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종1(文宗一) 10년

 

〈병신〉 10년(1056) 봄 정월 신미. 황주(黃州)에 운석(隕石)이 떨어지니 소리가 우레 같았다.

갑술. 동여진(東女眞)의 봉국장군(奉國將軍) 아가주(阿加主) 등 50인이 와서 준마(駿馬) 32필을 바쳤다.

2월 갑오. 유사(有司)에서 아뢰기를,

“번인(蕃人)에게 포로가 되었던 염가칭(廉可偁)은 군기승(軍器丞) 염위(廉位)의 아들이며, 삼한공신 사도(三韓功臣 司徒) 염형명(廉邢明)의 손자입니다. 경술년(庚戌年, 1010)에 환위공자(環衛公子)의 군역(軍役)에 충당되었다가, 마침 거란병(契丹兵)이 난입하여 경성이 소동하므로 양친을 모시고 고향 봉성현(峯城縣)으로 피난 가던 중, 길에서 적을 만나 잡혀갔다가 청녕(靑寧) 원년(元年, 1055) 정월에 아들 하나를 데리고 도망하여 왔습니다. 염가칭에게 선대의 영업전(永業田)과 집을 모두 돌려주기를 요청합니다.”

라고 하였다. 제서를 내리기를,
“염가칭은 공신의 후예로서 청년의 나이[丁年]에 포로가 되었다가, 번토(蕃土)에서 처자를 버리고 오직 아들 하나만 데리고 백발이 되어 돌아왔으니 참으로 불쌍하고 가련하다. 조상으로부터 받은 토지와 가옥을 돌려주도록 하여라.”
라고 하였다.

계묘. 흥왕사(興王寺)를 덕수현(德水縣)에 창건하기 시작하였다.

기유. 탐라국(耽羅國)에서 토산물을 바쳤다.

3월 갑인. 〈왕의〉 아들 왕증(王蒸)을 국원후(國原侯)로 책봉하였다. 왕은 비공식적으로 편전(便殿)에 나아가 전례(典禮)를 관람하고 마친 후에 시중(侍中) 이자연(李子淵), 참지정사(叅知政事) 김원정(金元鼎),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지맹(智猛) 등을 불러서 새벽까지 술자리를 베풀었다.

윤3월 계미. 초하루 태묘(大廟)에 고삭(告朔) 의식을 거행하였다.

을유. 수사공 상서우복야(守司空 尙書右僕射)로 치사(致仕)한 고열(高烈)이 죽었다. 고열은 활을 잘 쏘았고 여러 번 군공(軍功)을 세워 한 때의 명장(名將)이 되었다. 그가 죽으니 소식을 듣는 사람은 모두 애석하게 여겼고, 나라에서는 3일 동안 조회(朝會)를 정지하고 백관이 장례식에 참석하게 하였다.

여름 4월 병인. 지맹(智猛)을 수사공(守司空)으로 임명하였다.

병자. 왕이 건덕전(乾德殿)에 나가서 복시(覆試)를 보이고 이간방(李幹方) 등을 급제시켰다.

가을 7월 정유. 동번적(東蕃賊)이 변경을 자주 침범하므로, 동로병마이사 시어사(東路兵馬貳師 侍御史) 김단(金旦)을 보내 토벌하게 하였다. 김단이 군사들에게 맹세하기를,

“적과 싸울 때 집을 염두에 두지 않고 몸으로 나라를 위해 죽는 것이 본분이니, 우리가 살고 죽는 것은 바로 오늘에 달려 있다.”

라고 하였다. 3군 군사들이 감격하여 분발하고 힘쓰므로 용기가 저절로 배가 되어 동번의 주둔지 20여 곳을 쳐부수니, 적이 크게 무너졌고 노획한 병기와 양(羊), 말(馬)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8월 무진. 전국의 사형수를 처결하게 되자, 왕이 정전(正殿)을 피하고 육식을 하지 않으며[素膳] 음악을 정지하였다.

서경유수(西京留守)가 보고하기를,

“서경내[京內]의 진사과(進士科)와 명경과(明經科) 등 여러 과거 시험에 응시할 사람이 공부하는 서적이 대개 사본으로 된 것이므로 글자가 많이 틀립니다. 비서각(秘書閣) 소장(所藏)의 9경(九經)·『한서(漢書)』·『진서(晋書)』·『당서(唐書)』·『논어(論語)』·『효경(孝經)』·제자의 책[子]·역사서[史]와 제가문집(諸家文集), 의(醫)·복(卜)·지리(地理)·율(律)·산(算) 등 여러 서적을 여러 학원(學院)에 나누어 주어 비치하기를 요청합니다.”

