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군조선 문화제도(정치행정 6)

단군조선 서보(西堡)인 번한(番韓)의 수도 오덕지(五德地) 고찰

단군조선(檀君朝鮮) 시조 단군왕검(檀君王儉)은 서기전 2333년경에 치두남(蚩頭男)을 봉하여 번한(番韓)으로 삼았고, 서기전 2311년에는 번한(番韓) 땅에 요중(遼中) 12성(城)을 쌓았다. 서기전 2311년은 당요(唐堯) 시절로서 서기전 2314년에 당요(唐堯)가 순(舜)을 등용한지 4년째가 되는 해가 된다.

서기전 2357년에 도(陶) 땅의 제후였던 요(堯)가 유웅국(有熊國, 일명 웅국)의 이복형 제지(帝摯)를 멸하고 스스로 천자(天子)가 되어, 마음대로 구주(九州)로써 땅을 나누고, 명협(蓂莢)의 풀에 의지하여 음력(陰曆)으로써 달력을 만들고, 제왕(帝王)의 도(道)를 함부로 주창하고 주변의 나라를 침략하였다.

 

 이에, 단군왕검(檀君王儉)은 서기전 2333년에 구이(九夷, 구족)의 추대에 응하여 조선(朝鮮)을 건국하고서 세상의 질서를 바로 잡기 위하여, 순(舜)의 아버지 유호씨(有戶氏)를 천사(天使)로 삼아 서기전 2324년에 요(堯)를 깨우치도록 환부(鰥夫), 권사(權士) 등 100여명을 파견하였던 것이다. 유호씨(有戶氏)는 환부(鰥夫), 권사(權士) 등과 군사 수천을 이끌고 요(堯)를 토벌하기 위하여 접근하였는데, 이에 요(堯)는 재빨리 정세를 알아차리고 유호씨(有戶氏)를 대접하여 황하물가(河濱)에 머물도록 하니, 유호씨(有戶氏)가 이때부터 요(堯)의 소행을 감시만 하게 되었다.

이때 유호씨(有戶氏)의 아들 순(舜)은 효자로 이름이 났다. 즉 이때까지 순(舜)은 아버지 유호씨(有戶氏)의 명령을 고분고분 잘 따랐던 것이다. 그런데, 당요(唐堯)가 다른 뜻이 있어 순(舜)을 유혹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순(舜)도 요(堯)임금에 빌붙기 시작하여 드디어 서기전 2314년 순(舜)의 나이 30세에 요(堯)임금에게 등용되었다. 유호씨(有戶氏)는 순(舜)에게 여러번 경고를 하였으나 듣지 않게 되었고, 이때부터 순(舜)은 아버지를 떠나 당요(唐堯)에게 협조함으로써 불효자(不孝子)가 된 것이다. 고대중국의 기록에서는 불효자라고만 적고 있지만, 실제로는 아버지에 대한 불효와 환부(鰥夫)의 직책수행을 게을리 하여 버림으로써 단군조선에 대한 불충(不忠)을 저지른 것이 된다.

이에 유호씨(有戶氏)가 단군왕검(檀君王儉) 천제(天帝)께 상소를 올리고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하였던 것이 되며, 이로써 당요(唐堯)와 순(舜)의 역심(逆心)을 경계하여 번한(番韓) 땅 서쪽에 요중(遼中)12성을 쌓았으니 서기전 2311년경이 된다.

요중(遼中)이란 요(遼) 안의 땅이라는 말이며, 요(遼)는 멀다라는 말로서 단군조선의 중심인 수도 아사달(阿斯達)로부터 멀다라는 말이 된다. 그리하여 요수(遼水)는 당시 지금의 북경 서쪽을 흐르는 영정하(永定河)로서 고대중국 기록에 대요수(大遼水)라 기록되는 강과 대요수(大遼水)인 영정하(永定河)의 상류지역에 북동에서 남서로 흘러 합류하는 지금의 청수하(淸水河)로서 고대중국 기록에 소요수(小遼水)라 기록되는 강을 합친 명칭이 된다. 지금의 북경은 대요수(大遼水)의 동쪽에 위치하여 당시에는 요동(遼東)이 된다. 요중(遼中) 12성의 위치로 보아도 영정하(永定河)가 대요수(大遼水)인 것이 틀림없게 된다.

이후 서기전 2294년에 순(舜)이 당요(唐堯)의 섭정이 되었고, 서기전 2288년에 9년 대홍수가 발발하여 곤(鯤)이 치수를 담당하였으며, 서기전 2284년에 순(舜)이 요(堯)를 유폐시키고 천자(天子) 자리를 찬탈하였고, 서기전 2280년에 우순(虞舜)이 치수담당 곤(鯤)을 처형하고 그 자리에 곤(鯤)의 아들 우(禹)를 앉혀 치수를 맡겼던 것이다.

