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고국원왕(故國原王) 모(母) 주씨(周氏)
중(中)에 인질로 끌려간 고구려 왕의 어머니
주씨(周氏)는 고구려 제16대 고국원왕(故國原王, 재위 331∼371)의 어머니이다. 고국원왕(故國原王)은 고구려 제15대 미천왕(美川王, 재위 300~331)의 아들로 314년(미천왕 15)에 태자로 책봉되었으며, 331년 2월 미천왕(美川王)이 세상을 떠나면서 즉위하였다. 주씨(周氏)는 미천왕(美川王) 대에는 행적이 전혀 드러나지 않고, 아들 고국원왕(故國原王)이 즉위한 이후 왕모 주씨(周氏)로 사료에 그 존재가 언급되고 있다.
주씨(周氏)는 왕실 여성으로 생활에 빈궁을 겪지는 않았지만 삶이 평탄하지는 않았다. 주씨(周氏)가 살았던 미천왕(美川王) 대와 고국원왕(故國原王) 대는 고구려가 영토 확장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던 시기였다. 미천왕(美川王)은 북으로는 요동의 서안평(西安平)을 점령하고, 남으로는 낙랑군과 대방군을 정벌하였다. 고국원왕(故國原王)도 부왕(父王)의 유지(遺志)를 받들어 요동지역 확보를 위해 노력했다. 당시 요동지방에서는 선비족의 일파인 모용부(慕容部)의 전연(前燕)이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다.
두 나라의 충돌은 불가피했다. 342년(고국원왕 12년) 전연(前燕)의 모용황(慕容皝)은 고구려를 기습 공격했다. 환도성은 함락되었고 고국원왕(故國原王)은 겨우 단신으로 빠져나가야 했다. 그러나 왕모인 주씨(周氏)는 미처 피신하지 못하고 사로잡혔다. 전연(前燕)의 군대는 퇴각하면서 주씨(周氏)를 인질로 삼아 전연(前燕)의 수도로 끌고 갔다. 이때 고구려 백성 5만여 명이 함께 끌려갔다. 또한 전연(前燕)의 군대는 미천왕릉을 파헤치고 미천왕(美川王)의 시신까지 가져갔다.
주씨(周氏)는 전연(前燕)의 수도에서 인질로 억류생활을 하였다. 고국원왕(故國原王)은 전연(前燕)에 사신을 보내 미천왕(美川王)의 시신을 돌려주고 왕모인 주씨(周氏)도 돌려보낼 것을 간청했다. 그러나 전연(前燕)의 모용황(慕容皝)은 쉽게 들어주지 않았다. 이듬해인 343년 고국원왕(故國原王)이 동생 무(武)를 보내 전연(前燕)에 신하의 예를 갖추자, 모용황(慕容皝)은 미천왕(美川王)의 시신을 돌려주었다. 그러나 주씨(周氏)는 돌려보내지 않았다. 주씨(周氏)는 그 뒤에도 전연(前燕)의 수도에서 억류생활을 하였다.
그러다가 355년(고국원왕 25)에야 주씨(周氏)는 고구려로 돌아올 수 있었다. 모용황(慕容皝)이 고국원왕(故國原王)을 ‘정동대장군영주자사낙랑공고구려왕(征東大將軍營州刺史樂浪公高句麗王)’에 책봉하면서, 주씨(周氏)를 고구려로 돌려보내기로 한 것이다. 당시 전연(前燕)은 강남의 동진(東晋), 관중의 전진(前秦)과 대결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므로 더 이상 고구려와 대립할 수만은 없었던 것이다. 인질로 끌려간 지 13년 만에 주씨(周氏)는 고국의 땅을 밟을 수 있었다.
전근대 대부분 왕조에서는 여성이 정치적인 영향력을 가지는 것은 제한적이었다. 그렇지만 여성이 국가나 정치적인 상황과 무관한 것은 아니다. 주씨(周氏)는 왕의 어머니이지만 나라가 힘이 없자 외국에 끌려가 인질 생활을 하는 비운의 삶을 살았다. 주씨(周氏)의 사례는 여성의 운명이 결코 나라의 운명과 분리되어 있지 않으며, 때로는 여성이기에 이중적인 고통을 겪기도 했음을 보여준다.
김선주 중앙대학교 강사 출처; 이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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