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해양불교

 

한반도 불교 바닷길은 ‘미궁’, 전면 재인식돼야 한다

구법승 14명 가운데 신라 출신으로 명시된 이는
12명, 백제·고구려가 각 1명. 14명 가운데 9명이
대당서역구법고승전에 수록된 7세기 구법인들이다

이는 공인 수치만을 뜻할 뿐, 전체가 확인된 것은
아닐 것이다. 바람처럼 떠났다가 바람처럼 사라진
구법승도 많았기 때문이다, 가령 혜초 같은 인물은…

 

불교의 바닷길 전래에서 한반도의 정점은 가야라 할 수 있다. 사진은 가야선박 토기 

 

뛰어났던 가야와 백제의 해양력
불교의 바닷길에서 한반도의 정점은 가야다. 문제는 자료가 제한적이고 일찍이 잊힌 바닷길이 됐다는 데 있다. 가야의 글로벌 인식을 잘 보여주는 사례는 허황옥의 표착이다. 일연의 <삼국유사>에 48년 아유타왕국의 공주 허황옥이 원해 항해로 인도와 연결됐을 가능성을 제시한다. 허황옥 출신지인 아유타의 위치에 대해서 의견이 분분하다. 풀리지 않는 숙제는 허황옥이 가락국에 당도하는 긴 여정이다.

1세기 중엽의 항해 기술상 인도에서 곧바로 가야까지 직항은 쉽지 않다. <한서지리지> 남방 노선을 보건대, 남중국해를 거쳐서 한반도 남해안으로 표착하는 것은 험난한 바닷길과 먼 여정을 고려한다면 쉽지 않은 항해다.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 항해가 가능했을 지를 증명하는 것은 또 다른 과제다. 그러나 불비한 근거에도 불구하고 높은 수준에 도달한 가야의 바닷길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가야불교의 원형을 찾고 가야사를 바로잡으려는 경남지역 불교계의 노력이 주목되는 이유다.

바닷길 불교에서는 백제도 중요하다. 3세기 후반의 대 중국교섭은 <진서(晉書)>에서 확인된다. 4세기 백제와 동진 관계가 각별했고, 교역도 있었다. 한성백제의 풍납토성에서 발굴된 동진 계통의 초두(斗), 석촌동 고분의 동진 청자와 배 젓는 노는 백제와 동진 사이의 교류를 반영한다.

남중국해 및 머나먼 동남아까지 연결된 해양실크로드와의 연관성은 6세기 전반기 성명왕(성왕) 기록에 백제와 푸난(扶南), 일본의 관계에서 엿보인다. 해상왕국 푸난의 물자와 인간을 백제가 어떻게 확보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6세기 중엽에 백제와 푸난은 교섭했고, 그 결과 일본열도에도 푸난에 대한 정보가 들어갔음이 <일본서기>에 등장한다.

백제로 건너온 물품과 노예가 백제와 푸난의 직접 교섭으로 인한 것인지, 양(梁)을 비롯한 남조(南朝)를 매개로 한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양서>에 따르면 백제가 수차례 사신을 파견하는 기록이 등장한다. 푸난에서 중국을 거쳐서 백제까지 물품과 노예가 건너온 것으로 보는 것이 설득력 있다.

526∼536년 무렵 양에 파견된 13개국 외국 사절을 그리고 해설한 ‘양직공도’에 백제사신도가 있다. 분할된 남조 정권은 주변 제국과의 친교를 통하여 헤게모니를 쥐려고 했으며, 페르시아로부터 백제와 왜에 이르기까지 외교교섭을 진행했다. ‘양직공도’가 6세기 초반의 사실을 담고 있다면 백제는 섬진강을 넘어 다른 지역까지 영향력을 행사하는 강대한 나라가 됐다고 볼 수 있다.

백제의 항해술에 관해서는 구체적 자료가 없다. 그러나 3세기 후반 고이왕은 서진에 여덟 차례 사절을 파견했다. 근초고왕 때부터는 남조와 빈번하게 통상했고, 황해 남부를 거쳐 남해를 돌아 왜와 교류했다. 남해안 영산강 유역 역시 대외 해양교역의 중요 거점이었을 것이다. 백제와 왜는 서로 필요해서 가까워지려고 노력한 흔적이 다수 보인다. 백제가 원거리 항해를 통해 남조 및 왜와 교류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항해술이 뛰어났음을 말해준다. 불교가 이를 통하여 전래되었음은 당연지사다.

