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황룡사 구층목탑 금동찰주본기 보물1870호

소 재 지; 경북 경주시 일정로 186(인뫙동 76) 국립경주박물관

『경주 황룡사(皇龍寺) 구층목탑(九層木塔) 금동찰주본기(金銅刹柱本記)』는 통일신라 경문왕 11년에 왕의 명에 의해 황룡사(皇龍寺)의 구층목탑(九層木塔)을 중수하면서 기록한 실물자료로, 구층목탑(九層木塔)의 건립 과정과 중수 과정을 후대의 역사서(歷史書)가 아닌 중수 당시에 제작된 유물을 통해 생생히 전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뿐만 아니라, 이 시기 유행했던 탑지(塔誌)의 서술체계는 물론 서체 등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며, 사리장치 품목과 안치장소를 분명히 밝히고 있다는 점에서 고대 탑파의 사리장엄 의식 연구에도 소중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으며, 사리함의 문비(門扉, 문짝) 내․외면에 선각된 신장상은 절대연대(872년)를 가진 유품으로 불교조각사 연구에 기준이 된다. 이 본기는 박거물(朴居勿)이 찬하고 요극일(姚克一)이 썼으며 이를 승려인 총혜(聰惠)와 조박사(助博士) 연전(連全)이 전각한 것이다. 특히 황룡사(皇龍寺) 목탑 건립과 관련하여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등 후대의 사서 기록과 상호 비교 검토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이 찰주본기(刹柱本記)의 역사적·기록사적 위치는 중대하다고 하겠다. 1238년(고려 고종 25년) 몽고병(蒙古兵)의 침입으로 목탑이 불탄 뒤에도 심초석(心礎石) 안에서 보존되었다. 1964년 이곳에 위치한 농가(農家)가 철거된 뒤 같은 해 12월 심초석(心礎石, 목탑의 심주를 받치는 기둥받침돌) 안의 사리공(舍利孔, 탑 안에 사리를 모시기 위해 만든 공간)이 도굴되었다가 1966년 수습되었다. 처음에는 녹이 두껍게 덮여 몇 글자만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었으나, 1972년 복원작업을 통해 찰주본기 내외(內外)의 명문을 거의 판독하게 되었다. 1판 내면에서는 먼저 ‘황룡사(皇龍寺) 찰주본기(刹柱本記)’라는 제목과 박거물(朴居勿)이라는 지은이 이름이 제시되었다. 이어 선덕여왕(善德女王) 12년 자장(慈藏)이 중국의 종남산(終南山)에서 원향선사(圓香禪師)에게 황룡사(皇龍寺)에 9층탑을 세우면 해동(海東)의 아홉 나라가 모두 신라에 항복할 것이라는 말을 듣고 돌아와 고한 뒤 이 탑의 조성이 추진되었다고 했다. 2판 내면에서는 선덕여왕 15년에 탑이 완성된 뒤 90여 년이 지나 탑이 기울어 경문왕(景文王) 11년(871)부터 중수가 추진되었다고 했다. 3판 내면에서는 이듬해까지의 중수 과정과 창건·중수 과정을 정리한 목적을 밝혔다. 외면의 1판부터 3판까지는 김위홍(金魏弘) 등 중수를 주도한 관리들에 이어 여기에 참여한 승려들과 내·외직(內外職) 관리들, 황룡사(皇龍寺)·감은사(感恩寺)의 승려들이 나열되고 마지막으로 글을 새긴 이들이 언급되었다. 각 면은 위아래 두 군데에 못을 세 개씩 박는 기법으로 경첩을 달아 연결하였고, 비스듬하게 기울어진 위쪽 면의 안쪽 모서리를 끼우는 방식이다. 문비(門扉) 역할을 하는 한 면에는 문처럼 여닫을 수 있도록 문고리를 달았다. 금동판들을 모두 접어서 세우면 네모난 상자의 각 면을 이루는 방식이다. 문비(門扉) 면에는 앞뒷면에 부처와 불법을 수호하는 인왕상과 신장상을 각각 2구씩 선의 형태로 새겨서 장식하였다. 앞면의 인왕상은 하의만 걸친 채 역동적인 자세를 취하였으며, 뒷면의 신장상은 갑옷을 입고 투구를 쓴 채 무기를 들고 있다. 각 인물 주변에는 마름모형 보상화문과 작은 초화문을 배치하였다. 곡선이 유려한 9세기 양식을 반영하였으며, 가늘고 날카로운 정으로 섬세하게 선을 표현한 점이 특징적이다. 금동사리함의 내외면에 쌍구체(雙鉤體, 글씨의 윤곽을 가는 선으로 그려내는 법)로 쓴 찰주본기는 9세기대에 주로 쓰였던 서체로 염거화상탑지(廉巨和尙塔誌, 844년), 창림사 무구정탑원기(昌林寺 無垢淨塔願記, 855년), 중화3년명사리기(中和 3年銘 舍利器, 883년)등과 더불어 이 시기 유행했던 탑지(塔誌)의 서술체계는 물론 서체 등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이외에도 사리장치 품목과 안치장소를 분명히 밝히고 있다는 점에서 고대 탑파의 사리장엄 의식 연구에도 소중한 자료를 제공하고, 사리함의 문비 내․외면에 선각된 신장상은 절대연대(872년)를 가진 유품으로 불교조각사 연구에 기준이 된다. 따라서 이 황룡사(皇龍寺) 금동사리함은 신라시대의 시대상을 오롯하게 담고 있는 역사적 유물로 가치가 충분하다.

 

출처;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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