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종3(文宗三) 36년
〈임술〉 36년(1082) 봄 2월 계축. 국자좨주(國子祭酒) 송덕연(宋德延)을 지서북면병마사(知西北面兵馬事)로, 위위소경(衛尉少卿) 김의충(金義忠)을 동북면병마부사(東北面兵馬副使)로 임명하였다.
갑자. 동여진(東女眞)의 요어고(褭於古) 등이 내조(來朝)하였다.
3월 경자. 유사(有司)에 명령하여 산천(山川)과 사직(社稷)에 기우제[禱雨]를 지내게 하였다.
여름 4월 기묘. 회경전(會慶殿)에서 태일구궁성(太一九宮星)에 초제(醮祭)를 지냈다.
나주목(羅州牧) 관하(管下)의 홍원현(洪原縣) 백성이 땅을 파다가 황금 100냥과 백은 150냥을 얻어서 바치자, 왕이 말하기를
“하늘이 하사한 것이다.”
라고 하고, 드디어 그에게 돌려주었다.
5월 계미. 죄인의 죄상을 조사하였다.
계사. 구요당(九曜堂)에서 초제(醮祭)를 지내며 비오기를 빌었다.
경자. 또 흥국사(興國寺)에서 비오기를 빌었다.
정미. 큰 비가 내렸다.
6월 신유. 사면령을 내리고, 양경(兩京)의 모든 관리에게 관직을 한 등급씩 올려주었다.
병인. 수사공 상서좌복야(守司空 尙書左僕射) 김덕부(金德符)가 죽었다.
가을 7월 무신. 숭경궁주(崇慶宮主) 이씨(李氏)가 죽었다.
8월 갑인. 이자위(李子威)를 우부승선(右副承宣)으로, 송덕정(宋德廷)을 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로, 고경(高景)을 시어사(侍御史)로, 양신린(楊信麟)을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로 임명하였다.
무오. 〈왕이〉 문덕전(文德殿)에 나아와 사형(死刑)을 판결하고, 문하시랑(門下侍郞) 문정(文正)과 좌복야(左僕射) 이정공(李靖恭)에게 명령하여 참작하게 하였다.
을해. 송(宋) 상인 진의(陳儀) 등이 와서 진기한 보물을 바쳤다.
이 달에 동번(東蕃) 적의 우두머리 장향(張向) 등 14인을 산남도(山南道)의 먼 지역으로 유배보냈다.
9월 계미. 왕이 남쪽으로 순행하였다.
정해. 〈왕이〉 봉성현(峯城縣, 경기도 파주)에 유숙하며 중양절(重陽節) 잔치를 베풀고, 양부(兩府) 및 시신(侍臣)들에게, ‘도중에 중양절을 만나다[途中遇重陽]’라는 제목으로 시(詩)를 짓도록 하였다.
계묘. 〈왕이〉 천안부(天安府)에 유숙하였다.
을사. 〈왕이〉 온수군(溫水郡, 충청남도 온양)에 도착하였다.
겨울 10월 무신. 초하루 왕이 직접 지은 ‘늦은 가을 남쪽으로 순행하여 천안부에 머물다[暮秋南幸次天安府]’라는 시를 보여주고, 측근 신하에게 명하여 운(韻)에 따라 화답시를 올리게 하므로 갑과 을로 차례를 정하였다.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 이의(李顗)의 시가 가장 뛰어났다. 왕이 칭찬하며 대궐에서 기르는 말[廐馬] 1필을 하사하고, 나머지에게는 비단을 차등 있게 하사하였다.
신해. 재신(宰臣)들이 〈왕이〉 온천에 행차하심을 글을 올려 축하하였다.
경신. 〈왕이〉 온천을 떠났다.
계해. 〈왕이〉 천안부(天安府)에 유숙하였다.
11월 무인. 초하루 왕태자가 〈왕의〉 행재소(行在所)에 표문(表文)을 올려 초하루를 하례하자, 왕이 특별히 회답하는 조서(詔書)로 답하였다.
갑신. 〈왕이〉 서울에 돌아와서 제서(制書)를 내리기를,
“통과했던 산천에 신호(神號)를 더하고 시종(侍從)한 신료들에게 또한 관직과 상을 더하며, 나머지 아전과 병졸에게는 물품을 차등 있게 하사한다.”
라고 하였다.
병술, 일본국(日本國) 대마도(對馬島)에서 사신을 보내 토산물[方物]을 바쳤다.
12월 정미. 초하루 요(遼)에서 영주관내관찰사(永州管內觀察使) 이가수(李可遂)를 보내 왕의 생일을 축하하였다.
정사.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 김약진(金若珍)이 죽으니, 3일 동안 조회를 정지하였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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