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역사마을 : 하회와 양동(문화유산, 2010년)
한국의 역사마을에는 씨족마을, 읍성마을 등의 다양한 유형이 있으나 그 중에서 씨족마을은 전체 역사마을의 약 80%를 차지하는 한국의 대표적인 역사마을 유형이다.
한국의 씨족마을은 조선시대(1392~1910) 초기에 형성되기 시작하였고 조선 후기에는 전체 마을 중 약 80%를 점하게 되며, 오늘날까지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한국에서의 씨족은 성씨와 본관을 같이 하는 부계혈연집단, 즉 조상을 같이 하는 동성동본인들과 다른 혈연집단에서 배우자로 들어온 여성들로 구성된 사회집단을 말한다. 씨족마을은 하나 혹은 소수의 씨족이 전체 주민구성의 다수를 차지하거나 마을의 의사결정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는 마을을 일컫는다.
한국의 대표적 씨족마을이면서 양반마을인 하회와 양동은 모두 조선시대(1392~1910)에 양반문화가 가장 화려하게 꽃피었던 한반도 동남부(영남지방)에 위치하고 있다. 두 마을은 한국의 대표적인 마을 입지 유형인 배산임수의 형태를 띠고 있으며, 여름에 고온다습하고 겨울에 저온건조한 기후에 적응하기 위한 건물의 형태와 유교 예법에 입각한 가옥의 구성을 지니고 있다.
두 마을에는 양반씨족마을의 대표적인 구성요소인 종가, 살림집, 정사와 정자, 서원과 서당, 그리고 주변의 농경지와 자연경관이 거의 완전하게 남아 있을 뿐 아니라, 이러한 유형 유산과 더불어 이들과 관련된 많은 의례, 놀이, 저작, 예술품 등 수많은 정신적 유산들을 보유하고 있다.
하회, 양동의 두 마을은 아래와 같은 이유로 한국 씨족마을을 대표한다.
첫째, 하회, 양동의 두 마을은 한국의 씨족마을 중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각각 조선 전기 씨족마을 형성기의 두 가지 전형인 개척입향과 처가입향 유형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둘째, 하회, 양동의 두 마을은 전통적인 풍수의 원칙을 잘 지키고 있으며, 각각 한국 씨족마을 입지의 두 가지 전형인 강가 입지와 산기슭 입지의 대표적이고 우수한 사례이다.
셋째, 하회, 양동의 두 마을은 생산영역, 생활영역, 의식영역으로 구성되는 한국 씨족마을의 전통적인 공간구성을 기능적이고 경관적으로 온전하게 유지하고 있는 매우 드문 사례이다.
넷째, 하회, 양동의 두 마을은 조선시대의 가장 시기가 이르고 뛰어난 살림집, 정사, 정자, 서원 등의 건축물들을 다수 보유하고 있는 유일한 사례이다.
다섯째, 하회, 양동의 두 마을은 조선시대 유학자들의 학술적, 문화적 성과물인 고문헌과 예술작품을 보관하고, 전통적인 가정의례와 특징적인 마을 행사를 오늘날까지 유지하고 있는 가장 훌륭한 사례이다.
ㅇ명 칭 : 한국의 역사마을 : 하회와 양동(Historic Villages of Korea: Hahoe and Yangdong)
ㅇ 대상유산
- 하회마을(중요민속자료 122호), 병산서원(사적 260호)
- 양동마을(중요민속자료 189호), 독락당(보물 제413호) 및 옥산서원(사적 154호), 동강서원(경상북도 기념물 114호)
안동하회마을은 조선 중기인 1600년대부터 풍산류씨들이 모여 주택과 서원 등을 건축하고 마을을 조성한 풍산류씨의 집성촌이다. 혈연을 중심으로 한 집성촌은 전국 여러곳에 형성되었으나, 오늘날에는 대부분 소멸되거나 변형되어 그 본래의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다.
