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한국불교 최초 해외 유학승

 

510년 백제 발정스님, 中 양 나라 유학

 

 

서쪽의 바닷길이 제대로 열리지도 않았던 삼국시대에 신라 최초 유학승  각덕 스님은 “도를 배우는 사람으로서 스승을 구하지 않고 편안히 지낸다면 불자로서의 보은에 어긋나는 일”이라는 말을 남기고 양 나라로 유학을 떠났다.

 

백제 무령왕(462∼523)은 아버지 동성왕이 좌평 백가에게 살해되자 왕위에 올라 국가의 위기를 기회로 바꾸기 위한 백제 재건 프로젝트를 수립했다. 무령왕의 백제 재건 프로젝트는 첫째가 백제의 옛 땅을 되찾는 일이었고, 이어 문화의 발전을 꾀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한편으로 백성들의 생활에도 관심을 갖고 백성들의 삶이 윤택해 질 수 있는 길을 찾았다.

 

무령왕은 이에 따라 중국 양 나라에 사신을 보내 중국의 선진 문화를 많이 받아들였으며, 이 과정에서 불교의 사상과 문화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게 됐다. 때문에 사신과 함께 백제의 스님을 양 나라에 유학 보내 중국의 불교를 배우도록 했는데, 그 첫 번째 유학승이 발정(發正) 스님이다. 무령왕 치세(501∼523) 중반이라고 할 수 있는 510년 경 중국에 들어간 발정은 30여 년 동안 공부하고 사비천도를 전후해서 백제로 돌아왔다. 이 발정이 곧 우리나라에서 해외로 구법의 길을 떠났던 첫 유학승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발정에 관한 소식은 1918년 간행된 이능화의 『조선불교통사』「미륵불광사사적」에서 겨우 존재를 확인하게 된 겸익(謙益)의 발자취를 따르는 과정에서 얼핏 엿볼 수 있는 정도여서 더 이상의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때문에 발정이 우리나라 최초의 유학승이라는 점 역시 공인된 기록이라고 할 수는 없다.

 

겸익, 522년 첫 인도 유학

발정보다 12년 늦은 522년 최초로 인도에 유학한 겸익 역시 생몰연대를 알 수 없다. 그러나 이능화의 『조선불교통사』에 근거해 주로 무령왕대와 성왕대(524∼554)에 활약했음을 알 수 있다. 겸익이 인도로 유학하기 전 백제 불교는 한문으로 번역된 한역경전에 의존하고 있었고, 따라서 한역되지 않은 경전이 있는 불교 교학에 대한 이해에 한계를 갖고 있었다. 겸익은 당시 불교에 깊은 관심을 보였던 무령왕의 도움을 받아 인도에 가서 직접 범본을 구해 번역할 것을 발원했고, 드디어 522년(무왕 22)에 우리나라 불교 역사상 최초로 인도 유학 길에 오르게 됐다.

 

불교문화의 원류를 찾아 백제의 발전에 이바지할 목적으로 길을 나선 겸익은 서해바다를 건너 남중국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이미 양 나라에 유학중이던 발정을 만나 후일을 기약한 겸익은 다시 해로를 이용해 인도에 도착, 중인도의 상가나대율사(常伽那大律寺)에서 범어와 율장을 배웠다. 그러나 인도에서 배움에 열중하던 겸익은 중국에서 온 승려들로부터 고국의 왕(무령왕)이 이미 몇 해전에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고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겸익은 당초 인도에 유학할 때 배우고자 했던 목적을 다 이루지는 못했으나, 과거 자신은 물론 불교중흥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무령왕의 부음 소식을 접하고 백제의 상황을 알 수 없어 결국 귀국을 결심했다. 백제를 떠난 지 5년만에 귀국 길에 오른 겸익은 율장의 경전과 다른 경전 등을 배에 싣고, 인도 승려 배달다삼장과 더불어 백제로 돌아왔다. 이 때가 백제 성왕 4년(526)이다. 그러니까 무령왕이 세상을 떠난 지 벌써 4년이나 지난 후였다.

