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나라①
당나라, 해양실크로드를 본격적으로 열다
당 전성기 종교는 불교였다. 장안, 낙양
외에도 전국각처에 불교사원이 들어섰다
당나라는 북방의 육상실크로드, 남방의
해양실크로드를 모두 가동한 시대이다.
7세기 접어들면 해양실크로드 역사에서
전환을 목격한다. 이슬람이 세력을 확산
‘무슬림 바다’로 인도양이 변해가기 시작,
중국은 당 제국이 등장, 해양시대를 연다.
당대 해로는 ‘신당서 지리지’에 수록된
가탐의 ‘광주통해이도’에 잘 정리되었다
‘광주에서 페르시아만’ 여정도 기술했다.
천축국 구법승이 겪은 경험담도 포함 …
개원사는 중국의 해상실크로드를 기념하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다. 여기 석재에서 힌두신화에서 가져온 이야기를 각인한 기동과 사자와 연꽃이 각인된 기단석 등 인도의 흔적이 남아있다.
광주 개원사에 남아있는 인도 흔적
당(唐)은 가히 ‘종교박람회장‘이라고 불릴 만큼 개방적이었다. 네스토리우스교(경교)를 비롯하여 힌두교, 마니교 등이 공존했다. 그러나 당 전성기의 종교는 역시 불교였다. 장안, 낙양 외에도 전국 각처에 불교사원이 들어섰다. 현장(玄裝)·도선(道宣)·의정(義淨)·법장(法藏)·신수(神秀)·혜능(惠能) 등 저명한 승려가 속속 등장했다. 많은 승려들이 천축으로 떠났으며, 반대로 천축 승려들이 중국으로 들어왔다. 그 숫자와 빈도에 있어서 달마가 들어왔던 양나라 시대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만큼 중국의 해양력이 돋보이던 시대였다.
당나라 시대 가장 완벽한 바다를 통한 인도의 흔적은 개원사(開元寺)에서 확인된다. 국제무역항 천주의 진장강(晋江) 강변에는 개원사 쌍탑이 위엄을 뽐내며 서있다. 개원사는 618년 당이 건국되고 70여 년 뒤인 686년에 창건했다. 창건 당시 연화도창(延華道昌)이라 부르다가 개원 26년(738)에 ‘개원사’로 개칭했다. 이 사찰은 현재 중국의 해상실크로드를 기념하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다.
개원사는 완벽한 중국 절인데, 힌두 양식이 섞여 있다. 해양실크로드를 따라 힌두문명이 들어온 결과다. 고대 인도와 중국문명이 만난 다양한 증거 중의 하나다. 명대에 중축하면서 가져다 쓴 개원사 석재에서 인도 양식이 잘 나타난다. 힌두 신화에서 가져온 이야기를 각인한 기동과 사자와 연꽃이 각인된 기단석이 남아있다. 이들 모두 비슈누와 시바를 위해 봉헌한 것이다.
대웅보전은 개원사 본당이다. 86개의 큰 돌기둥이 있는데, 기둥을 축소하여 지은 들보형 목골을 지지한다. 대웅보전 기둥 장식은 비슈누를 위한 것이다. 대웅보전 월대(月臺)의 하단에는 인면수신(人面獸身) 부조가 각인되어 있다. 당나라와 천축국의 활발한 교류 흔적이다.
해양실크로드 개척한 광주통해이도
당나라는 북방의 육상실크로드, 남방의 해양실크로드를 모두 가동한 시대이다. 7세기로 접어들면, 해양실크로드 역사에서 전환을 목격한다. 이슬람이 세력을 확산해 ‘무슬림의 바다’로 인도양이 변해가기 시작했고, 중국은 당 제국이 등장하여 해양의 시대를 열었다. 세계사적으로 동방의 당 제국, 서방의 이슬람제국이 동시대에 성립된 것은 역사적 우연, 혹은 필연적 역사였다. 서쪽에서 이슬람 상선이 몰려오고 있었고 동쪽에서는 당나라 상선이 인도양을 건넜다.
해양실크로드의 출발지인 중국 광저우의 제사터인 남해신묘.
조선과 항법기술의 발달로 동남아, 믈라카 해협, 인도양, 홍해, 아프리카 항로가 개통되어 마침내 해양실크로드가 육상실크로드를 대체했다. 당대 해로는 <신당서> 지리지에 수록된 가탐의 <광주통해이도(廣州通海夷道)>에서 잘 정리되었다. 가탐은 지리학자이자 지도학자, 또 천문학자이자 음양가였다. 지리학을 좋아해 외국 사신이나 해외에서 돌아온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만나서 그곳의 산천지리 및 토지와 도로 상황 등을 꼼꼼히 물었다. 30여 년 간 자료 수집과 연구를 바탕으로 5부작 지리학을 편찬하고 많은 지도를 만들었다. 가탐은 <광주통해이도>에서 광주에서 페르시아만에 이르는 여정을 기술했다. 천축국 구법승이 겪은 경험담도 포함되었다.
