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사, 한국의 산지승원

 

산사는 한반도 남쪽 지방에 위치한 7개 불교 산지 승원 통도사, 부석사, 봉정사, 법주사, 마곡사,선암사, 대흥사로 이루어져 있다. 7세기에서 9세기에 창건된 이들 7개 사찰은 신앙과 영적 수행, 승려 공동체 생활의 중심지로 한국 불교의 역사적인 전개를 보여주고 있다. 한국의 다양한 불교신앙이 산사의 경내에 수용되었으며, 이는 역사적인 구조물과 전각, 유물, 문서 등에 잘 남아있다. 사찰 운영에서 나타나는 자립성과 승려 교육, 한국 선불교의 특징인 영적 수행과 교리 학습의 공존 등의 지속적인 전통에서 한국 불교의 무형적, 역사적 측면을 확인할 수 있다. 이들 산사는 조선시대 억압과 전란으로 인한 손상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 신앙과 일상적인 종교적 실천의 살아있는 중심으로 남아있는 신성한 장소이다.

 

통도사(경남 양산)

부석사(경북 영주)

봉정사(경북 안동)

법주사(충북 보은)

마곡사(충남 공주)

선암사(전남 순천)

대흥사(전남 해남)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은 통도사(경남 양산), 부석사(경북 영주), 봉정사(경북 안동), 법주사(충북 보은), 마곡사(충남 공주), 선암사(전남 순천), 대흥사(전남 해남) 7개 사찰로 구성되어 있다. 세계유산위원회는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이 ‘7~9세기 창건 이후 지속성, 한국 불교의 깊은 역사성’이 세계유산 등재 조건인 탁월한 보편적 기준(Outstanding Universal Value, OUV)에 해당한다고 평가했다.

 

한국의 전통산사는 현존하는 불교신앙이 거쳐 온 전체적 역사적 과정과 함께 한국 전통의 건축 형식, 공간의 표현이다. 특히 유교를 지배이념으로 삼았던 조선시대에 불교가 살아남기 위해 취했던 행보들을 사찰의 입지, 가람 배치, 전각의 명칭과 기능을 통해 보여준다. 또한 한국의 전통 산사는 한국 불교만이 가지는 통불교적 사상과 신앙으로 의식, 승려, 생활, 문화 등을 행하는 종합적 사찰로써 많은 불교 문화유산과 공간을 담고 있으며 이러한 의식, 공간, 기능은 유지되고 있다.

 