금동십일면천수관음보살좌상(조선시대, 국립중앙박물관).


바닷길을 통한 불교 남래설
불교가 바다를 건너와 당도했다는 남래설의 증거는 도처의 사찰 연기설화에 보인다. 금강산 유점사 사적기와 유점사 월씨금상문(月氏金像文)에 53불(佛)이 내박했다는 기록이 좋은 예다. 부처가 이적한 후에 문수보살이 사람 3억명을 모아놓고 교화했는데, 그들이 부처님을 성심으로 사모하므로 각자 불상을 지어서 공양케 했다. 상(像) 중에서 가장 잘 만들어진 것 53존을 골라서 주조 사실을 적은 글과 함께 큰 철종(鐵鐘)에 넣어 인연 있는 나라에 닿으라고 기원하면서 바다에 띄웠다. 철종이 신룡의 호위를 받으며 월지국에 이르자, 국왕은 전당을 지어 53불상과 글을 봉안했다. 인연 있는 국토에 닿으라는 서원과 함께 바다에 다시 띄었다. 이 철종이 무수한 나라와 바다를 거쳐서 마침내 신라 땅 금강산 동쪽 안창현(安昌縣, 현재의 간성)에 표착했다. 신라 남해왕 원년(기원후 4년)의 일이었으니, 전한 시기에 벌어진 사건이다.

마라난타(摩羅難陀)는 384년(침류왕 원년)에 남조 동진을 거쳐 백제로 건너왔다. 법현이 천축에서 돌아오던 413년에서 30여 년 이전인 384년의 일이었다. 이는 해양실크로드 문명사 관점에서, 불교가 바닷길로 극동까지 전래된 중요 사건이다. 마라난타가 들어오자 왕은 예를 갖추어 교외까지 나아가 그를 맞아 궁궐 안에 머무르게 했다. 왕이 무턱대고 인도의 승려를 받아들였을 것 같지 않다. 동진 바닷길을 통하여 불교에 관한 기본 정보를 얻고 있었고, 이미 그 전에 불교가 여러 맥락으로 당도한 준비된 상황에서 마라난타가 백제에 등장한 것으로 비정된다.

4세기에 불교가 삼국에 전래된 이래 불법(佛法)을 구하려는 구법승의 발길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개인 순례를 뛰어넘어 국가적 배려와 지원이 있었다. 중국 및 천축에 이르는 일은 그 자체 ‘국제 프로젝트’였기 때문이다. 남북조시대에 삼국은 거의 고르게 14명의 구법승을 중국에 보냈다. 수·당대에는 180여 명의 구도승이 유학했다. 통일신라 시기에는 7세기 42명, 8세기 38명, 9세기 96명이 중국으로 들어섰다. 구도열은 중국에 머물지 않고 천축까지 이어져서 15명이 확인된다. 인도 혹은 중도에서 객사한 이가 10명, 중국으로 돌아온 이가 3명, 그리고 고국으로 돌아온 이는 불과 2명이다.

한반도 출신 구법승 14명 가운데 신라 출신으로 명시된 이는 12명, 백제와 고구려가 각 1명이다. 14명 가운데 9명이 <대당서역구법고승전>에 수록된 7세기 구법인들이다. 이들 숫자는 공인 수치만을 뜻할 뿐, 전체가 확인된 것은 아닐 것이다. 바람처럼 떠났다가 바람처럼 사라진 구법승도 많았기 때문이다. 가령 혜초 같은 인물은 <왕오천축국전>이 발굴되기 전까지는 어느 문헌에도 언급되지 않았다.

중국으로의 구법승이 활발하던 당나라 시대의 의상 같은 인물은 재론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당과 신라 사이에서 구법승은 너무도 많았으니, 원효가 당나라행을 그만둔 사례가 의미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 그만큼 흔했다는 뜻이다. 한반도의 불교 바닷길은 미궁이다. 별 관심들이 없다. 할 말은 많고 가야할 길은 멀지만, 짧은 지면에 더 이상 쓰기 어려워 여기서 멈추고자 한다.

고려시대 항해도 무늬 동경

 

주강현 해양문명사가 [불교신문 374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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