라고 하였다. 왕이 유사(有司)에 명령하여 각 1본씩 인쇄하여 보내도록 하였다.

경오. 30,000명에게 반승(飯僧)하였다.

9월 갑신. 제서를 내리기를,
“사신을 보내 여러 주목(州牧)‧자사(刺史)‧통판(通判)‧현령(縣令)‧현위(縣尉) 및 장리(長吏)의 정치 성과에서 근만(勤慢)과 청탁(淸濁)을, 또 백성의 빈부고락(貧富苦樂)을 조사하도록 하라.”
라고 하였다. 이에 담당 관청이 관할 역(驛)의 백성과 역리가 영접에 피로할 것이므로 이를 정지하도록 요청하였다. 왕이 이르기를,
“내가 생각건대 선조들은 자주 사신을 보내 백성의 고충을 묻고 찾았으므로, 여러 지방 관리가 모두 청렴에 힘써서 백성을 편안하게 하였다. 근래에는 기강이 해이해지고 또 징계나 개혁이 없으므로, 〈지방관리가〉 공사(公事)에는 부지런하지 않고 사리(私利)만을 꾀하며, 권력가와 결탁하여 마을에서 많은 것을 수탈하고 논밭에서 양잠과 방적을 권장하지도 않는다. 어염(魚鹽)과 재칠(梓漆)이 생산되는 지방이나 축산(畜産)과 자재(貲財)가 있는 집은 모두 수탈당하고, 만일 주저하는 자가 있으면 곧 일을 빙자하여 엄하게 체벌하여 그 생명을 상하게도 한다. 〈백성은〉 원통함을 품고도 호소할 곳이 없으며, 가끔 이것을 바로잡으려고 하는 자가 있어도 권귀(權貴)와 요로(要路)의 청탁으로 끝내 행할 수 없게 되니, 백성을 좀먹는 해독은 날마다 달마다 불어났다. 관리가 이미 이러하니 백성이 어찌 살아갈 길이 있겠는가? 나는 밤낮으로 힘써 그 폐해를 풀어줄까 하는데, 일을 맡은 당사자는 찬성하기는 커녕 논의가 분분하니 어떻게 된 일인가? 이제 겸시어사 형부원외랑(兼侍御史 刑部員外郞) 이유적(李攸績)을 산동(山東)과 산남(山南)의 충주(忠州)․경주(慶州)․상주(尙州) 3도무문사(三道撫問使)로, 겸어사잡단 병부낭중(兼御史雜端 兵部郞中) 김약진(金若珍)과 예부낭중(禮部郞中) 최상(崔尙)은 둘 다 산남(山南)의 진주(晉州), 나주(羅州), 전주(全州), 청주(淸州), 광주(廣州), 공주(公州), 홍주(洪州) 7도무문사(七道撫問使)로, 겸감찰어사 시전중내급사(兼監察御史 試殿中內給事) 안민보(安民甫)를 관서(關西), 관북(關北), 관내(關內) 3도무문사(三道撫問使)로, 감찰어사(監察御史) 민창수(閔昌壽)를 관내동도무문사(關內東道撫問使)로 임명하여 각각 파견하니 지체하지 말라.”
라고 하였다.

기축. 수춘궁(壽春宮)에서 태일성(太一星)에 초제(醮祭)를 지내 화재를 막고자 하였다.

계사. 태자와 제왕(諸王)에게 명령하여 동지루(東池樓)에 잔치를 베풀게 하고, 수재(秀才)인 최응(崔應)과 이서(李曙), 종실(宗室) 왕충(王忠)을 불러 「동지심승시(東池尋勝詩)」를 짓도록 하고 그들에게 각각 필단(匹段)을 하사하였다.