 

고구려 승랑은 유학 아닌 교화승

겸익은 백제로 돌아와 흥륜사에 머물면서 국내의 이름난 승려 28명을 불러들여 인도에서 가져온 범어로 된 아비달마에 관한 논소와 5부의 율장을 번역하는 일에 매진했고, 드디어 이를 신률(新律) 72권으로 완성했다. 이 때문에 후세인들은 겸익을 백제율종의 비조(鼻祖)로 불렀다. 당시 전륜성왕을 꿈꾸던 성왕은 이 신률의 서문을 직접 지을 정도로 불교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기도 했다. 이 무렵 중국 양 나라에 유학중이던 발정도 겸익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30여 년의 유학 생활을 마치고 귀국, 교화에 전념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로써 백제불교는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었고 계율 사상이 널리 확산되면서 백성의 삶도 계율을 지키는 데에 바탕을 두도록 했다.


결국 발정과 겸익은 각각 우리나라에서 중국과 인도에 유학한 최초의 유학승이면서 백제불교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 두 사람보다 먼저 중국으로 간 고구려 스님이 있었다. 승랑(僧郞)이 바로 그 주인공으로 그는 장수왕(재위 413∼491) 말년 경에 중국으로 가서 삼론학을 공부하고 중국 삼론종의 종주가 된 인물로 알려져 있으나, 학자들 사이에서는 당시 고구려 영토였던 요동에서 태어난 승랑이 이미 고구려에서 삼론학에 통달해 있었기 때문에 중국에서의 활동은 구법(求法)이 아니라 교화(敎化) 차원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승랑 연구에 있어 선구자라 할 수 있는 동국대 김성철 교수는 “승랑은 고구려에서 이미 높은 학식을 갖춘 인물로 중국행은 유학이 아니라 교화차원으로 보는 것이 맞다”며 “승랑은 삼론학, 천태학, 남종선, 유식학에 밝아 중국불교를 대승불교로 변화시키는 등 동아시아 불교의 새벽을 연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이에 따라 승랑은 최초의 유학승이 아니라 최초의 해외 교화승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것이 학자들의 견해다.

 

스님들의 해외유학, 즉 구법행은 신라에서 봇물 터지듯 증가한다. 일반적으로 신라에서의 초기 유학승이라고 하면 원광(圓光)법사를 떠올리기 쉬우나, 신라에서 처음으로 해외 유학을 간 승려는 원광법사가 아니라 각덕(覺德)으로 보는 견해가 우세하다. 원광은 진평왕 11년(589)에 중국으로 유학해 불법을 배우고 600년에 귀국했으며 이때부터 신라에서 대승법문을 펴고 교화한 것은 물론, 지금까지 전해오는 세속오계를 설한 인물로 유명하다. 때문에 가장 큰 업적을 남긴 유학승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삼국사기』, 『해동고승전』, 『조선불교통사』 등에서는 원광에 앞서 양 나라에서 유학하고 귀국한 각덕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 신라 제24대 진흥왕 10년(549) 어느 화창한 봄날에 큰 경사라도 난 듯 많은 사람들이 흥륜사 앞길 주변으로 몰려들었고, 조정의 백관들 역시 왕명을 받들어 길 양편에 늘어서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때 이 군중들 사이로 나타난 사람이 바로 양 나라에서 유학을 마친 후 부처님 사리를 받들어 모시고 귀국한 각덕이다. 양 나라 사신 일행과 함께 돌아온 각덕은 최초로 부처님 사리를 이운해 온 신라 첫 구법승이었다. 그러나 이후 기록에서 각덕에 대한 언급이 없어, 귀국 후 어떤 활동을 펼쳤는지는 알 수 없다.

 

신라 최초 유학승은 각덕

하지만 각덕이 양 나라로 유학을 떠난 시기는 진흥왕 1년인 540년으로, 유학 길에 오르기 전에 도반들에게 “도를 배우는 사람으로서 스승을 구하지 않고 편안히 지낸다면 불자로서의 보은에 어긋나는 일”이라는 말을 남겼던 것으로 전해진다. 따라서 중국에 유학한 이후 9년여 동안 여러 고승들에게 불법을 배웠을 것으로 추정된다.


