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종(成宗) 10년~11년
10년(991) 봄 2월 신유(辛酉). 각 도(道)에 안위사(安慰使)를 보내 백성의 질고(疾苦)를 살피게 하였다.
윤2월 계유(癸酉). 처음으로 사직단(社稷壇)을 세우고 교서(敎書)를 내려 말하기를,
“내가 듣건대 사(社)는 토지의 주인으로, 땅이 넓어 다 공경을 표할 수 없기 때문에 흙을 쌓아 사단(社壇)을 만들어 그 공에 보답한다고 하였다. 직(稷)은 오곡의 으뜸으로, 곡식들이 많아 두루 제사를 지낼 수 없기 때문에 직신(稷神)을 세워 제사지낸다고 하였다. 『예기(禮記)』에 이르기를, ‘왕이 백성을 위하여 세운 사단(社壇)을 대사(大社)라 하고, 스스로를 위해 세운 사단(社壇)을 왕사(王社)라 한다. 제후(諸侯)가 백성을 위해 세운 사단(社壇)은 국사(國社)라 하고, 스스로를 위해 세운 사단(社壇)은 후사(侯社)라 하며, 대부(大夫) 이하가 여럿이서 세운 사단(社壇)은 치사(置社)라 한다.’라고 하였다. 그런 까닭에 나라를 가진 사람은 사직(社稷)을 세우지 않을 수 없으니, 위로는 천자(天子)로부터 아래로 대부에 이르기까지 근본을 보이고 공에 보답하기 위해서는 갖추지 않을 수 없다. 태조(太祖)로부터 여러 대에 이르기까지 아직도 하(夏)의 소나무 신주(神主)에 제사지내던 것도 두지 못하였고 주(周)에서 밤나무 신주에 제사지내던 것도 늘 빠져 있었다. 내가 왕위를 계승한 이래 무릇 베풀어 하는 바는 반드시 예전(禮典)에 의거하였으니, 아버지와 아들을 소목(昭穆)에 맞추어 모시는 집(宗廟)을 좋은 모습으로 짓고, 봄에 빌고 가을에 보답할 단을 바야흐로 장차 창건하려고 하니 여러 대신들에게 땅을 가려 단(壇)을 두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이 달에 최항(崔沆) 등을 급제(及第)시켰다.
여름 4월 경인(庚寅). 한언공(韓彦恭)이 송(宋)에서 돌아와 『대장경(大藏經)』을 바치니, 왕이 맞이하여 내전(內殿)에 들이고 승려들을 불러 열고 읽게 한 뒤에 교서(敎書)를 내려 사면령을 내렸다.
가을 7월 가뭄이 들었다.
기유(己酉). 교서(敎書)를 내려 말하기를,
“늦여름이 이미 가로막히고 8월도 장차 반이 되어 가는데, 아직도 때맞추어 비가 오지 않으니 매우 깊이 근심스럽도다. 정화(政化)가 제대로 되지 않아서인지, 상벌(賞罰)이 들어맞지 못한 탓인지 어떤 이유인 것인가! 감옥을 열어 죄수를 풀어주었으며, 내가 정전(正殿)을 피하고 늘 먹던 반찬의 가짓수를 줄이면서 부지런히 사원(寺院)에서 빌며 산천(山川)에도 우러르며 제사를 지냈는데도, 비가 올 조짐[石燕之飛]은 보이지 않고 도리어 햇빛만 쨍쨍 내리 쬐는[金烏之赫] 게 보인다. 내가 덕이 없음으로 말미암아 이런 큰 가뭄을 만나는 데에 이르렀으니, 노인을 봉양하는 은혜를 넓혀 농사를 근심하는 나의 생각을 나타내고자 한다. 옹희(雍熙) 3년(986) 노인들에게 쌀과 베를 지급하였던 왕명에 준하여, 개경(開京)에 사는 백성들 가운데 나이가 80세 이상인 사람은 해당 관청에서 성명(姓名)을 모두 기록하여 보고하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겨울 10월 무진(戊辰). 서도(西都)에 갔는데, 지나가는 주현(州縣)의 부로(父老)들이 소와 술을 가지고 와서 바치자 술은 군사들에게 하사하고 소는 되돌려 주었다.
압록강 바깥에 거주하는 여진족(女眞族)을 백두산 너머로 쫓아내어 그 곳에서 살게 하였다.
한림학사(翰林學士) 백사유(白思柔)를 송(宋)에 보내 『대장경(大藏經)』과 『어제(御製)』를 하사한 것을 사례(謝禮)하도록 하였다.
