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달나라 연대기 역사(신시 시대에서 청구 시대로)
배달나라 7대 거련(居連) 환웅(桓雄) 때인 서기전 3252년에 웅족 출신이자 고시씨(高矢氏)의 후손인 소전씨(少典氏)를 강수(姜水)에 봉하여 감병(監兵)을 관장하게 하였다. 강수는 태백산(太白山) 부근에 흐르는 황하(黃河)의 지류가 되며, 소전씨가 봉해진 나라는 이 강수지역으로서 동서남북중 방향으로 볼 때 서방에 해당한다.
신시(神市) 시대에서 청구(靑邱) 시대로
서기전 3218년에 소전씨의 아들인 염제신농씨(炎帝神農氏)가 배달나라의 우가(牛加)를 지낸 후, 산동지역의 태호복희의 나라를 접수하여 염제국(炎帝國)을 열었다. 공손씨는 소전씨의 별파(別派)가 된다. 염제(炎帝)는 남쪽의 임금이라는 뜻이 되고, 진제(震帝)는 하우낙서(夏禹洛書)와 주문왕팔괘도(周文王八卦圖)에 의하면 동쪽의 임금이 된다.
서기전 3000년경 배달나라 갈고(葛古) 환웅(桓雄)이 염제신농국과 경계를 정하였다. 이는 제후국인 염제신농국의 관할 범위를 정한 것으로 자치를 인정해 준 것이다.
소전씨가 봉해진 유웅국(有熊國)은 서기전 2770년경 소전씨의 후손인 공손씨(公孫氏)가 이었으며, 서기전 2698년 계해년에 다시 공손씨의 아들 또는 후손인 황제헌원(黃帝軒轅)이 이었다.
치우천왕 면와(面瓦)
서기전 2706년에 치우천왕이 43세의 나이에 배달나라 14대 환웅으로 즉위하였다. 치우라는 말은 우뢰와 비가 산과 강을 크게 바꾼다는 뜻이며, 지금의 말로 남아 있는 “치우다”라는 말의 “치우”가 된다. 즉 천지개벽을 뜻하는 말이다.
치우천왕은 호족(虎族)의 무리를 따로 황하 상류지역이 되는 하삭(河朔)에 옮겨 살게 하고, 땅을 개간하였으며, 갈로산(葛盧山)에서 광석을 캐어 구리와 주석과 쇠를 주조하여 도개(刀鎧), 모극(矛戟), 대궁(大弓), 호시(楛矢)를 만들고, 또 오구장(五丘杖), 도극(刀戟), 태노(太弩), 예과(芮戈), 옹호극(壅狐戟), 비석박격기(飛石迫擊機) 등의 병기도 만들고, 군대를 조련하였으며, 산업을 일으켰다.
치우천왕은 귀신같은 용맹이 뛰어났으며 동두철액(銅頭鐵額)을 하고서 능히 큰 안개를 일으키듯 온 누리를 다스릴 수 있었다.
서기전 2700년경 염제신농국이 쇠퇴하자 여러 제후들이 다투어 욕심을 내자 치우천왕은 태백산에 있던 수도를 동쪽으로 옮기어 1년 동안 9제후국을 평정하고 옹호산(雍狐山)에 웅거하고, 회대(淮岱) 사이의 산동지역을 개척하였다. 이를 청구(靑邱)라 하며 치우천왕의 배달나라 시대를 청구시대라 하는 것이다.
치우천왕은 다른 제후들보다 먼저 군사를 일으켜 양수(洋水)를 건너 염제국의 수도인 공상(空桑: 陳留)에 이르러 서기전 2697년 갑자년에 선봉장이던 소호(少昊)를 항복시키고, 염제신농국을 평정하여 5대 유망(楡罔)을 폐하고서 유망의 아들 괴(魁)를 왕으로 봉하였다.
이 염제신농의 후예국이 단웅국(檀熊國)이라 불린다. 이 단웅국의 5대 홍제(洪帝)의 섭정(攝政)이 곧 단군왕검이며 서기전 2357년부터 서기전 2333년까지 단군왕검이 홍제의 외손(外孫)으로서 다스린 것이 된다.
서기전 2698년에 공손씨를 이어 유웅국의 왕이 된 헌원이 욕심이 생겨 염제신농국을 차지한 치우천왕에게 도전하였다. 유웅국은 소전씨로부터 이어져 온 나라인데, 그 백성들은 지소씨족(支巢氏族)과 황토인(黃土人)들로 이루어졌다.
지소씨족은 파미르고원에서 서기전 7197년에 사방분거 하기 이전인 서기전 8000년경에 먼저 동쪽으로 마고성(麻姑城)을 나가 사막지대에 정착한 선주민이다. 또 황토인은 서기전 3400년경 여와(女媧)가 혼인법을 제정하여 불어나게 한 족속으로 중국인들의 조상이 된다.
서기전 2700년경 당시 치우천왕의 군사들은 동철기(銅鐵器)를 사용하고 있었으며, 헌원의 유웅국 군사들은 석기를 사용하고 있었다고 기록된다. 헌원이 군사를 일으켜 치우천왕에게 도전하기를 10년 사이에 73회나 되며 합100여회가 된다. 그러나, 헌원은 연전연패함으로써 급기야는 전쟁중에 방향을 잃지 않고 도주하기 위하여 지남거(指南車)를 만들기도 하였다.
치우천왕은 81개 편대(編隊)를 조직하여 탁록(𣵠鹿)의 벌판으로 나아가 헌원의 무리를 격파하였다. 먼저, 치우천왕은 군사들에게 삼륜구서(三倫九誓)를 저버린 헌원을 토벌할 것을 공표하고 독려하였다. 치우천왕의 군사들이 지나간 자리에는 100리에 걸쳐 헌원의 군사들이 흘린 피로 물들일 만큼 헌원은 전쟁마다 큰 타격을 받았다.
산해경(山海經)에서 치우가 풍백(風伯)과 우사(雨師)에게 청하여 폭풍우로 헌원(軒轅)을 혼줄나게 하였다고 기록하는 것은, 치우가 곧 배달나라의 환웅천왕(桓雄天王)으로서 풍백과 우사의 군사들을 이끌고 헌원을 토벌한 것을 나타낸다.
아마도 헌원이 풍백과 우사가 아닌 운사(雲師)였다가 반란을 일으켰을 가능성이 많은데, 헌원이 유웅국의 벼슬이름에 운(雲)자를 사용한 것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즉 헌원은 유웅국 출신으로서 배달나라의 운사를 지내다가 염제신농국이 쇠퇴하자 욕심이 생겨 운사(雲師) 자리를 내놓고 유웅국으로 돌아가 군사를 모아 난을 일으킨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출처; 플러스코리아 천산태백 역사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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