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빈최씨 사우제문 원고
숙빈최씨 소령묘갈문 원고
읍궁진장첩
영조어필 보물1631호
소 재 지; 경기 성남시, 수원시
영조어필 - 숙빈최씨 사우제문 원고(英祖御筆-淑嬪崔氏祠宇祭文原稿)는 영조(1694~1776)가 1726년 11월 6일에 친어머니 숙빈최씨(淑嬪崔氏, 1670~1718)의 생신을 맞아 숙빈묘(淑嬪廟)에 올렸던 제문의 원고이다. 주홍색 화문 비단에 싼 표지에는 “어제친제제문초(御筆親祭祭文草)”와 “영조어제어필, 숙빈최씨궤연 및 정빈이씨사우치제문 「발본」(英祖御製御筆, 淑嬪崔氏几筵 及 靖嬪李氏祠宇致祭文 「抄本」)”이라 쓰여 있다. 또 제문 뒤에는 영조의 후궁이며 추존왕 진종(眞宗; 孝章世子, 1719~1728)의 생모인 정빈이씨(靖嬪李氏, 1694~1721)에게 올리는 짧은 축사(祝詞)도 함께 쓰여 있다. 숙빈최씨(淑嬪崔氏)는 최효원(崔孝元)의 딸로 7세에 입궁하여 숙종의 후궁이 되었고, 1694년 9월 13일 창덕궁에서 영조를 낳았으며, 1718년(숙종 44) 3월 19일 49세로 사망하자 그해 5월 12일 양주 땅(현 파주시 광탄면 영장리)에 장사지냈다. 영조는 1725년(영조 1)에 사친(私親; 친어머니)을 위해 육상묘(毓祥廟)를 건립하여(현 서울 종로구 궁정동 1-1 七宮) 어머니의 신위를 봉안하였다. 처음에는 소령묘(昭寧墓), 육상묘(毓祥廟)이던 것을 1753년에 소령원(昭寧園), 육상궁(毓祥宮)으로 승격시켰다. 조선의 어필은 전반적으로 희귀한 편이다. 하지만 영조는 역대 국왕 중 어필을 가장 많이 남긴 인물에 속한다. 시문, 판각으로 전하는 현판, 글씨 등 내용과 크기에서 다양하다. 그 가운데 이 원고는 여러 영조어제어필 시문원고 가운데 낱장이 아닌 왕실의례용 공첩(空帖)에 직접쓴 희귀한 예이다. 안진경체를 토대로 하고 영조의 성정기질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영조 특유의 서풍이 나타나기 시작한 33세의 필적이다. 내용 또한 사친에 대한 그리움이 절절히 나타나 있다.
영조어필 - 숙빈최씨 소령묘갈문 원고(英祖御筆-淑嬪崔氏昭寧墓碣文原稿)는 영조가 51살 때인 1744년(영조 20) 7월에 사친 숙빈최씨(淑嬪崔氏)의 소령묘(昭寧墓)의 묘갈문(墓碣文)을 짓기 위해 쓴 초안 원고이다. 이 원고에는 어머니 조상의 이름과 추증 연월, 어머니가 궁에 들어간 나이 등이 비어 있는데, 현재 숙빈최씨(淑嬪崔氏)의 무덤 소령원(昭寧園)에 세워진 묘갈문(墓碣文)에는 모두 채워져 있으며 내용도 일부 추가되었다. 또 원고에서는 영조가 전면대자(前面大字)를 쓰고 서평군(西平君) 이요(李橈)가 비음(碑陰)을 쓴다고 했는데, 묘갈문(墓碣文)에는 전면대자와 음기 및 위쪽 전자(篆字)를 영조가 쓰고, 묘표(1718년)·묘비(1725년 신도비)·묘갈을 세운 곳과 묘갈을 세운 월일을 서평군 이요(李橈)에게 쓰게 하여 묘갈 받침대인 농대석(籠臺石)에 새긴다고 되어 있다. 이 원고는 영조가 즉위한 뒤 사친에 대한 추숭사업의 과정에서 남긴 필적의 하나로서 영조의 까다로운 성격이 그대로 연상되는 영조 노년의 독특한 어필서풍을 보여준다. 