원을 요청하였고, 이에 단군조선에서는 하나라에 가까운 지역에 있는 마을의 읍차인 말량(末亮)으로 파견하여 단군조선 구한(九桓)의 군대를 이끌고 가서 전쟁을 돕게 하니, 탕(湯)이 사신을 보내 사죄하였던 것이다.

은탕이 사죄하자 이에 흘달 천왕께서 명을 내려 말량에게 회군(回軍)하도록 하였던 것인데, 하나라 걸(桀)은 단군조선이 주선이 되어 맺은 단군조선과 하나라와 은나라 상호간에 맺었던 은 맹약을 어기고 병사를 보내어 길을 막고서, 하지 말자고 하였던 금지맹약(禁止盟約)을 깨려고 하였던 것이다.

이에 단군조선은 결국 은나라 사람들과 함께 하나라 걸을 정벌하기로 작전을 짜서 몰래 신지(臣智) 우량(于亮)을 파견하여 견군(畎軍)을 이끌고 가서 낙랑(樂浪)과 합쳐서 관중(關中)의 빈기(邠岐)의 땅으로 진격하여 그곳에 머물며 관제(官制)를 설치하였던 것이다.

여기서 견군(畎軍)은 견족(畎族)의 군대를 가리키는 것이 분명한데, 견족은 삼위산(三危山)을 중심으로 하고, 백족(白族, 西夷)이 살던 서안(西安)에 걸쳐 활동하던 부족(部族)이 되며, 서기전 3897년경 한웅천왕의 배달나라 개천시에는 삼위산으로 가서 천자격(天子格)의 가한(可汗)이 된 반고(盤固)가 다스렸고, 이후 배달조선의 견족으로서 9족의 하나에 속하며, 고대중국 기록에서는 견이(畎夷)로 불리고, 후대의 역사상에서는 터키의 선조가 되는 돌궐부족이 되는 것이다.

단군조선 진한(眞韓)에서 흘달 천왕이 군사를 내어 은나라를 돕게 할 때, 번한(番韓) 땅의 번한(番韓) 소전(少佺)도 장군 치운(蚩雲)을 파견하여 탕(湯)을 도와 걸(桀)을 치게 하였던 것이며, 은탕(殷湯)의 군사와 합공으로 하나라 걸왕의 군사를 남소(南巢)로 내 몰아 내고 멸망시킨 것이 된다.

은탕(殷湯)의 즉위를 축하하다 
서기전 1766년 을미년(乙未年)에 번한(番韓) 소전(少佺)이 묵태(墨胎)를 보내어 은탕의 즉위를 축하해 주도록 하였다. 

묵태(墨胎)는 단군조선의 비왕(裨王)인 번한 소전의 명을 받아 은나라 탕왕의 즉위를 축하해 준 인물인데, 역사상 고죽국의 임금(君)이었다. 번한(番韓)은 단군조선의 서보(西堡)의 장(長)에 해당하는 비왕(裨王)으로서 천왕격(天王格)에 해당하고, 단군조선의 군(君)은 천군(天君)에 해당하여 제사장을 겸하는 지위에 있다. 즉 고죽국의 임금인 묵태는 천군(天君)으로서 천왕격이 되는 번한(番韓)의 아래 직위에 해당하고, 고죽국은 번한관경에 속하는 것이 된다. 

한편, 단군조선의 군국(君國)의 임금인 군(君)은 천군(天君)으로서 천자(天子)보다 윗자리가 된다. 그리하여 묵태(墨胎)는 천군(天君)으로서 천왕격인 번한(番韓)의 명을 받아 천자(天子)인 은탕(殷湯)의 즉위를 축하한 것이다. 즉 이는 결국 단군조선이 은탕(殷湯)을 하(夏)나라를 이은 천자(天子)로 인정한 것이 된다. 반면에 서기전2224년에 세워진 하나라의 시조 우(禹)는 반역자로 낙인 찍혔던 것이며 천자로 즉위축하를 받지 못하였고 이후 약 30년간 단군조선의 사자였던 유호씨와 전쟁을 하다가 진중(陣中)에서 사망하였다. 

고죽국은 도산회의(塗山會議)가 있었던 시기인 서기전 2267년경에 봉해진 단군조선의 군국(君國)으로서 광의의 제후국(諸侯國)에 속하며, 지방의 일반 제후국이 볼 때는 천군국(天君國)이 되는데, 천자(天子)는 제사장의 권한이 없으나 천군(天君)은 천왕(天王)과 천제(天帝)와 더불어 제사장의 권한을 지닌다. 천자는 명을 받아 천제를 올릴 수 있는 것이며 스스로는 보고의식(報告儀式)으로서 봉선(封禪)을 행할 뿐이다.  

고죽국의 수도는 고죽성(孤竹城) 또는 무체성(無棣城)이라고도 불리며, 지금의 북경 동남쪽에 위치하는 천진(天津) 부근이나 탁수(𣵠水) 지역에 위치하였던 것이 된다. 고죽국의 수도인 무체성의 서북쪽이 되는 유수(濡水)의 상류지역에 단군조선의 요중(遼中) 12성(城)의 하나였던 영지성(永支城)이 소재하였다.  

고죽국의 서쪽에는 태항산(太行山) 넘어로 서기전 1122년 이후에는 은나라 망명자인 기자(箕子)의 기후국(箕侯國)이 있었고, 고죽국의 남쪽에는 서기전 1122년경 이후로 연(燕)나라가 위치하고, 고죽국의 동남쪽에는 단군조선의 군국(君國)인 청구국(靑邱國)과 남국(藍國)이 산동지역에 소재하였으며 서기전 1122년경 이후에는 주(周)나라 제후국인 제(齊)나라가 산동지역의 일부에 위치하였던 것이 된다. 

 

출처; 브레이크뉴스 천산태백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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