그러나 안동하회마을은 그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양반의 주거문화를 대표하는 양진당과 충효당, 북촌댁과 서원건축의 백미인 병산서원과 같 은 옛 건축물들은 빼어난 건축미를 자랑하고 있다. 하회마을은 주변 자연경관과 잘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낙동강의 넓은 강류가 마을 전체를 동·남·서 방향으로 감싸고 있어 풍수지리적으로 '연화부수형' 또는 '태극형'이라는 명국으로 알려져 있다. 이곳에는 풍산류씨 겸암파(풍산류씨 14대손인 겸암 류운룡의 대종가 계열)와 서애파(조선 선조때 명재상 서애 류성룡의 지파)가 살고 있다. 마을은 중앙 길을 중심으로 북촌과 남촌으로 크게 나뉘어져 있는데, 북촌의 대표적인 주택으로는 양진당(보물 제306호)과 북촌댁 (중요민속문화재 제84호)이, 남촌의 대표적인 주택은 충효당(보물 제414호)과 남촌댁(중요민속문화재 제90호)이 있다.
이 마을에는 크고 작은 양반집들과 노비들의 주택인 가람집들, 그리고 원지정사와 병산서원과 같은 독특한 건축들이 자연친화적인 마을구성과 건축배치를 이루면서 산재해 있고, 별신굿과 별신굿때 쓰이던 하회탈, 부용대에서 벌어지는 줄불놀이 같은 독특한 민간놀이가 전승되고 있다. 또한 징비록(懲毖錄, 국보 제132호), 군문등록(軍門謄錄, 보물 제160호) 등을 비롯하여 서애선생의 수많은 전적과 교지들이 영모각과 충효당에 소장되어 있다.
안동하회마을에는 국보 2건(징비록, 하회탈), 보물 2건 (충효당, 양진당), 사적 1건(병산서원), 중요민속자료 10건(북촌댁, 남촌댁, 원지정사 등), 중요무형문화재 1건(하회별신굿탈놀이)의 문화재가 지정되어 있다.
안동 양진당
하회 북촌댁
충효당
하회 남촌댁
병산서원
서애 유성룡의 학문과 업적을 기리기 위한 곳으로, 안동에서 서남쪽으로 낙동강 상류가 굽이치는 곳에 화산(花山)을 등지고 자리하고 있다. 유성룡은 도학·글씨·문장·덕행으로 이름을 날렸을 뿐만 아니라, 임진왜란 때에도 성곽 수축·화기제작을 비롯하여 군비확충에 힘써 많은 공을 세운 인물이다.
원래 풍악서당으로 풍산 유씨의 교육기관 이었는데, 유성룡이 선조 5년(1572)에 이곳으로 옮겼다. 그 후 광해군 6년(1614)에 존덕사를 세워 그의 위패를 모시고, 1629년에 그의 셋째 아들 유진의 위패를 추가로 모셨다. 철종 14년(1863)에는 임금으로부터 ‘병산’이라는 이름을 받아 서원이 되었다. 서원내 건물로는 위패를 모신 존덕사와 강당인 입교당, 유물을 보관하는 장판각, 기숙사였던 동·서재, 신문, 전사청, 만대루, 고직사가 있다.
병산서원은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을 담당해 많은 학자를 배출한 곳으로, 186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에도 남아 있었던 47개의 서원 중 하나이며, 한국 건축사에 있어서도 중요한 유적이다.
병산서원
존덕사
경주양동마을
양동마을은 신라의 고도(古都) 경주에서 형상강을 따라 동북쪽으로 16km에 위치하고 있으며 중요민속문화재 제189호로 지정된 민속마을이다.
이 마을은 조선시대 초기에 입향(入鄕)한 이래 지금까지 세거(世居)해온 월성손씨와 여강이씨가 양대문벌을 이루고 있다. 양동마을에는 월성손씨의 종가인 서백당과 여강이씨의 종가인 무첨당을 비롯하여 관가정, 향단 등 조선시대 양반주택들과 하인들이 살았던 초가집들, 그리고 이향정, 수심정 등의 정자와 서당인 강학 당 등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옛 건물들이 조선시대부터 이어온 민속과 함께 잘 보존되고 있다.