이 원고는 장서각에 소장된 여러 영조어제어필 시문원고 가운데 <숙빈최씨사우제문원고>와 더불어 의미 깊은 필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영조어필 - 읍궁진장첩(英祖御筆-泣弓珍藏帖)은 영조(英祖, 1694~1776)의 여러 어제어필을 모은 것이다. 겉표지에 “영조어필 읍궁진장(英廟御筆 泣弓珍藏)”이라 쓰여 있는데, 읍궁(泣弓)이 송시열(宋時烈)의 은거처였던 괴산군 화양구곡(華陽九曲)의 제3곡 읍궁암(泣弓巖)과 어떤 관계인지는 미상이다. 서첩 앞쪽에 “1761년 정월 16일에 내의원(內醫院)에 답한다(辛巳正月十六日藥院批)는” 부전지(附箋紙)가 있는 비답(批答)을 비롯하여 사언시고(四言詩稿) 등이 실려 있다. 특히 사언시고(四言詩稿) 중에 1770년(영조 46)7월 11일에 쓴 ‘서시옥당(書示玉堂)’은 충자(冲子; 世孫 정조)와 옥당(玉堂; 홍문관) 관원에게 내린 것으로 『임하필기』에 관련내용이 보인다. 또 그때 썼을 것으로 보이는 ‘학사관(學士館)’ 대자(大字)도 실려 있다. 이 어필첩은 영조어필을 모은 몇몇 서첩 가운데 수록 필적이 정선되고, 영조 노년인 1761년, 1765년, 1770년의 연대가 있으며, 조선후기 궁중장황으로 꾸며지고 보존상태도 양호하여 어필자료로서 높은 가치를 지니는 것으로 평가된다.
숙빈최씨 사우제문 원고 보물1631-1호
소 재 지; 경기 성남시 분당구 하오개로 323(운중동 490) 한국학중앙연구원
영조(1694~1776)가 1726년 11월 6일에 친어머니 숙빈최씨(淑嬪崔氏, 1670~1718)의 생신을 맞아 숙빈묘(淑嬪廟)에 올렸던 제문의 원고이다. 주홍색 화문 비단에 싼 표지에는 “어제친제제문초(御筆親祭祭文草)”와 “영조어제어필, 숙빈최씨궤연 및 정빈이씨사우치제문 「발본」(英祖御製御筆, 淑嬪崔氏几筵 及 靖嬪李氏祠宇致祭文「抄本」)”이라 쓰여 있다. 또 제문 뒤에는 영조의 후궁이며 추존왕 진종(眞宗; 孝章世子, 1719~1728)의 생모인 정빈이씨(靖嬪李氏, 1694~1721)에게 올리는 짧은 축사(祝詞)도 함께 쓰여 있다. 숙빈최씨(淑嬪崔氏)는 최효원(崔孝元)의 딸로 7세에 입궁하여 숙종의 후궁이 되었고, 1694년 9월 13일 창덕궁에서 영조를 낳았으며, 1718년(숙종 44) 3월 19일 49세로 사망하자 그해 5월 12일 양주 땅(현 파주시 광탄면 영장리)에 장사지냈다. 영조는 1725년(영조 1)에 사친(私親; 친어머니)을 위해 육상묘(毓祥廟)를 건립하여(서울 종로구 궁정동 1-1 七宮) 어머니의 신위를 봉안하였다. 처음에는 소령묘(昭寧墓), 육상묘(毓祥廟)이던 것을 1753년에 소령원(昭寧園), 육상궁(毓祥宮)으로 승격시켰다. 조선의 어필은 전반적으로 희귀한 편이다. 하지만 영조는 역대 국왕 중 어필을 가장 많이 남긴 인물에 속한다. 시문, 판각으로 전하는 현판, 글씨 등 내용과 크기에서 다양하다. 그 가운데 이 원고는 여러 영조어제어필 시문원고 가운데 낱장이 아닌 왕실의례용 공첩(空帖)에 직접쓴 희귀한 예이다. 안진경체를 토대로 하고 영조의 성정기질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영조 특유의 서풍이 나타나기 시작한 33세의 필적이다. 내용 또한 사친에 대한 그리움이 절절히 나타나 있다.
