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종1(明宗一) 즉위년

명종 광효대왕(明宗 光孝大王)의 휘는 호(晧)이고, 자는 지단(之旦), 옛 휘는 흔(昕)이다. 인종(仁宗)의 셋째 아들로, 의종(毅宗)의 동복아우이다. 인종 9년(1131) 신해 10월 경진일에 태어났으며 의종 2년 익양후(翼陽侯)에 봉해졌다. 〈의종〉 24년(1146) 9월 기묘. 정중부(鄭仲夫) 등이 의종을 몰아내고 군사를 거느리고 왕을 맞이하여 대관전(大觀殿)에서 즉위하였다. 전왕(前王)은 도참설(圖讖說)을 믿어 모든 동생을 꺼렸다. 왕[明宗]이 잠저(潛邸)에 있을 때 전첨(典籤) 최여해(崔汝諧)가 일찍이 태조(太祖)가 왕에게 홀(笏)을 주었더니 왕이 받아서 용상(龍床)에 앉았으므로 최여해(崔汝諧)와 백관(百官)이 함께 하례를 드렸던 꿈을 꾼 적이 있었다. 〈최여해(崔汝諧)가〉 깨어나 이상하게 여겨서 왕에게 알렸었는데, 왕이 이르기를 “다시는 이 말을 하지 마라. 이는 중대한 일이니 임금이 이 말을 들으면 반드시 나를 해칠 것이다.”라고 한 적이 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과연 그 꿈이 들어맞았다.

왕이 수문전(修文殿)에 거둥하니 이준의(李俊儀)·정중부(鄭仲夫)·이의방(李義方)·이고(李高) 등이 시종하였다. 문극겸(文克謙)을 석방하여 비목(批目)을 쓰도록 명하고, 임극충(任克忠)을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로, 정중부(鄭仲夫)·노영순(盧永醇)·양숙(梁淑)을 참지정사(叅知政事)로, 한취(韓就)를 추밀원사(樞密院事)로, 윤인첨(尹鱗瞻)을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로, 김성미(金成美)를 복야(僕射)로, 김천(金闡)을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로, 이준의(李俊儀)를 좌승선 급사중(左承宣 給事中)으로, 문극겸(文克謙)을 우승선 어사중승(右承宣 御史中丞)으로, 이소응(李紹膺)을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로, 이고(李高)를 대장군 위위경(大將軍衛尉卿)으로, 이의방(李義方)을 대장군 전중감(大將軍 殿中監)으로 각각 임명하였으며, 이고(李高)·이의방(李義方)은 둘 다 집주(執奏)를 겸임하였다. 기탁성(奇卓成)은 어사대사(御史臺事)로, 채원(蔡元)은 장군(將軍)으로 임명하였다. 그밖에 무인으로서 품계와 서열을 뛰어 넘어 고관요직[華要]을 겸임한 자는 다 헤아릴 수 없었다.

계미. 여러 신하들이 대관전(大觀殿)에 나아가 즉위를 하례하였다.

겨울 10월 경술. 대사면령을 내렸다.

정중부(鄭仲夫)·이의방(李義方)·이고(李高)를 벽상공신(壁上功臣)으로 삼아 공신각(功臣閣)에 초상화를 걸었으며 양숙(梁淑)·채원(蔡元)은 그 다음 자리에 두었다. 조정 신하들에게 관작을 1등급씩 올려주었다. 김이영(金貽永)·이작승(李綽升)·정서(鄭敍) 등을 소환하여 모두 직전(職田)을 돌려주었으며, 〈의종 때에〉 닭을 그려 침상 밑에 넣은 일과 화살을 떨어뜨린 사건[晝雞流矢之事]으로 유배[流竄]된 사람들을 모두 개경으로 올라오게 하였다.