자세한 기록이 남겨져 있지 않기 때문에 옛 시절에 구법 유학승이 언제부터 어느 정도 규모로 보내졌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양 나라와 교류할 수 있는 서쪽의 바닷길이 제대로 열리지 않은 상황에서 중국으로 유학하는 것 자체가 죽음을 무릅써야만 하는 고난의 길이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신라 법랑이 중국 선법 이은 첫 선승 

중국 황메이현 사조사 비로탑안에 도신 스님 입상과 함께 봉안된 법랑 스님 입상.

 

 

삼국시대 초기 유학승들은 아무도 가지 않았던 길을 열어야 했기 때문에 그야말로 생사를 건 고난의 길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중국으로 유학한 한국불교 최초의 유학승 백제 발정이 그랬고, 인도로 가는 첫 번째 뱃길을 열었던 겸익이 그랬다.


그러나 신라가 삼국을 통합한 통일신라시대로 접어들어서면서 해외로 나가는 위험요소가 줄어들었고, 그만큼 유학승들의 수도 부쩍 늘어났다. 그리고 유학승들의 구법행이 통일신라 후대까지 이어지면서 한국불교에는 또 다른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한국불교사에 있어서 이 시기에 일어난 가장 큰 변화는 바로 선종의 등장이다. 중국으로 유학했던 신라 스님들이 고국으로 돌아오면서 선종이 전파되기 시작했고, 이들은 지방 토호세력의 지원을 받으면서 서라벌 중심의 교학을 뛰어넘는 영향력을 발휘하면서 서서히 정착했다.

 

황메이현 사조사에서 도신에 구법

선종을 이 땅에 소개한 최초의 인물을 도의 스님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적지 않으나, 그 이전에 중국 선종의 4조 도신(道信, 583∼654) 스님 문하에서 공부하고 귀국해 호거산에서 법을 전한 법랑(法郞, 632∼?) 스님이 있었다.


법랑이 법을 구했던 사조사는 이곳 저곳으로 옮겨 다니는 운수행각의 중국 선종 수행풍토를 한 곳에 머물며 법을 전하는 집단 수행 형식으로 전환시킨 대표적 도량이다. 집단수행 풍토의 정착은 중국 내 정치적 환경 변화에 따라 생존을 위해 불가피한 선택이기도 했으나, 선농일치를 주창했던 4조 도신 스님의 뜻이기도 했다.

 

법랑은 사조사에서 도신 스님의 법을 전해 받았으며 그 흔적은 지금도 중국 황메이현 사조사에 남아 있다. 도신 스님의 상을 모신 비로탑 안에 도신의 4대 제자 중 한 명이었던 법랑 스님의 입상이 함께 모셔져 있는 것. 법랑의 선법은 신행(神行, 704∼779)에게 전해졌고, 이후 준범, 혜은, 도헌으로 이어져 훗날 지증도헌 스님이 희양산에서 구산선문의 하나인 희양산문을 열었다.

 

법랑에 대한 기록은 제대로 전해지지 않아 생몰연대나 입당 그리고 구법시기 등을 정확히 알 수는 없다. 다만 「도헌국사 지선의 비문」, 『대동선교고』「사조명」, 「신행비」등에서 법랑에 대한 기록을 볼 수 있을 뿐이다. 「사조명」에서는 “먼 나라의 고사와 이역의 고인들이 험난한 길을 무릅쓰고 법랑 스님이 있는 곳에 모여들었다”고 기록하고 있어, 법랑 스님의 그릇이 작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또 법랑 스님이 신라에서 전법활동을 했음은 그의 제자 신행을 찬하는 「신행비」에 “법랑 선사가 호거산에서 지혜의 등불을 전하고 있음을 듣고 그 곳에 나아가 문득 깊은 뜻을 받았다”는 대목에서 확인할 수 있다. 법랑의 법을 이은 신행은 스승이 입적한 후에 중국으로 유학을 다녀와 선법을 펼쳤다. 이들의 선은 중국선 중에서도 북종선(北宗禪) 계통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조계종 종조로 추앙 받고 있는 도의(道義) 역시 생몰연대를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중국에서 40여 년간 공부하고 신라 헌덕왕 13년(821)에 돌아와 처음으로 남종선(南宗禪)을 전한 선승이다.