대웅전

금강계단

대웅전의 내부가구

대웅전의 돌계단 연화문

대웅전의 동쪽 꽃살문

금강계단 석문

금강계단

대웅전 계단

양산 통도사

통도사(通度寺)는 우리 나라 3대 사찰 중 하나로 손꼽히는 큰 절로, 신라 선덕여왕 15년(646)에 자장율사(慈藏律師)가 세웠다. 대웅전(大雄殿)은 원래 석가모니를 모시는 법당을 가리키지만, 이곳 통도사(通度寺)의 대웅전에는 불상을 따로 모시지 않고 건물 뒷면에 금강계단(金剛戒壇)을 설치하여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시고 있다. 그 때문에 통도사(通度寺)라는 절 이름도 금강계단(金剛戒壇)을 통하여 도를 얻는다는 의미와 진리를 깨달아 중생을 극락으로 이끈다는 의미에서 통도(通度)라고 하였다 한다. 지금 건물은 신라 선덕여왕 때 처음 지었고, 임진왜란 때 불에 탄 것을 조선 인조 23년(1645)에 다시 지은 것이다. 규모는 앞면 3칸·옆면 5칸이고, 지붕은 앞면을 향해 T자형을 이룬 특이한 구성을 갖추고 있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계 양식으로 꾸몄다. 건물 바깥쪽 기단 부분과 돌계단 층계석, 계단 양쪽(소맷돌)부분에서는 통일신라시대의 양식을 이어받은 뛰어난 연꽃조각을 볼 수 있다. 금강계단은 금강과 같이 단단하고 보배로운 규범이란 뜻이다. 부처님이 항상 그곳에 있다는 상징성을 띠고 있으며, 지금 있는 금강계단은 고려·조선시대를 거쳐 여러 차례 수리한 것이다. 양식은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금강계단 형태를 띠고 있는데, 가운데에 종 모양의 석조물을 설치하여 사리를 보관하고 있다. 1층 기단 안쪽 면에는 천인상을 조각하고 바깥쪽 면은 불법을 지키는 수호신인 제석의 모습을 조각하였다. 지은 연대를 확실하게 알 수 있는 조선 중기의 대표적 건축인 대웅전과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담고 있는 금강계단은 각각 건축 구조와 건축사 연구, 계단(戒壇)이 가지고 있는 그 의미에서 중요한 문화유산으로 평가받고 있다. 순치(順治) 2년은 조선 인조(仁祖) 23년(1645)에 해당하며, 이 묵서명(墨書銘)이 발견됨으로써 통도사(通度寺) 대웅전(大雄殿)은 건립연대가 확실한 조선 중기의 대표적 건축으로서 더욱 그 중요성을 띠게 되었다. 양산 통도사 대웅전 및 금강계단(국보 290호), 사인비구 제작 동종 - 통도사 동종(보물 11-6호), 양산 통도사 국장생 석표(보물 74호), 통도사 청동 은입사 향완(보물 334호), 양산 통도사 봉발탑(보물 471호), 통도사 영산전 팔상도(보물 1041호), 통도사 대광명전 삼신불도(보물 1042호), 통도사 석가여래 괘불탱(보물 1350호), 통도사 괘불탱(보물 1351호), 통도사 화엄탱(보물 1352호), 통도사 영산회상탱(보물 1353호), 통도사 청동 은입사 향완(보물 1354호), 양산 통도사 금동천문도(보물 1373호), 양산 통도사 삼층석탑(보물 1471호), 통도사 아미타여래설법도(보물 1472호), 양산 통도사 영산전 벽화(보물 1711호), 양산 통도사 청동 은입사 향완(보물 1735호), 양산 통도사 은제도금아미타여래삼존상 및 복장유물(보물 1747호), 등과 경상남도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여러 문화유산이 있다.

 

영주 부석사

봉황산 중턱에 있는 부석사(浮石寺)는 신라 문무왕 16년(676)에 의상대사(義湘大師)가 왕명을 받들어 화엄의 큰 가르침을 펴던 곳이다. 『삼국유사』에 있는 설화를 보면, 의상대사(義湘大師)가 당나라에서 유학을 마치고 귀국할 때 그를 흠모한 여인 선묘가 용으로 변해 이곳까지 따라와서 줄곧 의상대사(義湘大師)를 보호하면서 절을 지을 수 있게 도왔다고 한다. 이곳에 숨어 있던 도적떼를 선묘가 바위로 변해 날려 물리친 후 무량수전(無量壽殿) 뒤에 내려 앉았다고 전한다. 그래서인지 무량수전(無量壽殿) 뒤에는 ‘부석(浮石)’이라고 새겨져 있는 바위가 있다. 무량수전(無量壽殿)은 부석사(浮石寺)의 중심건물로 극락정토를 상징하는 아미타여래불상을 모시고 있다. 신라 문무왕(재위 661∼681) 때 짓고 고려 현종(재위 1009∼1031) 때 고쳐 지었으나, 공민왕 7년(1358)에 불에 타 버렸다. 지금 있는 건물은 고려 우왕 2년(1376)에 다시 짓고 광해군 때 새로 단청한 것으로, 1916년에 해체·수리 공사를 하였다. 규모는 앞면 5칸·옆면 3칸으로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한 구조를 간결한 형태로 기둥 위에만 짜올린 주심포 양식이다. 특히 세부 수법이 후세의 건물에서 볼 수 있는 장식적인 요소가 적어 주심포 양식의 기본 수법을 가장 잘 남기고 있는 대표적인 건물로 평가 받고 있다. 건물 안에는 다른 불전과 달리 불전의 옆면에 불상을 모시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무량수전(無量壽殿)은 우리 나라에 남아 있는 목조 건물 중 봉정사 극락전(국보 15호)과 더불어 오래된 건물로서 고대 사찰건축의 구조를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건물이 되고 있다.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앞 석등(국보 17호),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국보 18호), 영주 부석사 조사당(국보 19호), 영주 부석사 소조여래좌상(국보 45호), 부석사 조사당 벽화(국보 46호), 영주 부석사 삼층석탑(보물 249호), 영주 부석사 당간지주(보물 255호), 영주 부석사 고려목판(보물 735호), 영주 부석사 오불회 괘불탱(보물 1562호), 영주 부석사 석조석가여래좌상(보물 1636호) 등과 경상북도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여러 문화유산이 있다.

