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 이어온 동방의 빛

아도화상(阿度和尙)

 

 

一放禪風吹雲裡 

桃紅李白現眞光  

非徒五濁開疑塞   

能使群生到淨方

 

한 선풍을 놓아 백운 속에 부니 

붉은 복사꽃 흰 오얏꽃 아름답게 피네

오탁에 막힌 의심을 열게 할 뿐만 아니라

능히 모든 중생들을 정토에 이르게 하네.

 

도리사에 모셔져 있는 아도(阿度, 357~?)스님 진영에 적혀 있는 영찬이다. 아도스님 진영은 1921년에 용하법우(龍河法雨)스님을 증사로 모시고 남하경순(南化敬順)스님이 도감을 맡아 화승 벽산찬규(碧山璨奎)스님이 조성했다. 영찬을 지은 이는 알 수 없으나 찬문을 통해 도리사를 창건하여 세상의 혼탁함을 없애고 중생을 구제한 아도스님의 공덕을 찬탄하고 있다. 현전하는 아도스님의 진영은 20세기 전반에 조성됐으나 도리사의 <동방불법시통아도대화상영당중수기(東方佛法始通阿度大和尙影堂重修記)>의 현판에 따르면 영당을 건립해 진영을 모시고 예를 표하는 전통은 적어도 조선후기부터 이어져 왔다. 

 

아도스님은 삼국시대에 고구려와 신라의 접경지인 경북 선산에 불교의 씨앗을 뿌린 분이다. 1655년 도리사에 세워진 아도화상사적비(阿度和尙事蹟碑)에 의하면 스님은 고구려 출신으로 16세에 사신을 따라 아버지 아굴마(阿掘摩)가 있는 중국 위나라로 넘어가 출가해 아도(阿度)라는 도첩을 받고 현창(玄暢)스님에게 아도(我道)라 법명을 받았다. 이후 19세에 귀국해 어머니의 뜻을 따라 눌지왕(417~457)이 다스리는 신라로 넘어와 선산의 모례(毛禮) 집에 머물며 스스로 묵호자(墨胡子)라 했다. 

 

아도스님이 모례의 집에 머물 당시 한 겨울에도 오색의 복사꽃(桃李)이 핀 자리가

있어 그 곳에 암자를 지었는데 바로 이곳이 도리암(桃李庵)이다. 행장과 도리사 창건설 외에도 사적기 말미에는 아도스님이 입적하였는데 간 곳을 모르자 세상에서는 도리사 뒤편의 금수굴(金水窟)이 입적처로 지금도 재일(齋日)이며 등을 켠 것처럼 빛이 난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또 아도스님이 심은 복숭아나무의 두 가지가 해를 번갈아 천년을 살아나고 시들었는데 병자호란이 있던 1636년에 시들기 시작하여 4년이 지난 1639년에 모두 말라버렸다는 이야기를 기록해 천년을 넘어 이어지는 아도스님과 도리사의 인연을 강조했다. 

 

사적비가 세워지고 수백 년이 지난 1921년 스님의 진영을 새로 조성하면서 선정에 든 아도스님이 앉아 있는 자리 아래 화사하게 피어오른 복사꽃을 그려 시공을

초월해 전설처럼 전해져오는 아도스님과 도리(桃李)와의 인연을 기념비적으로 표현했다. 

 

해제=정안스님 설명=문화부 문화재팀장 이용윤 [불교신문328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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