 

도의는 강서성 홍주에서 마조의 제자인 서당지장(西堂智藏, 735∼814) 문하에서 법을 구했고, 이때 서당이 도의에게 법을 전하면서 “진실로 법을 전할 만하다면 이런 사람이 아니고 누구에게 전하랴”라고 했을 정도로 크게 인정받았다. 또 백장선사 역시 “강서의 선맥이 몽땅 동국으로 가는구나”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을 만큼 수행력이 뛰어났다.


그러나 도의 역시 법랑처럼 귀국 후 선법을 전하는데 어려움을 겪게 되자 때가 무르익지 않았음을 안타깝게 여기며 설악산 진전사에 은거해 후학을 양성하는데 주력했다. 하지만 이 때문에 도의의 선맥은 신라불교를 거쳐 고려와 조선으로 이어지면서 근현대까지 이어질 수 있었고, 오늘날 한국불교의 근간을 이루며 조계종 종조로 추앙 받고 있다. 당시 도의에 앞서 신라의 본여 스님이 남악회양으로부터 법을 얻었다고 하나, 『전등록』에 이름만 올라 있을 뿐 자세한 기록은 없다. 도의 역시 『전등록』에 서당지장의 제자로 이름이 올라 있다.

 

반면 『조당집』에는 도의에 대한 보다 자세한 기록이 남아 있다. 『조당집』에서는 “설악 진전사 원적선사는 서당의 법을 이었고, 명주에서 살았다. 선사의 휘는 도의이고 속성은 왕씨였다.…건중 5년 갑자년에 사신인 한찬호·김양공을 따라 바다를 건너 입당했다.…조계에 가서 조사당을 참배하려는데 문이 갑자기 저절로 열렸다.…강서의 홍주 개원사에 가서 서당지장에 참하여 스승으로 모셨다.…”며 비교적 자세하게 전하고 있다. 오늘날 도의에 대한 기록 등은 여기에 근거한 점이 크다고 할 수 있다.

 

도의가 진전사에 은거해 후학을 양성하기 시작한지 10년이 지난 830년 이후 중국에서 남종선을 공부한 스님들이 귀국하면서 선종의 상황은 크게 달라졌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듯, 그 10년 사이에 선종의 역량도 달라진 것이다. 대표적 인물이 홍척(洪陟)으로, 그는 지리산에 머물며 선을 전파하면서 일명 남한조사(南漢祖師) 또는 증각대사(證覺大師)로 불렸다. 헌덕왕 때 당나라에 유학해 서당지장의 심법을 배우고 826년 흥덕왕 1년에 귀국, 828년에 실상사를 창건해 서당지장의 선풍을 선양하며 최초의 구산선문인 실상산문을 열었다.

 

도의, 귀국 후 진전사서 후학 양성

이 무렵 도의·홍척과 비슷한 과정을 거친 유학승들이 적지 않았다. 혜소(惠昭, 774~850), 혜철(慧徹, 785~861), 절중(折中, 826~900), 체징(體澄, 804~880) 스님 등이 대표적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가운데 체징은 도의의 제자인 염거(廉居) 스님 문하에서 수학하고 도반들과 함께 중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러나 중국 유학에서 배우는 것들이 결국은 스승 염거에게 배운 내용과 다르지 않음을 깨닫고 곧 신라로 돌아왔다. 그리고 장흥 보림사에 가지산문을 열어 선을 선양했다.

 

현재 한국선의 원류를 규정함에 있어서 학자들의 견해는 조금씩 다르다. 크게 한국에 선법이 전래된 최초의 시기, 최초로 선법을 실수하고 펼쳤던 인물, 현재까지 전승되고 있는 법맥 등으로 구분해 볼 수 있으나 어찌됐든 최초의 유학과 전래라는 측면에서 볼 때 법랑 스님이 주인공이다.