공부낭중(工部郞中) 유응규(庾應圭)를 파견하여 표문(表文)을 가지고 금(金)으로 가게 하였다. 전왕(前王)의 표문에서 이르기를,
“신은 오랫동안 질병을 앓아서 몸이 점점 허약해지고 정신도 혼미하고 기력이 쇠진하게 되었습니다. 의원이 힘을 다해도 효과가 없고 약으로 다스려도 나아지지 않아서 고황(膏肓)까지 병이 들어 하늘이 혼을 빼앗아가려 합니다. 앞선 사람의 가르치신 말씀을 삼가 복종하고 열국(列國)에 앞서 조공하려고 하나, 민정(民政)이 책상에 높이 쌓여도 혹은 결정[剖決]을 폐하기도 하고, 국빈(國賓)이 연속하여 오더라도 장차 영접하는 예를 잃기도 하였습니다. 나라를 다스리는 도가 이미 무너지고, 황제를 섬기는 예의도 많이 빠뜨리고 있습니다. 요즘은 침상[床枕]에 누워 거의 운신을 하지 못하니, 두터운 은혜를 저버리게 되고 지난 유업을 흩어버릴까 매우 염려됩니다.
신이 예전에 선친인 전 국왕을 섬겼는데 일찍이 신에게 말씀하시기를, ‘만일 왕위를 교체하게 된다면 반드시 아우에게 먼저 전하라.’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신에게 원자(元子) 왕홍(王泓)이 있지만 어려서는 지혜가 없었고 자라서도 또 허물이 많았습니다. 감히 종묘[主鬯]를 맡길 수 없거늘 하물며 제후국을 이어받아서 직무를 이행할 수 있겠습니까? 외람된 생각으로는 신의 동생 왕호(王晧)는 충직하며 순한 덕이 있어서 일찍부터 부왕[君親]에게 성의를 다하였으며, 화목하고 공손한 마음은 조석(朝夕)으로 변함이 없습니다. 그의 시종 여일한 아름다운 덕행으로 보아 특히 한 나라의 중책을 맡을 만하기에, 모월 모일에 신의 동생 왕호에게 임시로 군국(軍國)의 사무를 맡게 하였습니다. 감히 이 사실을 보고 드리니 선처해주시기를 바랍니다.”
라고 하였다.

새 왕[新王]의 표문에서 이르기를,
“하늘[覆燾]의 인자한 마음은 어느 하나에만 치우치지 않으며, 성스러운 황제[聖神]의 덕은 만방(萬邦)을 고르게 보살피시니, 삼가 정성스런 말씀을 드립니다. 엎드려 보건대 신(臣)의 형인 국왕 왕현(王晛)은 오랫동안 중국[周室]을 존숭하고 제후국의 도리[漢藩]를 기꺼이 다해오던 중, 몸에 병이 들어 여러 해가 되어도 나을 기미가 없습니다. 결점이 없는 의원조차 손을 쓸 수 없는데[十全不能措其手], 한 알의 환약으로 어찌 그 혼백을 회복할 수 있겠습니까? 병이 점점 깊어져서 갑자기 죽게 될까 두려워하던 차에, 얼마 전 중책을 벗어나 비로소 여생을 보전하려고 하였습니다. 대개 전 국왕인 왕현(王晛)의 유언에 따라 신이 동복아우로서 종묘사직의 위업[先祊之業]을 맡길 만하다고 하여 모월 모일에 신으로 하여금 임시로 군국(軍國)의 사무를 맡게 하였습니다. 신은 이것을 피할 길이 없고 받기도 정말 난처하여 이 사정을 상국(上國)에 알리려고 하였으나, 생각해보니 상국까지 가는 길이 너무 멀었습니다. 또 백성에게는 임금이 없을 수 없고 정무를 처리할 사람이 있어야 하겠기에, 부득이 여러 사람의 의사에 따라 임시로 직분을 맡았습니다. 조심스럽고 두려운 생각이 들어 감히 편안할 수 없으며, 두렵고 떨리는 마음이 거의 죽을 지경입니다. 이에 전후 사실을 갖추어 황제폐하께 알립니다.”
라고 하였다.

금(金)이 대종정승(大宗正丞) 야율규(耶律糺)를 파견하여 왕의 생일을 축하하려고 하였다. 야율규(耶律糺)가 국경에 도착하자 변방의 관리가 전왕(前王)이 양위(讓位)하였다 하여 그를 돌려보냈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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