<광주통해이도>는 당 시대 중국 동해안을 따라 동남아, 인도양 북부, 홍해 연안, 아프리카 북동부, 페르시아만 국가로 이어지는 해로다. 가탐은 광주에서 페르시아만으로 이어지는 해로와 항해 일정을 상세히 밝혔다. 이 항로를 따라 광주에서 시작하여 오늘날의 남중국해, 인도양, 페르시아만, 동아프리카 및 지중해로 100개가 넘는 국가와 지역을 통과하는 항로가 완성되었다. 당연히 이 항로를 따라서 당나라와 천축이 연결되었다.
먼 바닷길은 여전히 힘들었다. 4세기에 동진의 법현이 귀환길에 죽을 고생을 한 것이 이를 잘 입증한다. 당대에는 상선 크기와 항해술, 해로 등이 발전하였으므로, 7세기 의정은 법현에 비하면 한결 수월하게 다녀왔다. 한국과 일본의 승려들도 당의 이 항로를 이용하여 천축을 오고갔다.
바닷길에서 완성된 중국 밀교의 법맥
바닷길을 이용한 구법승 중에 의정이 단연 중요하다. 의정은 산동 출신으로 법현과 현장을 사모했다. 671년에 번우(오늘의 광주)에서 출발하여 교지(통킹만)로 들어갔다. 천축으로 가는 중요 거점은 교지였다. 의정의 <대당서역구법고승전(大唐西域求法高僧傳)>에 따르면, 많은 승려가 교지에 머물면서 불교를 전파하기도 하고, 교지를 거점으로 인도로 떠났다.
의정은 뱃길로 스리비자야(삼불제)로 들어갔다. 의정은 오가는 여정에 참파, 부남, 말라유, 갈도(말레이반도), 나인국(裸人國, 니코바르 제도), 탐마입저국(耽摩立底國), 인도 가이각답(加爾各答) 등을 들렸다. 30여 개국을 다녔으며 그 기간만도 24년이 걸렸다. 상선 루트를 적절하게 활용한 덕분에 가능한 일들이었다.
남천축의 금강지(金剛智, Vajrabodhi)는 나란다에서 10년 수행했으며, 사자국과 스리비자야를 경유하여 당 개원(開元) 7년(719) 바다를 건너서 광주에 당도했다. 장안으로 초빙되어 자은사(慈恩寺)와 천복사(薦福寺)에서 밀교 전도에 전념했다. 인도 승려가 바닷길로 중국에 당도한 것이다.
불공(不空) 역시 싱할라(스리랑카) 사람이다. 719년 자바에서 금강지를 만난다. 자바에는 중국 상선들이 들어오고 있었고 무역로가 개척되어 있었다. 불공은 금강지와 함께 중국으로 들어와 경전을 번역했다. 금강지가 죽자 불공은 고향으로 돌아갈 채비를 갖추었다. 당 조정은 그에게 싱할라에 보낼 국서를 전달했다. 불공은 광주에서 배를 타고 1년여 만에 싱할라에 당도했다. 그는 1200여 권의 불경을 수집했으며, 오천축(五天竺)을 두루 방문했다. 746년에 장안으로 돌아와 경전 번역을 다시 시작했으며 중국 밀교의 종사(宗師)가 됐다.
신라 승려 혜초(慧超)는 719년 광주에서 인도 승려 금강지를 만나 제자가 되어 밀교를 배웠다. 그의 권유로 천축으로 건너갔다. 유학승이 인도에 간 중요한 목적 가운데 하나는 나란다 불교대학에서 수학하려는 것이었다. 혜초의 경우, 나란다에서 공부한 흔적은 없다. 혜초는 불적지(佛蹟地)를 참배하고 밀교를 공부하려는 목적으로 인도에 갔음을 알 수 있다.
혜초는 만 4년 동안 천축국을 여행했고, 오늘날의 카슈미르, 아프가니스탄, 중앙아시아 일대를 답사했다. 인도 여러 곳을 둘러본 후 중앙아시아를 거쳐 727년 30세 전후하여 장안으로 돌아왔다. 금강지→불공→혜초로 이어지는 중국 밀교의 법맥이 바닷길에서 완성된 셈이다.
주강현 해양문명사가 [불교신문 373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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