 

이들 외에도 유학승들의 활약은 여러 부분에서 그 역할이 다르게 나타난다. 명관(明觀) 스님은 565년 진나라에 유학한 후 그 나라 사신과 함께 돌아오는 길에 불교 경론 2700여권을 가져 왔고, 이는 곧 신라 불교학 발전의 중대한 토대가 되었다. 『해동고승전』에서는 이 대목을 “처음에 신라에는 경전이나 불상이 별로 없었는데 이제야 분명히 크게 갖추어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뿐만 아니다. 신라 안홍법사(安弘法師)는 진흥왕 37년(576)에 구법하고 돌아오면서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에 들어와 있던 인도승 비마라(毗摩羅)·농가타(農伽陀)·불타승가(佛陀僧伽) 등과 함께 귀국했다. 이들 인도승은 공식적으로 신라에 온 최초의 외국인 승려다. 그리고 이때 처음으로 대승경전인 『능가경』과 『승만경』을 갖고 왔다. 역사 기록물에 유학승들이 돌아오면서 가져온 경전의 이름이 구체적으로 나타난 첫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명랑이 처음으로 밀교 전파

신라에서는 선덕여왕 재위기간(632∼647)에 스님들의 유학이 많았고, 이들이 귀국해 신라불교의 전성기를 형성했다. 명랑(明朗)과 자장(慈藏)이 당나라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크게 활약한 시기도 이 무렵이다.

 

명랑은 당나라에서 공부하고 635년에 귀국하면서 최초로 밀교를 들여왔다. 이어 삼국통일 후 당나라가 신라를 침범하려는 기세가 엿보일 때 밀교의 비법인 ‘무두루비법’을 써서 당나라 군사를 크게 무찔렀고 훗날 신라 신인종의 종조가 되었다. 자장은 643년에 귀국하면서 바리와 가사, 사리, 불경 400상자, 번(幡), 당(幢), 화개(花蓋) 등 법당을 장엄하게 꾸미는 장엄물을 들여옴으로써 신라에 새로운 불교문화를 전하기도 했다.


백제의 발정 스님을 시작으로 한 유학승들의 역할은 이처럼 교학, 수행, 의식 등 각 분야에 활력을 불어넣으며 한국불교 발전의 동력이 되었다.

 

보현사 김법룡·김승법이 근대 첫 유학승

 

(사진 왼쪽부터)이동인, 김법린, 백성욱 스님.

 

조선시대에 숭유억불 정책이 이어지는 동안 불교는 크게 위축되면서 산중불교로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이에 따라 법을 구하고자 인도·중국 등 해외 유학 길에 나서는 스님들의 발길도 크게 줄어들었고, 결국 이 시대 유학승에 대한 자취를 언급한 기록을 찾는 것 자체가 어려운 상황에 이르렀다.

 

해외 유학승에 대한 기록은 조선의 국운이 다해 쇠망의 길을 걷게 되는 한말에 이르러서야 다시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시기 유학은 조선침략의 전략에 따라 접근한 일본의 영향을 받으며 일본으로의 쏠림 현상이 두드러졌다. 물론 여기에는 한국불교가 500년 가까운 세월 침체를 면치 못하는 사이에 서구문물과 서양의 교육체계까지 받아들인 일본불교가 크게 성장해 있었던 이유도 있었다.

 

기록으로 볼 때 한말 가장 먼저 일본으로 건너간 스님은 이동인이다. 이동인은 1879년 6월 초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어를 배우고 문물을 익히면서 일본사회의 이모저모를 배웠다. 그러나 실제 학교를 다니거나 법을 구했다는 기록이 없어 유학승으로 보는데는 무리가 있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이동인은 1879년 최초로 일본행

그러나 이동인은 독립운동가 서재필이 회고록에서 “이동인이라는 승려가 우리를 이끌어주었고 우리는 그러한 책(이동인이 일본에서 들여온 물리·화학·지리·역사 등)을 읽어 그 사상을 몸에 익혔으니 봉원사가 우리 개화파의 온상인 것이다.”라고 언급할 정도로 개화파 젊은이들의 사상에 영향을 주었다. 따라서 이동인에 대해서는 조선을 문명국가로 만들려고 한 노력에 대해 긍정적 평가가 따르고 있다.

