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종2(仁宗二) 8년
〈경술〉 8년(1130) 봄 정월 기유 왕이 신중원(神衆院)에 갔다.
경술. 금에서 유변(劉汴)을 사신으로 보내어 왕의 생신을 축하하였다.
경오. 중화전(重華殿)에서 제석도량(帝釋道場)을 열었다.
2월 임오. 왕이 인덕궁(仁德宮)으로 거처를 옮겼다.
기축. 왕이 수창궁(壽昌宮)으로 거처를 옮겼다.
3월 임자. 죄수를 재심사하였다.
기미. 노령거(盧令琚) 등이 금에서 돌아왔다. 조서에 이르기를,
“〈경이〉 올린 사은 표문(表文)과 진봉(進奉)한 은그릇·차·베 등의 물건, 아울러 함께 바친 서표(誓表)에 대해서 살펴보고 모두 잘 알았다. 짐이 부득이 〈송을〉 정벌하여 죄인 2명(송(宋)의 휘종(徽宗)·흠종(欽宗))을 포로로 사로잡은 특별한 경사를 마침내 온 천하에 널리 알렸다. 경은 제후 왕으로서 봉토를 거듭 잘 다스리고 신하로서의 분수를 잘 지켜왔다. 글을 올려서 감사의 뜻을 나타내었으며 공물을 바침으로써 성의를 표시하였으니, 그 아름다운 충성심을 생각하면 어찌 감탄하지 않겠는가? 당부하고자 하는 사안이 있어서 별록(別錄)에 갖추어 보내니 도착하면 신중하게 살펴서 잘 조처하기 바란다.”
라고 하였다.
별록(別錄)에서 이르기를,
“지난번에 고백숙(高伯淑)을 선유사(宣諭使)로 보내었을 때에 단지 말하기를, ‘보주(保州)는 비어있는 성(城)이므로 장차 고려에 가서 만약 약속한 일들을 하나하나 마친 뒤에 다시 〈보주를 돌려달라고〉 간청하면 마땅히 할양해 주도록 하라.’라고만 하였다. 그런데 김자류(金子鏐)가 입조(入朝)하여 올린 표문에서는 망령되게도 ‘〈고려로〉 투입(投入)한 호구(戶口)를 돌려보내는 건에 관해서, 이미 여러 해가 지났고 또한 풍토(風土)가 달라서 편안하게 있지 못하고 모두 사망했으니 소국으로 하여금 편의에 따라 처리하도록 허락하여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이에 회답하는 조서에서 특별히 명령하기를, ‘호구 문제는 오히려 말로만 할 뿐 맹서의 표문에서도 별도로 보고하지 않았다. 단지 모든 일에 대대로 마음을 다하겠다고 하는 것은 믿겠지만 명령한 말을 혹시라도 따르지 않는다면 이미 얻은 땅이지만 〈계속 고려의 땅이 될지〉 앞으로 어찌 믿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다시 사고덕(司古德)과 한방(韓昉) 등에게 사명(使命)을 받들게 하여 역시 위의 사항을 의논하게 하였다. 그런데 〈그들이〉 돌아와 보고하기를 장차 도착할 어록(語錄)에서도 여전히 식언한다고 하는데, ‘신의 부왕(父王)은 생전에 호구를 잡아오지 않았습니다. 또한 전후로 누차 내려온 조서에서도 호구를 석방하라고 하신 적이 없습니다. 앞으로 진상할 서표(誓表)에 따라 〈모든 일을〉 반드시 따르겠습니다.’라고 하였다.