마을의 지세는 산등성이와 골짜기의 구성이 勿자형으로 작은 산등성이와 골짜기에는 반가(班家)들이 비교적 높은 위치에 자리잡고, 그 아래에는 가람집들이 위치하고 있어 조선시대 신분제도의 일면을 엿볼 수 있는 공간적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현재 양동마을은 번성 당시의 마을 구성을 잘 간직하고 있으며, 풍수지리적으로 좋은 위치(穴자 형상의 위치)에 배치된 주요 건물들은 모두 보물(무첨당 등 3건)과 중요민속자료(수졸당 등 11건)로 지정되어 있다. 현재 이곳은 중요민속마을 지정 이후 엄격한 고증에 의해 보수·관리되고 있어 본래의 모습을 가장 잘 간직하고 있다.
경주 양동마을
무첨당
향단
관가정
이향정
양동 수졸당
독락당
독락당은 회재 이언적 선생의 제사를 받드는 옥산서원 뒤편에 있는 사랑채이다. 이언적(1491∼1553) 선생이 벼슬을 그만 두고 고향에 돌아온 뒤에 거처한 유서 깊은 건물이라고 한다.
조선 중종 11년(1516)에 지은 이 건물은 낮은 기단 위에 세운 앞면 4칸·옆면 2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집을 향해 오른쪽 3칸은 넓은 마루인데 앞을 모두 터 놓았으며, 왼쪽 1칸만 칸을 막아 온돌방을 만들어 놓았다. 그러나 원래는 맨 오른쪽 칸도 막아서 방으로 사용한 흔적이 남아 있어, 대청은 가운데 2칸뿐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기둥은 둥근기둥을 세우고 대청 천장은 뼈대가 모두 노출된 연등천장이다.
독락당 옆쪽 담장에는 좁은 나무로 살을 대어 만든 창을 달아 이 창을 통해서 앞 냇물을 바라보게 한 것은 아주 특별한 공간구성이라 할 수 있다. 독락당 뒤쪽의 시내에 있는 정자 또한 자연에 융합하려는 공간성을 드러내 준다고 하겠다.
독락당
옥산서원
조선시대 성리학자인 회재 이언적을 기리기 위한 곳으로, 이언적의 학문은 퇴계 이황에게 이어져 영남학파 성리설의 선구가 되었다.
이곳은 선조 5년(1572)에 경주부윤 이제민이 처음 세웠고, 그 다음해에 임금에게 ‘옥산’이라는 이름을 받아 사액서원이 되었다. 공부하는 장소인 구인당이 앞에 있고, 제사를 지내는 체인묘가 뒤에 위치한 전학후묘의 형식이다. 체인묘는 앞면 3칸·옆면 2칸으로,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하고 있는 맞배집이다. 안에는 이언적의 위패를 모셔 놓았다. 구인당은 앞면 5칸·옆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헌종 5년(1839)에 화재로 사라졌다가 다시 지어진 건물이다. 그 외에도 정문인 역락문, 2층 건물인 문루, 학생들의 기숙사인 동·서재, 서재인 암수재 등 여러 건물이 있다.
서원 동남쪽에 1972년 후손들이 세운 청분각이 있는데, 이언적의 『수필고본』(보물 제586호)과 김부식의 『삼국사기』완본 9권 등 많은 서적이 보관되어 있다. 옥산서원은 조선 후기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제외된 47개의 서원 중 하나로, 선생의 저서와 역대 명인들의 글씨와 문집이 보존되어 있다.
옥산서원
동강서원
우재 손중돈(1463∼1529)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손중돈 선생은 조선 전기 문신이다. 성종 20년(1489) 과거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두루 거친 뒤 우참찬에 이르렀다. 중종 때에는 청렴결백한 관리로서 청백리에 선정되었다.
동강서원은 숙종 21년(1695) 에 지었으나, 고종 5년(1868)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폐쇄되었다. 그 뒤 1925년과 1960년에 복원하였다.
지금 있는 건물로는 숭덕사, 신문(神門), 순교당, 활원재, 유도문, 전사청, 서고, 포사, 협문 등이 있다.
사당인 숭덕사에는 손중돈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순교당은 서원의 강당으로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및 학문의 토론 장소로 사용한다. 활원재는 유생들이 거처하며 공부하던 곳으로 현재는 서원의 큰 행사나 손님접대에 사용하고 있다.
동강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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