숙빈최씨 소령묘갈문 원고 보물1631-2호
소 재 지; 경기 성남시 분당구 하오개로 323(운중동 490) 한국학중앙연구원
영조가 51살 때인 1744년(영조 20) 7월에 사친 숙빈최씨(淑嬪崔氏)의 소령묘(昭寧墓)의 묘갈문(墓碣文)을 짓기 위해 쓴 초안 원고이다. 이 원고에는 어머니 조상의 이름과 추증 연월, 어머니가 궁에 들어간 나이 등이 비어 있는데, 숙빈최씨(淑嬪崔氏)의 무덤 소령원(昭寧園)에 세워진 묘갈문(墓碣文)에는 모두 채워져 있으며 내용도 일부 추가되었다. 또 원고에서는 영조가 전면대자(前面大字)를 쓰고 서평군(西平君) 이요(李橈)가 비음(碑陰)을 쓴다고 했는데, 묘갈문(墓碣文)에는 전면대자와 음기 및 위쪽 전자(篆字)를 영조가 쓰고, 묘표(1718년)·묘비(1725년 신도비)·묘갈을 세운 곳과 묘갈을 세운 월일을 서평군(西平君) 이요(李橈)에게 쓰게 하여 묘갈 받침대인 농대석(籠臺石)에 새긴다고 되어 있다. 이 원고는 영조가 즉위한 뒤 사친에 대한 추숭사업의 과정에서 남긴 필적의 하나로서 영조의 까다로운 성격이 그대로 연상되는 영조 노년의 독특한 어필서풍을 보여준다. 이 원고는 장서각에 소장된 여러 영조어제어필 시문원고 가운데 <숙빈최씨사우제문원고>와 더불어 의미 깊은 필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읍궁진장첩 보물1631-3호
재 지; 경기 수원시 영통구 창룡대로 265(이의동 1088-10) 수원박물관
이 서첩은 영조(英祖, 1694~1776)의 여러 어제어필을 모은 것이다. 겉표지에 “영조어필 읍궁진장(英廟御筆 泣弓珍藏)”이라 쓰여 있는데, 읍궁(泣弓)이 송시열(宋時烈)의 은거처였던 괴산군 화양구곡(華陽九曲)의 제3곡 읍궁암(泣弓巖)과 어떤 관계인지는 미상이다. 서첩 앞쪽에 “1761년 정월 16일에 내의원(內醫院)에 답한다(辛巳正月十六日藥院批)는” 부전지(附箋紙)가 있는 비답(批答)을 비롯하여 사언시고(四言詩稿) 등이 실려 있다. 특히 사언시고 중에 1770년(영조 46)7월 11일에 쓴 ‘서시옥당(書示玉堂)’은 충자(冲子; 世孫 정조)와 옥당(玉堂, 홍문관) 관원에게 내린 것으로 『임하필기』에 관련내용이 보인다. 또 그때 썼을 것으로 보이는 ‘학사관(學士館)’ 대자(大字)도 실려 있다. 이 어필첩은 영조어필을 모은 몇몇 서첩 가운데 수록 필적이 정선되고, 영조 노년인 1761년, 1765년, 1770년의 연대가 있으며, 조선후기 궁중장황으로 꾸며지고 보존상태도 양호하여 어필자료로서 높은 가치를 지니는 것으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