 

 

안동 봉정사

봉정사(鳳停寺)는 신라 신문왕 2년(682)에 의상대사(義湘大師)가 세운 절이라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의상대사(義湘大師)가 도력으로 만들어 부석사(浮石寺)에서 날린 종이 봉황(鳳凰)이 이곳에 내려 앉아 봉정사(鳳停寺)라 불렀다고 한다. 중심 법당인 대웅전에는 석가모니불상을 중심으로 문수보살, 보현보살을 좌우로 모시고 있다. 1962년 해체·수리 때 발견한 기록으로 미루어 조선 전기 건물로 추정한다. 규모는 앞면 3칸·옆면 3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인데, 밖으로 뻗친 재료의 꾸밈없는 모양이 고려말·조선초 건축양식을 잘 갖추고 있고 앞쪽에 툇마루를 설치한 것이 특이하다. 봉정사(鳳停寺)에는 안동 봉정사 극락전(국보 15호), 안동 봉정사 대웅전(국보 311호), 안동 봉정사 화엄강당(보물 448호), 안동 봉정사 고금당(보물 449호), 안동 봉정사 영산회상벽화(보물 1614호), 안동 봉정사 목조관음보살좌상(보물 1620호), 안동 봉정사 영산회괘불도(보물 1642호), 안동 봉정사 아미타설법도(보물 1643호) 등과 경상북도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여러 문화유산이 있다.

 

보은 법주사 

사적 503호 법주사(法住寺)는 신라 진흥왕14년(553년)에 의신조사((義信祖師)가 인도에서 불경을 가져와 이곳 산세의 웅장함과 험준함을 보고 불도(佛道)를 펼 곳이라 생각하고, 큰 절을 세워 법주사(法住寺)라 하였다고 전해진다. 776년(혜공왕 12)에 금산사(金山寺)를 창건한 진표율사(眞表律師)가 이 절을 중창했고 그의 제자 영심(永深) 등에 의해 미륵신앙의 중심도량이 되었다. 그후 법주사(法住寺)는 왕실의 비호 아래 8차례의 중수를 거쳐 60여 개의 건물과 70여 개의 암자를 갖춘 대찰이 되었다. 고려 숙종이 1101년 그의 아우 대각국사(大覺國師)를 위해 인왕경회(仁王經會)를 베풀었을 때 모인 승려의 수가 3만이었다고 하므로 당시 절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으며, 조선시대에 태조와 세조도 이곳에서 법회를 열었다고 전한다. 임진왜란으로 모든 전각이 소실된 것을 1624년(인조 2)에 벽암선사(碧巖禪師)가 중창한 후 여러 차례의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법주사(法住寺)에는 우리나라에서 하나밖에 없는 목탑인 보은 법주사 팔상전(국보 55호)과 기발한 착상과 원숙한 조각솜씨로 조각한 보은 법주사 쌍사자 석등(국보 5호), 한국 제일의 보은 법주사 석련지(국보 164호), 보은 법주사 사천왕 석등(보물 15호), 보은 법주사 마애여래의좌상(보물 216호), 보은 법주사 신법 천문도 병풍(보물 848호), 보은 법주사 대웅보전(보물 915호), 보은 법주사 원통보전(보물 916호), 법주사 괘불탱(보물 1259호), 보은 법주사 소조비로자나삼불좌상(보물 1360호), 보은 법주사 목조관음보살좌상(보물 1361호), 보은 법주사 철솥(보물 1413호), 보은 법주사 복천암 수암화상탑(보물 1416호), 보은 법주사 석조희견보살입상(보물 1417호), 보은 법주사 복천암 학조화상탑(보물 1418호) 등과 충청북도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여러 문화유산이 있어 신앙유적으로서 학술적 가치가 크다.