번한(番韓) 땅에는 수도가 5개가 된다. 이는 단군조선이 서쪽에 있는 반역 잠재세력인 당요(唐堯) 등을 경계하여 정세에 따라 수도를 옮기면서 대처하도록 설정한 것이 된다. 처음의 수도는 험독(險瀆)인데, 번조선(番朝鮮)의 마지막 수도이기도 하며, 위씨조선(衛氏朝鮮)의 수도이기도 하다. 동서남북중으로 하여 동쪽의 험독(險瀆)에 4개를 더하여 5경을 둔 것이 된다.

산동반도 남쪽으로 지금의 청도(靑島) 지역에 낭야성(琅耶城)을 쌓았는데 이 성을 서기전 2301년에 개축하여 가한성(加汗城)이라고도 부르며, 특히 서기전 2267년 도산회의 때 감우(監虞)라는 관청을 두어 우순(虞舜)의 정사를 감독하였던 곳이다. 이후 치수담당 사공(司空) 우(禹)가 우순(禹舜)에게 정사를 보고하면 순(舜)은 다시 5년마다 1회씩 순행(巡行)하던 단군조선의 태자부루(太子扶婁)에게 감우(監虞)에서 치수경과 등의 국정(國政)을 보고하고 조공(朝貢)하였던 것이다.

우순(虞舜, 순임금)은 서기전 2267년부터 서기전 2247년경까지 약 20년에 걸쳐 4번을 소위 사근동후(肆謹東后)하였던 것이 된다. 여기서 동후(東后)는 곧 태자부루(太子扶婁)를 가리키며, 태자부루(太子扶婁)는 진한(眞韓)으로서 단군왕검의 보좌 겸 섭정 비왕(裨王)이고, 단군왕검(檀君王儉) 천제(天帝)를 대신하여 나라의 정사를 보았던 것이다.

번한(番韓)의 중앙이 되는 안덕향(安德鄕)은 곧 개평(蓋平)으로서 지금의 당산(唐山) 바로 위에 소재하였고, 동북쪽에 탕지(湯池, 탕지보)가 있어 이를 구(舊) 안덕향(安德鄕)이라 하고 고구려 때에는 안시성(安市城)이라고도 하며, 서쪽에는 한성(汗城)을 두었는데 고구려의 한성(韓城)이 된다.

번한(番韓) 오덕지(五德地)는 첫 수도이자 마지막 수도인 동쪽의 험독(險瀆, 왕검성), 중앙으로 안덕향(安德鄕)인 개평(蓋平), 북쪽의 구(舊) 안덕향(安德鄕)인 탕지보(안시성), 남쪽의 감우(監虞)가 있는 가한성(加汗城)인 낭야성(琅耶城), 서쪽의 한성(汗城)이 되는 것이다.

단군조선의 번한(番韓)은 서쪽을 지키는 나라로서 수시로 수도를 번갈아가며 서쪽(요순하은주)의 정세와 군사적 움직임에 대응한 것이 된다.

단군조선의 번한(番韓) 요중(遼中) 12성(城)을 고려하면, 오덕지(五德地)의 서쪽 수도가 되는 한성(汗城)은 요수(遼水)가 되는 영정하(永定河)의 동쪽과 개평(蓋平)의 사이에 위치한 것이 되고, 탕지(湯池)인 안시성(安市城)은 지금의 난하(灤河) 서쪽 유역으로 추정되는데 지금은 난하(灤河)의 동쪽에 천안(遷安)이라는 지명이 있어 서로 연관이 있는 바, 탕지(湯池)는 곧 천안(遷安)의 서쪽 지역으로서 난하(灤河) 건너 서편에 위치한 것이 된다.

서기전 635년경 연(燕)나라가 동진(東進)을 한 이후로 서기전 202년 한(漢)나라 초기에 번한(番韓, 番朝鮮)의 경계가 지금의 난하(灤河)까지 이동하게 되었는데, 고구려의 안시성(安市城)은 바로 이 난하(灤河) 부근의 안시성(安市城)이며, 고구려 태조 때 쌓은 요서(遼西) 10성도 모두 난하(灤河) 부근과 대요수(大遼水)이던 영정하(永定河)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오덕지(五德地) 중의 하나로서 남경(南京)에 해당하는 낭야성(琅耶城)은 산동반도 남쪽에 위치하고 있고, 후대에 산동(山東)지역에서 회수(淮水)지역에 걸쳐 활동하던 동이족(東夷族)의 중심지가 되었던 것이 된다.