11년(992) 여름 6월 갑자(甲子) 송(宋)에서 광록경(光祿卿) 유식(劉式)과 비서소감(秘書少監) 진정(陳靖)을 보내 왕에게 검교태사(檢校太師) 식읍(食邑) 1,000호, 식실봉(食實封) 400호를 더하여 책봉하였으며 나머지는 아울러 예전과 같이 하였다. 처음 백사유(白思柔)가 송에 들어갔을 때 공목리(孔目吏) 장인전(張仁詮)이 상서(上書)하여 마음대로 늘어놓았는데, 백사유(白思柔)는 그가 나라의 비밀스러운 일을 고하였다고 여겼다. 장인전(張仁詮)이 감히 돌아오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황제가 진정(陳靖) 등에게 명령하여 거느리고 돌아가게 하였으며, 또 왕에게 조서(詔書)를 내려 장인전의 죄를 풀어주라고 하였다. 왕이 표(表)를 올렸는데 간략히 이르자면, “소인(小人)이 이익을 좇았는데 어찌 함부로 목을 벨까 염려하십니까? 성주(聖主)의 관대한 은혜로 멀리서 불쌍히 여기라 명을 내리셨으니, 그 장인전(張仁詮)은 이미 조지(詔旨)에 의거하여 죄를 용서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가을 7월 임진(壬辰) 초하루 왕의 종친(宗親) 왕욱(王郁)을 사수현(泗水縣)으로 유배 보냈다.
겨울 11월 계사(癸巳) 주(州)·부(府)·군(郡)·현(縣) 및 관(關)·역(驛)·강(江)·포(浦)의 이름을 고쳤다.
12월 태묘(太廟)가 완공되었다.
경신(庚申) 교서(敎書)를 내려 이르기를,
“나라의 근본으로는 종묘(宗廟)가 으뜸이다. 옛날부터 제왕(帝王)은 누구나 종묘(宗廟)를 증축하고 신묘(神廟)를 창건하여 아들의 신주(神主)는 오른편 목(穆)의 반열에, 아버지의 신주(神主)는 왼편 소(昭)의 반열에 설치하고 3대나 5대 조상의 대제(大祭)를 지내지 않음이 없었다. 우리나라는 때를 타서 의로운 군사를 일으키고 천운(天運)에 응하여 나라를 열었는데, 비록 여러 임금께서 왕업(王業)을 이어왔으나 아직도 제대로 된 제례(祭禮)를 베풀지 못하였다. 내가 외람되게 옥새(玉璽)를 물려받아 천하의 인심을 모을 계책(計策)을 세울 것을 부탁받았으니, 이에 따라 저번 해부터 새로 태묘(太廟)를 지었던 것이다. 조정(朝廷)에 있는 유신(儒臣)들은 소목(昭穆)의 위차(位次)와 제례의 절차를 의논하여 정하고 알리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병인(丙寅) 교서(敎書)를 내려 말하기를,
“임금이 된 자가 천하를 교화하려면 학교(學校)를 우선해야 한다. 요(堯)임금과 순(舜)임금의 풍교(風敎)를 근본으로 하여 서술하고 주공(周公)과 공자(孔子)의 도를 이어받아 떨치며 나라의 헌장(憲章) 제도를 만들고 군신(君臣)과 상하(上下)의 의례를 구별하는 일을 현명한 선비가 맡지 않는다면 어찌 올바른 규범으로 이루겠는가? 하늘의 뜻을 헤아리고 땅을 확장하며 큰 것을 지키고 공을 정하려면, 진실로 장차 숭상하고 장려하여 행해야 하며 잠시라도 그만두어서는 안 된다. 우리나라가 창업(創業)한 지 이미 오래이며 문치(文治)를 지켜 흥성(興盛)하게 되었다. 내가 외람되게 보잘 것 없는 몸으로 왕위에 욕되게 있으면서 아홉 학파[九流]의 학설을 밝히고 시서(詩書)·예악(禮樂)의 문호[四術之門]를 널리 열고자 생각하였다. 저 어린 아이들을 일깨워 학교에 두니, 횡중(黌中)과 직하(稷下)에는 책 읽는 선비들이 무리를 이루었고 하서(夏序)와 우상(虞庠)에는 배우려는 무리들이 저자를 만들었다. 시험장[綸闈]을 열어 재주를 겨루고 중서성(中書省)을 열어 인재를 발탁하는데, 성(省)에 나아가 시험을 보는 자는 오히려 많으나 신선(神仙)이 과거를 점지한 자는 늘 적다. 이는 곧 배우고 싶어도 학교와 스승[塾黨]이 없어서 재능을 제대로 갈고 닦지 못하기 때문이다. 해당 관청에 명을 내리니 서로 좋은 땅을 얻어 널리 학사(學舍)를 세우고 전장(田庄)을 헤아려 나누어 주어, 그들에게 금을 단련하여 참되게 하고 옥을 갈아 그릇을 갈듯이 하도록 하라. 무릇 여러 유신(儒臣)은 바라건대 나의 뜻을 알아야 한다.”라고 하였다.
이 달에 태묘(太廟)에 조상의 신주(神主)를 함께 모셔놓고 왕이 직접 협제(祫祭)를 지냈다.
'세상사는 이야기 > 고려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세가(世家) 성종(成宗) 15년~16년 (1) | 2022.11.11 |
---|---|
세가(世家) 성종(成宗) 12년~14년 (0) | 2022.11.09 |
세가(世家) 성종(成宗) 8년~9년 (0) | 2022.10.19 |
세가(世家) 성종(成宗) 6년~7년 (1) | 2022.10.10 |
세가(世家) 성종(成宗) 4년~5년 (0) | 2022.10.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