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종(宣宗) 2년

 

〈선종(宣宗)〉 (을축) 2년(1085) 봄 2월 정묘. 문덕전(文德殿)에서 천제석도량(天帝釋道場)을 열었다.

신미. 건덕전(乾德殿)에서 금강경도량(金剛經道場)을 7일간 열었다.

계유. 요(遼)에서 대안(大安)으로 연호를 개정하였다고 알려오자, 왕이 유사(有司)에 명하여 태묘(大廟)와 6릉(六陵)에 고하도록 하였다.

을해. 왕의 수레가 행차할 때에 「인왕반야경(仁王般若經)」을 받들고 앞에서 인도하는 것을 처음으로 시행하였는데, 송제(宋制)를 따른 것이다.

정축. 대마도(對馬島) 구당관(勾當官)이 사신을 보내 감귤(柑橘)을 바쳤다.

정해. 왕이 귀법사(歸法寺)에 행차하여 반승(飯僧)을 베풀었다.

3월 병신. 왕이 문종(文宗)의 반혼당(返魂堂)에 이르러 한식(寒食)을 겸하여 상사제(上巳祭)를 올리려 하자, 유사(有司)에서 곡할 자리[哭位]가 없어 어렵다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예(禮)는 마땅히 편리함을 따르는 것이다”라고 하며, 드디어 호종하는 신하를 줄이고 갔다.

무술. 송(宋) 밀주(密州)에서 황제가 죽고 황태자가 즉위하였음을 알려 왔다.

무신. 문덕전(文德殿)에서 불정도량(佛頂道場)을 열었다.

갑인. 왕이 흥왕사(興王寺)에서 가서 반승(飯僧)을 베풀었다.

여름 4월 경오. 왕의 아우인 승려 왕후(王煦)가 몰래 송(宋)에 들어갔다.

김준(金晙) 등을 급제시켰다.

무인. 〈왕이〉 외제석원(外帝釋院)에 행차하였다.

갑신. 〈왕이〉 친히 구정(毬庭)에서 초제(醮祭)를 지냈다.

경인. 가뭄 때문에 유사(有司)에 명하여 임해원(臨海院)에서 운우경(雲雨經)을 7일간 강설(講說)하게 하였고, 또 산악(山嶽)에 〈비가 오기를〉 빌었다.

임진. 근신(近臣)에게 명하여 죄수를 재심사하여 경범죄자[輕繫]는 석방하였다.

5월 갑인. 건덕전(乾德殿)에서 금강경도량(金剛明經道場)을 7일간 열어 비가 내리기를 빌었다.

6월 정축. 왕이 건덕전(乾德殿)에서 보살계(菩薩戒)를 받았다.

가을 7월 임인. 구정(毬庭)에서 나이 80세 이상인 남녀에게 잔치를 베풀고, 의대(衣帶)와 전례(前例)에 따른 물품을 차등 있게 하사하였다.

임자. 문종(文宗)의 대상(大祥)이어서 왕이 흥왕사(興王寺)에 행차하여 분향하였다.

8월 신미. 호부상서(戶部尙書) 김상기(金上琦)와 예부시랑(禮部侍郞) 최사문(崔思文)을 송(宋)에 보내 조문(弔問)하도록 하고, 공부상서(工部尙書) 임개(林槩)와 병부시랑(兵部侍郞) 이자인(李資仁)은 〈송 황제의〉 등극을 축하하도록 하였다.

정축. 문종(文宗)의 초상[神御]을 경령전(景靈殿)에 봉안하고 친히 제사의 예(奠禮)를 행하였다.

무인. 왕이 선정전(宣政殿)에 나아가 형부(刑部)에서 사형수 아뢴 것을 결재하였으며, 음악을 정지하고 간소한 반찬(素膳)을 올리게 하였다.

9월 기유. 경범죄자[輕繫]를 석방하였다.

임자. 〈왕이〉 순종(順宗)의 혼전(魂殿)에서 친히 제사를 지냈다.

요(遼)에서 어사중승(御史中丞) 이가급(李可及)을 보내 왕의 생일을 축하하였는데, 날짜에 미치지 못하자 사람들이 비웃으며 말하기를,

“사신의 이름은 가급(可及)인데, 어찌 미치지 못했는가[何不及].”

라고 하였다.

겨울 10월 계유. 문종(文宗)을 태묘(太廟)에 부제(祔祭)하였다.

을해. 회경전(會慶殿)에서 백고좌도량(百高座道場)을 열어 인왕경(仁王經)을 3일간 강설(講說)하고, 3만 명을 반승(飯僧)하였다.

11월 정유. 순종(順宗)을 태묘(太廟)에 부제(祔祭)하였다.

병오. 요(遼)에서 낙기복사(落起復使)로 고주관내관찰사(高州管內觀察使) 야율성(耶律盛)을 보냈다.

계축. 요(遼)에서 보정군절도사(保靜軍節度使) 소장(蕭璋)과 숭록경(崇祿卿) 온교(溫嶠) 등을 보내 왕을 특진검교태사 겸 중서령상주국(特進檢校太師 兼 中書令上柱國) 식읍(食邑) 1만호 식실봉(食實封) 1,000호로 책봉하였으며 아울러 관면(冠冕), 거마(車馬), 규인(圭印), 의대(衣帶) 채단(綵段) 등의 예물을 보내왔다.

기미. 왕이 남교(南郊)에서 〈요(遼)의〉 책명(冊命)을 받았다.

 

출처. 국사편판위원회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