서기전 1122년경까지 산동지역은 단군조선의 번한(番韓) 관경에 속하는 땅으로서 청구(靑邱), 남국(藍國), 엄(淹), 서(徐), 회(淮) 등의 나라가 이미 존속하였고, 제(齊)나라가 주(周)나라의 제후국으로 봉해지면서 임치(臨淄)가 제(齊)나라의 수도가 되었고 이후 제(齊)나라가 팽창하였으나 여전히 동이족(東夷族)의 나라가 주변에 산재하고 있었던 것이 되는데, 특히 서(徐), 회(淮), 엄(淹), 남(藍), 개(介), 래(萊), 양(陽), 우(隅)라는 내륙(內陸) 8이(八夷)가 활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서(徐)는 서국(徐國)으로서 서이(徐夷)라고 불리며 서기전 1000년경에 출현한 서언왕(徐偃王)의 나라이기도 한데, 서기전 1236년부터 서기전 512년까지 존속한 나라인 것이다.

서기전 680년에 초(楚)나라 문왕(文王)에게 수도를 함락당하고 서산(徐山)으로 이동하였으며, 서기전 668년에 제(齊)나라의 속국이 되었다가 다시 세력을 키웠다가 서기전 512년에 결국 오(吳)나라 합려왕(合麗王)에게 완전히 망하였던 것이다. 회이(淮夷)와 그 분파인 사이(泗夷)는 진시황(秦始皇)의 진(秦)나라 때까지 존속하다가 서기전 221년에 진시황(秦始皇)에 의하여 완전히 흡수되었던 것이 된다.

엄이(淹夷)는 엄독홀(奄瀆忽)에 있던 나라로서 태산(泰山)을 중심으로 한 나라가 되며, 서기전 909년에 단군조선의 제30대 내휴(奈休) 천왕이 청구(靑邱)와 엄독홀(奄瀆忽)에 행차하고 태산에서 천제를 지낸 것을 마지막으로 하여 이후에는 더 이상 기록에 보이지 않는데, 아마도 주(周)나라의 제후국이던 노(魯)나라에 병합되거나 서기전 667년에 패자(覇者)가 된 제(齊)나라에 의하여 합병된 것이 되고, 차차 나머지 동이족(東夷族)들의 나라도 제(齊)나라나 주변의 주(周)나라 제후국에게 병합된 것이다 된다.

단군조선 번한(番韓) 오덕지(五德地)는 후대에 나타나는 오경(五京)제도의 원류가 된다. 물론 이 오경(五京) 제도는 오부(五部)나 오가(五加) 제도에서 나온 것이며, 이들 오부(五部)나 오가(五加) 제도는 곧 파미르고원 시대의 마고성 4보(堡) 1천부단(天符壇) 제도에서 파생된 것이 된다. 보(堡)는 지키는 보루(堡壘)이고, 천부단(天符壇)은 제천단(祭天壇)이다.

단군조선도 원칙적으로 1천부단(天符壇) 4보(堡)를 두었는데, 백두산이 제천단(祭天壇)이 있는 곳으로 천부단(天符壇) 자리가 되고, 동에는 예국(濊國), 서에는 번한(番韓), 남에는 마한(馬韓), 북에는 진한(眞韓)을 둔 것이다. 단군조선 삼한제도(三韓制度)로 볼 때 진한(眞韓), 번한(番韓), 마한(馬韓)은 크게 3경제도가 된다. 대진국(大震國, 발해)는 5경제도를 두었다. 후신라(後新羅)도 동경인 서라벌 외에 5소경을 두어 5경제도를 본딴 것이 된다. 기본적으로 3경제도는 천지인 삼신사상(三神思想)에서, 5경제도는 동서남북중의 오방(五方)의 오부(五部) 또는 위치와 관련된 1천부단(天符壇) 4보(堡) 제도에서 나온 것이 된다.

단군조선의 강역으로 볼 때, 동쪽지역에는 침략하는 무리가 없어 그만큼 비중이 약하여 따로이 한(韓)을 봉하지 아니한 것이 되며, 특히 항상 전쟁의 실마리를 제공하던 요순하은주(堯舜夏殷周) 등 서쪽을 경계하던 번한(番韓)의 역할이 컸던 것이 된다.