하지만 한편에서는 이동인이 부산에 별원을 세운 일본 혼간사(本願寺)의 승려 오쿠무라의 알선으로 일본에 가고 일본에서 정치가들을 접촉하는 등 일본인들과 친분관계를 유지했던 이유를 들어 일본의 조선침략 세력에 부화뇌동한 전형적인 친일인물이라는 평가도 있다. 그러나 어찌됐든 이동인이 기록에 나타난 인물 중 한말 일본으로 건너간 최초의 스님이라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다. 또한 이는 근대에 접어들어 스님들의 해외 진출 첫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동인에 이어 일본으로 간 인물은 1881년 5월 유점사 스님 묵암 등 4인이다. 『조선개교50년지(朝鮮開敎50年誌)』에 “1881년 5월 3일 유점사승 묵암외 3인이 일본 경도로 유학을 갔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이들 역시 정식 학교에 입학해 공부했는지 여부를 알 수 있는 확실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일본 유학은 만해 스님이 1910년 『조선불교유신론』을 통해 “인도에 가 배워서 부처님과 조사들의 참다운 발자취를 찾게 하며… 또 중국에 유학해… 그리고 구미의 여러 문명국에 유학하여 그 종교의 연혁·현황과 기타의 여러 가지 일을 배워서 우리의 모자라는 부분을 보충한다면 어찌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유학이 적절히 행해진다면 불가사의한 이익이 예사로 많을 것이 아닐 것이니 뜻 있는 이라면 마땅히 심사숙고할 문제인 줄 안다”며 승려의 유학 필요성을 강조한 이후 점차 확대됐다. 물론 이 시기 한국 불교계는 ‘근대’라는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고 교단의 중흥을 위한 개혁을 추진하면서 불교의 근대화를 이끌 인재 양성이 절실했던 때이기도 하다. 때문에 만해 스님의 유학 필요성 강조가 스님들의 유학 확산에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으나, 그 이후 확대된 것만은 사실이다.

 

그렇다면 기록상 유학으로 인정할 수 있는 근대 첫 번째 유학승은 누구일까.
재일조선불교청년회 기관지인「금강저(金剛杵)」에 따르면 일제시대 최초의 일본 유학생은 1910년 말 유학해 경도 화원중학에 입학한 보현사 출신의 김법룡과 김승법이다. 이후 1913년 12명, 1914년 14명 등 유학생 수는 점차 늘어났고, 이들은 대부분 임제종과 조동종 등 선종계열의 중학이나 대학 등에 입학했다.

 

근대에 들어 첫 번째 유학승이 일본으로 유학한 보현사 김법룡과 김승법이라면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첫 번째 유학승은 1918년 여름 조동종 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한 건봉사 이지광, 용주사 김정해, 유점사 이혼성 등 3명이다. 이때 국내 불교계는 이들의 귀국을 축하하는 대대적인 환영회를 열 정도로 유학승들에 대한 기대가 높기도 했다.


이후 선진화된 일본불교를 배워야 한다는 목소리와 함께 일본 유학의 필요성이 높아지면서 각 교구본사에서 공비 유학생을 선발해 파견한 경우가 늘어났다. 그리고 조선의 대표적 친일파들이 참여해 구성된 조선불교단에서도 유학생을 파견했으며, 이도 저도 아닌 경우 고학으로 일본 유학을 떠난 스님들도 있었다.

