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종1(明宗一) 원년
〈신묘〉 명종 원년(1171) 봄 정월. 원자 왕숙(王璹)이 관례(冠禮)를 거행하였다.
5월 갑신. 선경전(宣慶殿)에서 5일간 소재도량(消災道場)을 열었다.
기축. 유응규(庾應圭)가 금(金)에서 돌아왔다. 금 황제의 회답 조서에서 전왕(前王)의 양위(讓位)를 허락하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경은 24년간[二紀] 왕위에 있으면서 우리나라의 울타리가 되어왔는데, 근자에 여러 차례 사신을 제때에 보내지 않고 다만 글을 부쳐서 보고할 뿐이어서 변고가 있는가 하여 크게 걱정하였더니, 이제야 비로소 편지를 열어 보게 되었다. 〈편지에서는〉 오랫동안 병석에 있느라 왕위가 비게 될까 걱정한 나머지 아버지의 유언을 받들어 동생에게 왕위를 계승시키고자 그에게 임시로 국사를 맡긴다고 하였다. 경의 말이 이치에 맞는 것 같기는 하지만 짐의 생각에는 미흡한 점이 있으니, 곧 이어서 사신을 보내어 이 일을 알아보게 할 것이다.”
라고 하였다.
신묘. 임수(林遂) 등에게 급제를 하사하였다.
6월 갑진. 초하루 왕이 봉은사(奉恩寺)에 갔다.
무오. 왕이 대관전(大觀殿)에서 보살계(菩薩戒)를 받았다.
가을 7월 신사. 대관전(大觀殿)에서 소재도량(消災道場)을 3일간 열었다.
계미. 금(金)의 순문사(詢問使) 완안정(完顔靖) 등이 왔다.
갑신. 〈금 사신을 위해〉 불진연(拂塵宴)을 열었다.
병술. 초참연(初叅宴)을 열었으나 완안정(完顔靖)은 모두 참석하지 않았다.
기축. 왕이 대관전(大觀殿)에서 〈금(金)의〉 조서를 받았는데 전왕(前王)에게 하사한 조서였다. 조서에 이르기를,
“경은 자기 나라를 통치하면서 대대로 아름다운 업적을 이루었다. 올해 들어 글을 보내어 질병으로 오랫동안 정무를 보지 못하였다고 알리고, 자신의 아들은 책임을 감당할 수 없다고 하고는 전왕(前王)의 유언을 받들어 동복아우에게 양위하여 왕위를 전했다고 적었다. 이 말이 진심이 아닌가 염려하여 조서를 보내어 물어보는 것이니 사신이 돌아오는 편에 문서로 상세히 보고하기 바란다.”
라고 하였다.
임진. 평장사(平章事) 서공(徐恭)이 사망하였다.
8월 갑진. 완안정(完顔靖)이 떠나려 하므로 대관전(大觀殿)에서 잔치를 열었다. 완안정(完顔靖)이 처음 전후 사실을 조사할 때 왕이 이르기를, “전왕(前王)은 이미 왕위를 내어놓고 다른 곳에 머무르고 있는데, 병이 더하기만 하고 낫지 않아서 조서를 받으러 나오지 못합니다. 길도 험하고 멀어서 사신께서 갈 수도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완안정(完顔靖)이 이 때문에 전왕(前王)을 만나보지 못하였으며, 왕이 전왕(前王)의 표문을 마련해 붙여 보내었다.
정미. 완안정(完顔靖)이 떠났다.
9월 계미. 승려 덕소(德素)를 왕사(王師)로 삼았다.
무자. 좌간의(左諫議) 김신윤(金莘尹), 우간의(右諫議) 김보당(金甫當),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 이소응(李紹膺), 좌사간(左司諫) 이응초(李應招), 우정언(右正言) 최당(崔讜) 등이 상소하여 이르기를, “전왕[前朝] 때에 재상 최윤의(崔允儀), 간의(諫議) 이원응(李元膺), 중승(中丞) 오중정(吳中正) 등이 환관(宦官) 정함(鄭諴)의 임명서 고신(告身)에 서명하였고, 서해도안찰사(西海按察使) 박순고(朴純古)는 노인성(老人星)이 나타났다고 거짓 보고하였으며, 지수주사(知水州事) 오록지(吳錄之)는 가짜 금거북을 상서로운 것이라 하여 바쳤으니 청하건대 그들의 자손을 모두 금고(禁錮)에 처하시기 바랍니다. 또 승선(承宣)은 왕의 대변인[喉舌]으로서 다만 왕의 명령을 출납하면 되는데, 지금 이준의(李俊儀)·문극겸(文克謙)은 대성(臺省)의 직책을 겸직하여 궁중에서 권세를 부리고 있으니 겸직을 해임하시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이 상소를 따랐으나, 다만 이준의(李俊儀)·문극겸(文克謙)에 대한 것은 허락하지 않았다. 이튿날 간관(諫官)이 대궐문에 엎드려 힘써 간쟁하였다. 이준의(李俊儀)가 술에 취하여 순검군(巡檢軍)으로 하여금 간관들을 욕보이게 하였다. 왕이 이를 듣고는 이준의(李俊儀)를 불러 좋은 말로 타이르고 간관은 황성(隍城)에 가두었다.
경인. 김신윤(金莘尹)을 판대부사(判大府事)로, 김보당(金甫當)을 공부시랑(工部侍郞)으로, 이응초(李應招)를 예부원외랑(禮部員外郞)으로, 최당(崔讜)을 전중내급사(殿中內給事)로 좌천시키고, 이준의(李俊儀)는 위위소경(衛尉少卿)으로, 문극겸(文克謙)은 대부소경(大府少卿)으로 고쳐 임명하였다.
신묘. 태양에 흑점[黑子]이 나타났는데, 크기가 복숭아만 했다.
겨울 10월 갑진. 선경전(宣慶殿)에서 백고좌(百高座)를 열고 인왕경(仁王經)을 독송했다.
을사. 〈승려〉 30,000에게 반승(飯僧)하였다.
평장사(平章事) 임규(任奎)가 사망하였다.
임자. 밤에 궁궐에 불이 나자 여러 절의 승려들과 부위(府衛)의 군사들이 불을 끄려고 궁궐로 나아갔다. 정중부(鄭仲夫)와 이준의(李俊儀) 등이 숙직[入直]하고 있었는데, 이의방(李義方) 형제는 변이 생길까 두려워서 궁궐 안으로 달려 들어가서 자성문(紫城門)을 닫아걸어서 불 끄러 오는 사람들을 들이지 않았으므로 전각이 모두 타버렸다. 왕이 산호정(山呼亭)으로 나가서 통곡하였다.
계축. 〈왕이〉 수창궁(壽昌宮)으로 거처를 옮겼다.
정사. 왕의 생일을 건흥절(乾興節)로 정하였다.
무오. 태양에 흑점[黑子]이 나타났는데, 크기가 복숭아만 하였다.
이해에 고주사(告奏使)로 예부시랑(禮部侍郞) 장익명(張翼明)과 도부서(都部署) 황공우(黃公遇)를 금(金)에 보냈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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