방금 보내온 표문을 보니 뜻은 거듭 그러하겠다고 하는 것 같지만 글이 끝날 때까지 호구를 돌려보내겠다는 말은 없다. 필시 말로는 ‘생신(生辰) 및 정조(正朝)를 하례하거나 횡선사(橫宣使)에 사례하는 데까지 시기를 놓치지 않았고, 하물며 다시 명령에 따라 서표까지 올렸으니 의심을 사지 않기에는 충분하다고 생각해서 호구를 돌려보내는 일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라고 할 것이 분명하다. 전후에 〈고려로 들어간〉 신구(新舊) 호구를 따져본다면 그 수는 적지 않을 터인데도 모두 죽었다고 하는 것은 이유가 될 수 없다. 당시에 전투에서 죽거나 뒤에 병으로 죽어서 찾아낼 수 없는 자를 제외하면 몸이 죽었더라도 유해는 모름지기 있을 것이다. 만약 본인이 살아 있다면 아울러 그 자손과 부인, 며느리 등까지 신속하게 조사하여 그 숫자까지 표문에 갖추어 보고하도록 하라. 〈짐의 지시를〉 마땅히 잘 헤아릴 것이며, 혹여 응하기 어렵다면 〈그대가〉 올린 맹서의 글 또한 믿을 수 없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또한 노령거(盧令琚) 등이 금에 머물다가 객관(客館)을 출발하려 할 때 황제가 절도사 반자성(班資成)을 보내 전지(傳旨)하여 이르기를,
“지난번에는 조씨(趙氏) 부자 송의 휘종(徽宗)·흠종(欽宗)이 배신하였으므로 군대를 일으켜 그들을 사로잡아 와서 여기에 두고 혼덕공(昏德公)·중혼후(重昏侯)로 낮추어 책봉하였다. 이를 알리는 보유사(報諭使)를 누차 파견하였는데, 그들이 돌아와서 〈고려의〉 보유회사사(報諭回謝使)가 표문을 올린다고 하였다. 도착하는 대로 이를 본즉, 표문 안에 실린 맹세의 뜻은 가상하나 원근 지역에서 누차 협박으로 귀속된 호구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기왕 성의를 다해 맹세하였다면 관련 사신을 보내 표문을 올리는 것이 예에 합당한 것이지 마치고 돌아오는 우리 사신 편에 딸려 보내는 것은 예에 어긋난다. 표문의 내용은 지극히 사리에 맞으므로 용서하고자 한다. 너희 회차사(回次使)와 부사(副使)는 국왕에게 잘 보고해서 다음 사신을 보낼 때 원근에서 위협하여 끌고 가 편입한 신구(新舊) 호구 수를 모두 조사 기록하여 표문에 첨부해 올리도록 하라.”
라고 하였다.
정묘. 왕이 영통사(靈通寺)에 갔다.
여름 4월 갑술. 송에서 진무교위(進武校尉) 왕정충(王正忠)을 사신으로 보내 와 왕이 중화전(重華殿)에서 조서를 받았는데, 조서에 이르기를,
“생각하건대 왕은 면면히 이어온 왕업을 이어받은 이래 〈우리와〉 일찍부터 문물이 같았으며 이에 뱃길로 사신을 보내 문후하고[乘桴之訊] 공손스럽게 공물을 바치려고 한다. 충성스럽고 순종할 뿐 다른 마음이 없으니 천지신명께 물어도 부끄러울 것이 없는데, 마침 소식을 듣고는 탄복하기에 이르렀다. 근년의 일을 생각하건대 실로 다사다난하여 중원의 모든 백성들이 강적의 침략을 받았도다. 적들이 이미 우리 영토 깊숙이 쳐들어와서 아직도 전쟁이 그치지 않는 바람에 짐은 황궁[衛仗]을 떠나 잠시 강호(江湖)에 머무르고 있다. 만약 사신이 오게 되면 해당 관청에서 지켜주지 못할 듯하니 변방이 조용해지길 기다렸다가 빙문(聘問)하는 시기를 정해야 할 것이다. 예전에 정(鄭)의 대부 자산(子産)이 진후(晋侯)의 관사를 억지로 허물고 거마(車馬)를 바치자 진후가 정백(鄭伯)을 후히 대접한 것처럼 하면[毁晉館以納車] 뒤늦은 후회는 없을 것이나,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가〉 관문을 폐쇄하고 서역의 인질을 거절했던 것처럼[閉漢關而謝質] 이전의 규례를 따르지 않고자 하니 이러한 마음을 잘 헤아려 나의 진실한 뜻을 헤아리도록 하라.”
라고 하였다.
신사. 왕이 안화사(安和寺)에 갔다.
정해. 태묘(太廟)에서 체제(禘祭)를 지냈다.
무자. 일관(日官)이 아뢰기를,
“지금 가뭄이 심하므로 청컨대 종묘사직(宗廟社稷)과 산천(山川)에 비를 빌어야 합니다.”
라고 건의하자 이를 따랐다.
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 이주연(李周衍), 중승(中丞) 임원준(任元濬), 잡단(雜端) 황보양(皇甫讓), 시어사(侍御史) 고당유(高唐愈),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 문공원(文公元) 등이 상소하여 작금의 폐단을 말하였으나 왕이 단지 두세 가지만 따랐다.
기축. 박동주(朴東柱) 등을 급제시켰다.
신축. 문하시중(門下侍中) 이공수(李公壽)가 양부(兩府)의 대신들과 더불어 회의하고 백관에게 차등을 두어 쌀을 내게 하고, 그 쌀로 현성사(賢聖寺)·영통사(靈通寺) 두 절에서 재를 올려 나라를 위해 재앙을 물리치고 복을 내려 줄 것을 기도하였다.
5월 정사. 중화전(重華殿)에서 불정도량(佛頂道場)을 7일간 열었다.
6월 임신. 왕이 봉은사(奉恩寺)에 갔다.
계미. 우박이 쏟아졌다.
을유. 중화전(重華殿)에서 보살계도량(菩薩戒道場)을 열었다.
