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종3(仁宗三) 22년
〈갑자〉 22년(1144) 봄 정월 기미. 금(金)에서 대부감(大府監) 소예(蕭隷)를 보내어 와서 왕의 생신을 축하하였다.
경신. 왕이 남교(南郊)에서 묵으며 재계하였다.
신유. 원구(圓丘)에서 제사를 지내었다.
임술. 금(金) 사신에게 연회를 베풀었다.
경오. 왕이 신중원(神衆院)에 행차하였다.
을해. 친히 적전(籍田)을 경작하는 의례를 행한 후 사면령을 내리니 군신(群臣)이 표를 올려 하례하였다.
2월 정해. 왕이 외제석원(外帝釋院)에 행차하였다.
을미. 호부상서(戶部尙書)로 치사한 허재(許載)가 사망하였다.
기해. 군신(群臣)에게 대관전(大觀殿)에서 연회를 베풀고 각각 말 1필을 하사하였다.
갑진. 조서를 내려 백성들 가운데 효성과 우애가 있으며 힘써 농사를 지은 자에게 부역을 면제하게 하였다.
경술. 〈왕이〉 나가서 장원정(長源亭)에 거둥하였다.
3월 경진. 왕이 수창궁(壽昌宮)으로 돌아왔다.
여름 4월 신묘. 왕이 안화사(安和寺)에 갔다.
무술. 왕이 보제사(普濟寺)에 행차하였다.
경술. 우박이 쏟아졌다.
5월 임자. 김돈중(金敦中) 등에게 급제(及第)를 하사하였다.
6월 신사. 초하루 왕이 봉은사(奉恩寺)에 갔다.
기축. 죄수를 재심사하였다.
을미. 왕이 명인전(明仁殿)에서 보살계(菩薩戒)를 받았다.
가을 7월 경신. 왕비 임씨(任氏)가 아들 왕탁(王晫)을 낳으니, 백관(百官)이 표문을 올려 하례하였다.
8월 신축. 왕이 보제사(普濟寺)에 행차하였다.
병오. 〈왕이〉 나가서 장원정(長源亭)에 거둥하였다.
9월 계해. 죄수를 재심사하였다.
갑술. 기두군(旗頭軍) 나신(羅信)이 낳아준 부모를 칼로 해쳤으므로 〈시장에서 죄수를 참수하고 전시하는〉 기시형(棄市刑)으로 처리하였다.
을해. 왕이 서루(西樓)에서 활쏘기를 사열하였다.
정축. 〈서루에서 활쏘기를 하였는데〉 또한 그렇게 하였다.
겨울 10월 경진. 왕이 수창궁(壽昌宮)으로 돌아왔다.
무자. 백좌도량(百座道場)을 선경전(宣慶殿)에서 3일간 열고 30,000명에게 반승(飯僧)하였다.
갑오. 왕이 친히 기로(耆老)의 남녀 노인, 효자와 순손(順孫), 의부(義夫)와 절부(節婦), 환과고독(鰥寡孤獨), 독질(篤疾)·폐질자(癈疾者)에게 음식을 베풀고 차등있게 물품을 하사하였다. 왕은 효자를 찾아가 보고 친히 그 행실을 묻고는 감동하여 눈물을 흘렸다.
11월 갑인. 좌사낭중(左司郞中) 박의신(朴義臣)을 보내어 금(金)에 가서 왕의 생신을 축하해 준 데 대해 사례하게 하였다.
갑자. 위위소경(衛尉少卿) 고영부(高瑩夫)를 보내어 금(金)에 가서 신년을 하례하게 하였다.
12월 계미. 왕이 금(金)의 임금이 동경(東京)에 갔다는 소식을 듣고 비서감(秘書監) 곽동순(郭東珣)을 보내어 가서 안부를 묻게 하였다.
정해. 또 소부소감(少府少監) 김구부(金龜符)를 보내어 토산물을 바쳤다.
신묘. 〈금(金)에〉 호부시랑(戶部侍郞) 최자영(崔子英)을 보내어 만수절(萬壽節)을 하례하게 하였다.
무술. 최진(崔溱)을 태자태부(太子太傅)로, 김정순(金正純)을 상서우복야 서경유수사 겸 태자소부(尙書右僕射 西京留守使 兼 太子少傅)로, 한유충(韓惟忠)을 참지정사 판공부사 겸 태자소부(叅知政事 判工部事 兼 太子少傅)로, 왕충(王冲)을 추밀원사 판삼사사(樞密院使 判三司事)로, 박정유(朴挺㽔)를 추밀원부사 겸 태자빈객(樞密院副使 兼 太子賓客)으로 삼았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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