 

 

공주 마곡사

마곡사(麻谷寺)는 신라 선덕여왕 9년(640) 백제(百濟) 무왕(武王) 41년(640)에 자장율사(慈藏律師)가 세웠다는 설과 신라의 승려 무선(無禪)이 당나라에서 돌아와 세웠다는 두 가지 설이 전한다. 신라말부터 고려 전기까지 폐사되었던 절로 고려 명종 2년(1172) 보조국사(普照國師)가 절을 다시 세웠으나 임진왜란 뒤 60년 동안 다시 폐사되었다. 훗날 조선 효종 2년(1651)에 각순대사(覺淳大師)가 대웅전·영산전·대적광전 등을 고쳐 지었다고 한다. 이 전각에는 석가여래불(釋迦如來佛), 약사여래불(藥師如來佛), 아미타불(阿彌陀佛)의 삼존불(三尊佛)이 봉안되어 있으며, 대웅보전(大雄寶殿)의 현판은 신라(新羅) 명필(名筆) 김생(金生)의 글씨라고 전하여 온다. 조선시대 각순대사(覺淳大師)가 절을 다시 일으킬 때(1651) 고쳐 지은 것이라고 한다. 규모는 1층이 앞면 5칸·옆면 4칸, 2층이 앞면 3칸·옆면 3칸이고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다. 이를 다포 양식이라 하는데 밖으로 뻗쳐 나온 부재 위에 연꽃을 조각해 놓아 조선 중기 이후의 장식적 특징을 보이고 있다. 건물 안쪽은 우물 정(井)자 형태로 천장 속을 가리고 있는 천장을 2층 대들보와 연결하여 만들었고 마루도 널찍해 공간구성이 시원해 보인다. 마곡사(麻谷寺)에는 공주 마곡사 오층석탑(보물 799호), 공주 마곡사 영산전(보물 800호), 공주 마곡사 대웅보전(보물 801호), 공주 마곡사 대광보전(보물 802호), 마곡사 석가모니불괘불탱(보물 1260호) 등과 충청북도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여러 문화유산이 있다.

 