번한(番韓) 5경은 모두 지금의 영정하(永定河) 동쪽에 있으며 원래의 요동(遼東)지역에 있던 것이 되고, 서기전 202년경 이후에는 패수(浿水)인 난하(灤河) 동쪽에 위치한 험독(險瀆)을 제외한 4개의 수도는 모두 잃은 것이 된다.

고죽국(孤竹國)은 단군조선의 제후국으로서 하(夏)나라 이전부터 존속한 것이 되는데, 하(夏)나라는 서기전 2224년부터 시작된 나라이므로 고죽국(孤竹國)은 서기전 2224년 이전부터 시작된 나라가 된다. 고죽국(孤竹國)의 위치는, 서기전 2311년 요중(遼中) 12성을 쌓은 이후에 순(舜)이 요(堯)임금을 유폐시키고 천자(天子) 자리를 차지한 후에 요(堯)가 설치한 9주(九州) 외에 유주(幽州), 영주(營州), 병주(幷州)의 3주(三州)를 추가로 설치하였고, 이에 단군조선이 서기전 2267년 도산회의(塗山會議)에서 3주(三州) 중에서 발해만 유역의 유주(幽州)와 산동지역의 영주(營州)를 폐하여 단군조선의 직할 영역으로 편입시켰는 바, 이때 유주(幽州) 땅에 고죽국(孤竹國)을 봉한 것이 되어, 소위 유주(幽州) 지역이 된다. 고죽국(孤竹國)의 중심은 지금의 북경(北京)과 천진(天津) 지역이다. 실제로 단군조선의 제후국임을 증명하는 증거물인 비파형청동검이 천진(天津) 지역의 남쪽에서 출토되었는 바, 이는 바로 단군조선의 제후국인 고죽국(孤竹國)의 위치를 말해 주는 것이 된다.

고대중국의 영역은 제후국인 천자국으로서 그 외곽의 경계가 있지만, 단군조선의 외곽 경계는 없다. 단군조선에서 고대중국의 주변에 일정한 땅을 정하여 제후국을 봉하였던 것이 된다. 즉 고대중국인 당우하은주(唐虞夏殷周)의 둘레에 단군조선의 제후국들이 둘러싸고 있었던 것이 된다. 고대중국의 영역은 대략적으로 서안(西安)~태원(太原)~안양(安陽)~한수(漢水) 지역을 큰 원으로 하여 방(方) 3,000리의 넓이가 되어, 방(方) 1,000리의 땅인 주(州)가 9개가 된다.

이에 반하여, 단군조선의 직할 영역인 삼한(三韓) 관경만 하더라도 방(方) 6,000리의 땅으로서 36주(州)가 되며 고대중국의 영토에 비하면 최소한 4배가 넘는 것이 되고, 단군조선의 외곽지역을 포함하는 동서 2만리, 남북 5만리로 계산하면 약1,000주(州)의 땅이 되어 111배가 넘는다.

번한(番韓) 오덕지(五德地)에서 청동거울(靑銅鏡), 청동방울(靑銅鈴), 청동칼(靑銅劍)이 출토될 가능성이 너무나 많다. 즉 험독(險瀆)이 되는 지금의 산해관(山海關) 자리, 서쪽의 한성(汗城, 韓城) 자리, 동북의 탕지(湯池) 즉 안시성(安市城) 자리가 되는 난하(灤河) 중하류의 천안(遷安) 부근, 남쪽의 낭야성(琅耶城) 자리인 지금의 청도(靑島), 중앙에 해당하는 지금의 개평(蓋平, 開平) 부근에서 천부삼인(天符三印)이 되는 청동제품이 출토된다면 바로 단군조선 번한(番韓)의 역사가 바로 입증되는 것이 된다.

번한(番韓)은 단군조선의 삼한(三韓)의 하나인 비왕(碑王)의 나라로서 천군(天君) 이상의 천왕격(天王格)에 해당하는 나라이므로, 분명히 단군왕검(檀君王儉)으로부터 천부삼인(天符三印)을 전수받았다고 보인다. 즉 청동거울, 청동방울, 청동칼을 전수받고 천왕의 명을 받아 해마다 천지인 삼신(三神)에게 제사를 지낸 것이 되며, 주로 오덕지(五德地)를 비롯하여 산동지역에 있던 태산(泰山)에서 행사를 치른 것이 된다. 서기전 2267년에는 태자부루(太子扶婁)가 도산회의를 주관하러 갈 때 번한 낭야(琅耶)로 하여금 태산에 올라 천제를 지내게 하였으며 서기전 909년에 청구(靑邱)의 서쪽에 있던 엄독홀(奄瀆忽)에 속했던 태산에서 천제를 지냈던 것이 된다.

