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녀양모(貧女養母)


효종랑(孝宗郞)남산(南山) 포석정(鮑石亭) 혹은 삼화술(三花述)에서 놀 때, 문객(門客)이 매우 빨리 뛰어왔는데, 두 사람의 객(客)이 홀로 늦었다. 효종랑(孝宗郞)이 그 까닭을 묻자, 말하길, “분황사(芬皇寺)의 동쪽 마을에 나이가 스무 살 가량의 여자가 눈 먼 어머니(盲母)를 안고 서로를 부르며 울고 있었다. 같은 마을사람에게 물으니, 말하길, “이 여자의 집이 가난하여, 끼니를 구걸하여 부모의 은혜를 갚은 지 몇 년입니다. 때마침 흉년이라, 문에 기대어 빌릴 수단이 어려워져, 남에 집에 품팔이를 하여 곡식 30석을 얻어, 부잣집에 맡기어 두고 일을 하였습니다. 해질 무렵 쌀을 싸서 집에 와서 밥을 지어드리고 함께 자고, 새벽이 되면 부잣집에 일을 하러 돌아가니, 이와 같은 것이 며칠이 되었습니다. 어머니가 말하길, “옛날에 거친 식사(糠粃)에도 마음은 편안했으나, 근래에 향기로운 맵쌀(香秔)에도 가슴을 찌르는 것 같아 마음이 편안하지 않으니 어찌된 일인가?” 하였다. 여자는 그 사실을 말하니, 어머니는 통곡하고, 여자는 자신이 단지 입과 배(口腹)를 봉양하기만 하면서, 부모 앞에서 얼굴 빛 관리(色難)를 잘 하지 못한 것을 한탄하며, 까닭에 서로를 안고 우는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이것을 보느라 늦었습니다.”라고 하였다.
효종랑(孝宗郞)은 그것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곡식 1백 휘(斛)를 보냈고, 효종랑(孝宗郞)의 부모도 또한 의복 1습(襲)을 보냈으며, 효종랑(孝宗郞)의 천 명의 무리(徒)는 조(租) 1천 석(石)을 거두어 그것을 보냈다. 이 일이 임금님의 귀에까지 닿았는데, 이때 진성왕(聖王)은 곡식 500석과 집 1채를 하사하였으며, 병사를 보내어 그 집을 지키게 하여 도적을 경계하였다. 또 그 방(坊)에 기(旌)를 세워 효녀가 봉양한 마을(孝飬里)이라 하였다. 후에 그 집을 기부하여 절이 되었는데, 이름을 양존사(兩尊寺)라 하였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