제서를 내리기를,
“요즈음 일관(日官)이 아뢴 것을 보니 천변(天變)이 자주 일어난다고 한다. 이것은 대개 나의 덕이 적고 정령(政令)이 일정하지 못한 결과이니, 두렵고 걱정스러워 밤낮으로 마음이 편치 못하므로 이 달부터 정전(正殿)을 피하고 일상 식사의 반찬수를 줄여 하늘의 견책에 답하고자 한다. 모든 대소 관료는 각기 자신의 직위에 충실하며, 나의 허물을 바른 대로 말하되 숨김이 없도록 하라.”
라고 하였다.

병신. 제서를 내려 이르기를,
“석가(釋迦)가 가르치기를 청정(淸淨)을 우선으로 삼고 더러운 것을 멀리하며 탐욕을 없애야 한다고 하였다. 요사이 나라의 역을 회피하는 무리가 승려에 이름을 걸고는, 재물을 불려 생계를 경영하여 농업과 축산으로 직업을 삼거나 상업을 풍습으로 삼고 있다. 밖에 나가서는 계율의 조문(條文)을 위배하고 집에 들어가면 청정의 규약이 없으니, 한쪽 어깨를 내놓는 승려의 도포는 술독의 덮개로 떨어지고, 불경을 강송(講誦)하는 장소는 헐어서 채소밭의 이랑이 되었다. 상인들과 매매로 통하고 객인(客人)들과 술주정과 오락으로 결탁하며, 기생집에서 떠들썩하게 섞이고 〈불교의 행사인〉 우란분(盂蘭盆) 행사를 더럽히고 있다. 세속의 관(冠)을 쓰고 세속의 옷을 입었으면서 사원 수리를 빙자하여 돈을 거두어 깃발과 북을 갖추어 노래하고 피리 불며, 마을에 출입하고 시장을 돌아다니며 사람들과 싸워 피투성이가 되기도 한다. 나는 그들 중에 선악을 구분하고 엄숙히 기강을 바로잡고자 하니, 마땅히 전국의 사원을 정리하여 계행(戒行)에 정진하는 자는 모두 안착하게 하고 위반한 자는 법으로 죄를 묻도록 할 것이다.”
라고 하였다.

겨울 10월 기유. 초하루 일본국(日本國)에서 사신 정상위권예(正上位權隷) 등원(藤原)과 조신(朝臣) 뇌충(賴忠) 등 30인이 와서 금주(金州)에 숙박하였다.

신해. 왕태자가 태묘(太廟)를 참배하였다.

임술. 왕이 직접 태묘(大廟)에 협제(祫祭)를 지내고 9조의 선조[九廟]에게 존호(尊號)를 올렸으며, 제사를 마치고 재궁(齋宮)에 이르러 여러 신하의 하례(賀禮)를 받았다. 신봉루(神鳳樓)로 돌아와 사면령을 내리고 제서를 내려 이르기를,
“내가 외람되게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유업(遺業)을 계승하여 산하를 거느리고 대업(大業)을 지키게 되어, 날마다 덕을 새롭게 닦으니 비록 쉴 수 있어도 쉬지 않았다. 왕업을 영원히 품기를 빌고, 종묘를 우선하여 정성 다해 받들었다. 이제 직접 협제를 경건하게 모시고 덕음(德音)을 널리 펴서, 온 백성과 더불어 큰 경사를 함께 하고자 하니 전국에 대사면령을 내리도록 하라.”
라고 하였다.

11월 신사. 송(宋) 상인 황증(黃拯) 등 29인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이날 첫눈이 내리자 백관이 표문을 올려 축하하였다.

임오. 왕이 내제석원(內帝釋院)에 행차하여 승려 해린(海麟)을 왕사(王師)로 삼았다.

임진. 왕이 팔관회를 열고 법왕사(法王寺)에 행차하였다.

갑오. 동여진(東女眞) 야사로(耶賜老) 등 50인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12월 무신. 초하루 거란(契丹)이 영주자사(永州刺史) 소유신(蕭惟新)을 보내 왕의 생일을 축하하였다.

병진. 전국에서 전문(箋文)을 올려 수춘궁(壽春宮)에서 행한 왕태자의 〈생일〉 장흥절(長興節)을 축하하였다.

동여진(東女眞) 유원장군(柔遠將軍) 사복하(沙攴何) 등 2인을 참형에 처했는데, 일찍이 삭주(朔州)의 사람과 물건을 약탈하였기 때문이다.

이 해 서강(西江)의 병악(餠嶽) 남쪽에 장원정(長源亭)을 지었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