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덕온공주(德溫公主) 이씨(李氏)
순원왕후(純元王后)의 막내·조선의 마지막 공주
덕온공주(德溫公主, 1822~1844)는 1822년(순조 22) 6월 10일 창덕궁 대조전에서 순조와 순원왕후(純元王后) 김씨(金氏)의 3녀이자 막내딸로 태어났다. 1829년(순조 29) 8세 때 ‘덕스럽고 온화하다’는 의미의 ‘덕온(德溫)’이라는 이름을 받아 정식으로 공주에 책봉되었다.
16세 되던 1837년(헌종 3) 8월 13일 생원 윤치승(尹致承, 1789~1841)의 둘째 아들 남녕위(南寧尉) 윤의선(尹宜善, 1823~1887)과 혼례를 올렸다. 살림집은 저동(서울 중구)에 마련되어 ‘저동궁’이라 불렸다. 윤의선(尹宜善)은 선조 때 좌의정을 지내고 공신으로 책봉된 윤두수(尹斗壽)의 10대 후손이다. 윤의선(尹宜善)의 어머니는 안동 김씨(安東金氏)였다.
공주의 혼례는 보통 12세 전후에 이루어지지만 덕온공주(德溫公主)는 13세가 되던 1834년에 아버지 순조가 세상을 떠나고 삼년상을 치르면서 혼례가 늦어졌다. 혼례는 어머니 순원왕후(純元王后)의 주도로 이루어졌다. 순원왕후(純元王后)가 덕온공주(德溫公主)와 사위 윤의선(尹宜善)에게 마련해준 한글 혼수 발기 등이 남아 있다. ‘발기’는 사람이나 물건의 이름을 죽 써 놓은 글을 말한다. 혼수 발기에는 장신구(노리개, 단추, 장식끈, 댕기), 문방구, 그릇(사발, 대접 등), 바느질 도구(가위, 인두 등), 잡화(빗, 경대, 자물쇠, 망원경) 등 온갖 물건이 두루 갖추어져 있다. 혼수 물목을 통해 막내딸을 시집보내며 아낌없이 주고픈 어머니의 마음을 잘 알 수 있다.
덕온공주(德溫公主)는 어머니의 영향으로 책을 읽거나 글씨 쓰는 것을 즐겼다. 시집갈 때 4,000권의 국·한문책을 가지고 갔다는 손녀 윤백영(尹伯榮, 1888~1986) 여사의 증언이 있다. 덕온공주(德溫公主)와 순원왕후(純元王后)가 안부를 주고받는 데 한글 편지가 큰 역할을 하였다. 순원왕후(純元王后)는 주로 사위 앞으로 편지를 보냈는데, 한글 편지가 다수 남아 있어 덕온공주(德溫公主)의 혼인생활을 짐작할 수 있다.
덕온공주(德溫公主)는 혼인 후 1839년에 첫째 딸을 낳았으나 일찍 죽었다. 혼례한 지 7년이 되던 1844년(헌종 10) 5월 24일 23세의 젊은 나이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당시 헌종의 둘째 부인을 뽑는 행사에 참석하였다가 점심으로 먹은 비빔밥이 체하여 같은 날 저녁에 숨을 거두었다, 둘째 아이를 임신 중이던 덕온공주(德溫公主)는 숨을 거두기 전 아이를 낳았으나 아이도 바로 죽었다. 그 후 윤용구(尹用求)가 양자로 결정되었다.
한편 덕온공주(德溫公主)의 묏자리를 둘러싸고 순원왕후(純元王后)와 안동 김씨(安東金氏) 가문 간의 다툼이 있었음을 알 수 있는 순원왕후(純元王后) 한글 편지가 남아 있다. 막내딸 덕온공주(德溫公主)가 세상을 떠난 후 공주의 묏자리에 대하여, 그곳이 왕기가 있어 능소(陵所)로 쓸 곳이므로 공주의 묘를 쓸 수 없다고 반대하는 의견이 제기되자, 몹시 분개하고 서운함을 토로하였다. 덕온공주(德溫公主)의 묘는 서울 성북구 장위동에 있다.
박주 대구가톨릭대 역사교육과 교수 출처; 이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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