대웅전

승선교

팔상전

원통전

삼인당

각황전

순천 선암사

선암사(仙岩寺)는 백제성왕 7년인(529)년에 선암사(仙岩寺) 비로암지에 따르면 542년(진흥왕 3) 아도화상(阿道和尙)이 비로암(毘盧庵)을 지은 것에서 유래하였다는 설과 사찰명을 해천사(海川寺)라하고 산을 청량산(淸凉山)이라 하였다 한다. 875년(헌강왕 5)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창건하고 신선이 내린 바위라 하여 선암사(仙岩寺)라고도 한다. 고려 선종 때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이 중건하였는데, 임진왜란 이후 거의 폐사로 방치된 것을 1660년(현종 1)에 중창하였고, 영조(英祖) 때의 화재로 폐사된 것을 1824년(순조 24) 해붕(海鵬)이 다시 중창하였다. 6·25전쟁으로 소실되어 지금은 20여 동의 당우(堂宇)만이 남아 있지만 그전에는 불각(佛閣) 9동, 요(寮) 25동, 누문(樓門) 31동으로 도합 65동의 대가람이었다. 특히 이 절은 선종(禪宗)·교종(敎宗) 양파의 대표적 가람으로 조계산을 사이에 두고 송광사(松廣寺)와 쌍벽을 이루었던 수련도량(修鍊道場)으로 유명하다. 선암사(仙岩寺)에는 순천 선암사 동ㆍ서 삼층석탑(보물 395호), 순천 선암사 승선교(보물 400호), 순천 선암사 삼층석탑 사리장엄구(보물 955호), 순천 선암사 대각국사 의천 진영(보물 1044호), 순천 선암사 대각암 승탑(보물 1117호), 순천 선암사 북 승탑(보물 1184호), 순천 선암사 동 승탑(보물 1185호), 순천 선암사 대웅전(보물 1311호), 선암사 석가모니불괘불탱 및 부속유물 일괄(보물 1419호), 순천 선암사 선각국사 도선 진영(보물 1506호), 순천 선암사 서부도암 감로왕도(보물 1553호), 순천 선암사 33조사도(보물 1554호), 순천 선암사 동종(보물 1558호, 보물 1561호), 순천 선암사 선암매(천연기념물 488호), 선암사 소장 가사·탁의(국가민속문화유산 244호) 등과 전라남도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여러 문화유산이 있다.

 

대광명전

 대웅보전

천불전 

용화당

북미륵암 마애여래좌상

해남 대흥사

대흥사(大興寺)는 대둔사(大芚寺)라고도 하며, 『죽미기(竹迷記)』는544년(신라 진흥왕5) 아도화상(阿道和尙)의 창건설을 전하며, 자장(慈藏) 스님과 도선(道詵) 스님이 계속해서 중건하였다는 기록도 함께 실려 있다. 현재 사찰 내에서는 대체로 아도화상(阿道和尙)의 창건설을 따르고 있다. 『대둔사지(大屯寺誌)』에 의하면 고려 후기의 천태종 소속 고승인 진정국사(眞靜國師) 천책(天頙) 스님의 주석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즉 천책(天頙) 스님이 대흥사(大興寺) 북암(北庵)에 한동안 주석하였으며, 『대둔사지(大屯寺誌)』를 편찬하기 얼마 전까지만 해도 스님이 사용하던 발우가 이 곳에 전해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임진왜란 이후에 서산대사(西山大師)에 의해 많은 인재를 배출하는 큰 절로 성장하였다고 한다. 지금의 대흥사(大興寺)는 북쪽에서 흘러내리는 금당천의 냇물을 중심으로 절이 남북으로 나뉘어 남원·북원이라고 불리는데, 이 법당들은 나름대로 특징을 지닌 별원(別院)의 성격을 지닌다. 대웅전을 중심으로 하는 북원과 천불전·대광명전을 중심으로 하는 남원의 구조는 다른 절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구조이다. 대웅전 앞쪽의 백설당에는 김정희(金正喜)가 쓴 ‘무량수전(無量壽殿)’현판이 걸려 있다. 대흥사(大興寺)에는 해남 대흥사 북미륵암 마애여래좌상(국보 308호), 탑산사명 동종(보물 88호), 해남 대흥사 북미륵암 삼층석탑(보물 301호), 해남 대흥사 삼층석탑(보물 320호), 해남 대흥사 서산대사 탑(보물 1347호), 해남 대흥사 서산대사 유물(보물 1357호), 해남 대흥사 금동관음보살좌상(보물 1547호), 해남 대흥사 영산회괘불탱(보물 1547호), 해남 대흥사 천불전(보물 1547호) 등과 전라남도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여러 문화유산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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