청구(靑邱)라는 땅은 지금의 산동지역의 중북부에 해당하는 땅이 되고, 배를 타면 번한(番韓)의 수도인 험독(險瀆) 등에서 그리 멀지 아니한 곳이 된다. 청구(靑邱)의 서남쪽에 남국(藍國, 藍夷)가 있고, 그 남쪽에 서이(徐夷), 서이(徐夷)의 남쪽 회수(淮水)부근에 회이(淮夷)가 있었던 것이다.

지금의 중국의 태산 부근 또는 산동지역으로부터 회수(淮水)에 걱치는 지역에서 청동거울, 청동방울, 청동칼이 출토될 가능성이 많은데, 최소한 청동칼이 출토될 것은 확실하다. 이미 산동지역에서 출토된 명도전(明刀錢) 즉 제(齊)나라의 명도전(明刀錢)이라는 소위 제명도(齊明刀)는 대부분이 제(齊)나라의 도전이 아니라 동이족(東夷族)들의 도전(刀錢)이 되는 것이며, 제나라(齊)가 동이족(東夷族)들의 도전(刀錢)을 본 따 제(齊)나라 땅에 시행한 제법화(齊法化), 제지법화(齊之法化), 연(燕)나라를 정복한 기념으로 안이지법화(安易之法化), 제(齊)나라가 연(燕)나라에 복수하여 연(燕)나라를 제압한 기념으로 제반이시결신지법화(齊返易始結信之法化), 제반이결신지법화(齊返易結信之法化) 등을 기념발행 한 것이 된다.

지금의 북경의 동쪽 지역은 영정하(永定河)인 대요수(大遼水)의 동쪽으로서 번한 땅이며, 연(燕)나라가 안(安)을 거쳐 이(易)로 수도를 옮겼다가 다시 계(薊)로 옮기고, 다시 지금의 북경으로 옮겨 계(薊)라고 할 때까지, 북경일대는 번한(番韓) 관경 내 고죽국(孤竹國)의 영역이었는 바, 서기전 226년에 연왕(燕王)이 계(薊, 북경)가 되는 요동(遼東)으로 달아나 서기전 222년에 진(秦)나라에 항복하면서, 번한(번조선)과 경계가 되었던 만번한(滿番汗)은 난하(灤河)의 서쪽에 위치하며 고하(沽河)의 동쪽에 위치하는 것이 되는데, 연(燕)나라의 유물은 대부분 통상적으로 영정하(永定河)의 이남에서 출토되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실제로 영정하(永定河)의 남쪽 즉 북경의 서남쪽에 탁주시 부근에 방산현(方山懸)이 있고 여기에 유리하(琉璃河)가 있는데, 이곳에서 연(燕)나라 유물이 발굴 되었던 것이다.

연(燕)나라의 산이 되는 연산(燕山)도 실제로는 계(薊)의 동북에 있는 산으로서 난하(灤河)의 훨씬 서쪽에 있으며, 영정하(永定河) 동쪽에 있는 고하(沽河)와 난하(灤河) 사이에 있는 것이다. 아마도 연산(燕山)의 남쪽에 있던 발해만 유역의 지명이 만번한(滿番汗)이 아닌가 한다. 난하(灤河) 중하류 서쪽에 물창고와 같은 호수(湖水)가 많은데 이 지역으로 추정된다.

고려시대에 번한(番韓) 오덕지(五德地)를 본 따 지금의 서울인 한양(漢陽)을 오덕지(五德地)라 설정하면서 고려의 수도인 송악(松嶽)과 서경(西京)인 평양(平壤) 외에 한양(漢陽)을 오덕지(五德地)로 남경(南京)을 두어야 한다는 취지로 기록되고 있다. 고려는 개경, 서경, 남경의 3경제도를 둔 것이 된다.

오덕지(五德地)는 고려시대에 한양(漢陽)의 땅을 동서남북중(東西南北中) 오방(五方)의 오행(五行)에 따른 5가지 덕(德)을 함께 가진 곳이라 의미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기도 하지만, 단군조선 번한(番韓)의 오덕지(五德地)는 덕(德)을 갖춘 오방(五方)의 땅으로서의 5경(京)이 되는 것이다. 즉, 고려시대의 오덕지(五德地)인 한양(漢陽)은 동서남북에 각 위치한 낙산, 인왕산, 목멱산(남산), 북악산을 주변에 둔 중앙의 땅으로서 인의지예신(仁義智禮信)의 5덕(德)을 갖춘 땅이라 한 것이 된다.

 

출처; 데일리전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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