 

그러나 일본 유학생들은 귀국할 때 결혼해서 돌아오거나, 돌아와서는 자신을 후원해 준 은사 등 주지들을 축출하는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여기에 더해 불교에 대한 학식까지 부족한 상황이 적지 않게 발생하면서 기성 세대들과의 갈등이 빈번해졌다. 이에 따라 문제가 심각해지자 유학생 선발과 관리규정에 관한 세부사항을 만들어 유학승을 관리하는 상황이 빚어지기도 했다.

 

28세 요절 이영재 ‘혁신론’주장

그렇다고 근대 들어 불기 시작한 스님들의 유학 열풍이 부정적 영향만 미친 것은 아니었다. 1920년 일본대학 종교과에 입학하고, 동경제국대학 인도철학과에 진학해 공부했던 이영재는 안팎의 상황을 살핀 후 조선일보에 총 22회에 걸친 연재를 통해 ‘조선불교혁신론’을 주창하기도 했다. 재일조선불교청년회를 조직하고 기관지 「금강저」 발행에 헌신하기도 했던 이영재는 이후 1925년 인도 유학 길에 올랐으나 구법순례를 하던 중 1927년 스리랑카에서 28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하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이영재와 함께 활동했던 일본 유학승들 가운데는 조국의 현실을 직시해 독립운동 대열에 동참한 이들도 적지 않았다.

 

이에 따라 일본 유학승의 증가는 한국불교 근대화의 주춧돌을 견고하게 놓을 수 있는 계기가 됐다는 긍정적 측면이 있는 반면, 이들 가운데 일제와 타협하면서 중생들의 삶에 고통을 더한 인물이 적지 않았다는 부정적 측면이 교차하고 있다.

 

조계종 교육원이 1998년 발간한 『승가교육 2집』에 「일제시대 불교 유학생의 동향」을 발표한 이경순 씨는 “대다수 일본 유학을 경험한 승려들은 한국 승단의 왜색화를 촉진한 측면이 있었다”고 지적하면서도 “승려의 유학은 승려의 신분적 지위를 향상시키고 불교의 사회적 역할을 제고시켰으며 교단의 근대화를 추진하는 원동력이 되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이처럼 근대 유학승의 대다수가 일본을 택하긴 했으나, 그렇다고 해서 다른 나라로 향했던 인물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대표적 인물이 1919년 중앙학림을 졸업하고 프랑스 파리로 유학한 김법린이다. 김법린은 경상북도 영천 출생으로 14세에 출가해 1915년 범어사에서 비구계를 수지했다. 파리로 유학해 파리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귀국했다가 1930년 일본 고마자와 대학교에서 불교를 연구하기도 했다. 이어 1933년부터 다솔사, 범어사, 해인사 등에서 불교를 강의했고, 독립운동 과정에서 여러 해 복역을 하기도 했다. 김법린은 8·15광복 후 불교중앙총무원장으로 불교혁신운동에 앞장섰고 동국학원 이사장과 총장을 역임하면서 후학들을 지도하기도 했다. 김법린은 불교계뿐만 아니라 불교 밖에서도 문교부장관, 원자력원장, 3대 민의원,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위원장 등을 역임하는 등 근대 유학승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활약을 보였다. 그에게는 독립운동에 기여한 공로로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기도 했다.

 

김법린 파리-백성욱 독일 유학

그리고 김법린과 함께 1919년 중앙학림을 졸업한 백성욱은 1922년 독일 뷔르츠부르크대학교 철학과에 입학해 같은 학교에서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귀국 후 중앙불교전문학교 교수로 재직한 백성욱 역시 동국대 총장과 동국학원 이사장을 역임하면서 유학승 신분으로 배운 바를 후학들에게 전하는데 힘을 아끼지 않았다. 이들 이외에 중국으로 유학한 스님들이 있으나, 이들이 공부를 위해 유학길에 오른 것인지 정치적 망명 차원이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백제 발정과 겸익으로 시작한 한국불교 유학승 관련 기록은 조선시대 긴 세월 그 종적을 찾을 길이 없다가 이렇게 근대에 접어든 한말부터 다시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일제시대 일본에 편중됐던 유학승의 발길은 현재 세계 각국으로 향하고 있으며 다양한 학문과 문화를 배워 한국불교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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