정해. 죄수를 재심사하였다.
계사. 김부일(金富佾)을 수태위 판비서성사 주국(守太尉 判秘書省事 柱國)으로, 김부식(金富軾)을 판삼사사(判三司事)로, 최자성(崔滋盛)을 판상서예부사(判尙書禮部事)로, 문공인(文公仁)을 판상서형부사(判尙書刑部事)로 임명하였다.
가을 7월 갑진. 승화백(承化伯) 왕정(王禎)이 사망하였다.
을묘. 중화전(重華殿)에서 불사리에 공양하였다.
경신. 시어사(侍御史) 고당유(高唐愈)를 좌천시켜 공부원외랑(工部員外郞)으로 삼았다.
기사. 송 사신 왕정충(王政忠)이 돌아가는데 표문을 부쳐 보내어 말하기를,
“황제의 말씀은 간단 명확하나 깊은 뜻은 간절하니 공손히 가르침을 받듦에 저절로 눈물이 떨어집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황제폐하께서는 〈두〉 황제께서 북으로 옮겨가신 뒤를 이어 황통(皇統)을 계승하셨으니, 시국은 어수선하지만 어려움을 헤쳐나갈 것을 기약할 때이며 천명이 일정한 것이 아니므로 천자[曆數在躬]가 되는 경사를 누리시게 되었습니다. 돌아보건대 우리 고려는 아득히 멀고 먼 외진 곳에 있어서 차례로 참극을 당한 데 대해 놀라기만 할 뿐 황급히 달려가 문안하지 못하였습니다. 다만 봄·가을에 공물을 바치는 일로써 저희의 마음을 상국 조정에 알릴 수 있었던 바, 큰 바다를 건너 행재소에 계신 황제폐하의 소식 듣기만을 바라고 있었습니다. 뜻밖에도 작은 정성을 황제께서 맑은 충정으로 여겨서 특별히 사신을 보내 멀리까지 황명(皇命)을 내리실 줄이야 어찌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대저 변방의 위험 때문에 사신을 보내는 시기가 늦어져 조서를 받은 이후로 옷깃만 만지작거리면서 망연자실하고 있었습니다. 벌써 사신을 보내어 산과 바다를 건너 근왕(勤王)해야 함에도 그러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또한 전장[典章]을 받들어 때맞추어 공물을 바치는 일도 미처 다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만 홍역을 앓는 듯한 아픈 마음만 부여잡고 상국을 받드는 공경을 다하지 못하고 있으나 저희에게 다른 마음이 없는 것은 신령께서도 거짓 아님을 아실 것입니다. 영원한 복록이 있기를 하늘에 기원하면서, 다만 원하는 것은 주(周) 선왕(宣王)처럼 중흥하시는 것입니다. 상국의 문물을 다시 보면서 숙신(肅愼)들과 함께 하례를 올리려 합니다. 천자 계신 곳을 우러러보니 저의 혼백이 날아오를 듯합니다.”
라고 하였다.
8월 갑술. 왕이 왕륜사(王輪寺)에 행차하였다.
계사. 최재(崔梓)를 금에 사신으로 보내 천청절(天淸節)을 축하하였다.
을미. 왕이 서경(西京)에 행차하였다.
임자. 왕이 홍경원(弘慶院)에서 아타바구신도량(呵吒波拘神道場)을, 선군청(選軍廳)에서 반야도량(般若道場)을 27일 동안 열도록 하였는데, 묘청(妙淸)의 말을 따른 것이었다.
을묘. 죄수를 재심사하였다.
겨울 10월 임신. 왕이 서경(西京)에서 돌아와서 조서를 내리기를,
“과인은 덕이 부족한데도 조종의 왕업을 이어받았으므로 마치 살얼음판의 못을 건너듯 어려워하고 조심해왔다. 일자(日者)와 음양가(陰陽家)들이 옛 사람의 말에 의거하여 서경으로 행차하기를 청하기에 짐은 이를 따랐도다. 이제 궁궐에 돌아왔으므로 작은 은혜를 전국에 베풀고자 한다. 사형에 해당하는 죄를 범한 자는 감형하여 유배할 것이며, 유배형 이하는 용서한다. 이미 유배형에 처해진 자도 석방하되 죄를 면제해 줄 수 없는 자는 형량을 헤아려 가까운 곳으로 옮기라. 〈서경 순행 때〉 통과하였던 산천의 신령들에게 휘호를 보태주고, 수행한 관리 및 서경의 문·무 관료, 서리에게는 각각 동정직(同正職)을 더해주고 장고(掌固)와 입사잡류(入仕雜類)에게는 차등 있게 물품을 내리노라. 기년(耆年)이 된 노인 및 효자와 효손, 절부(節婦)와 의부(義夫), 환과고독(鰥寡孤獨), 독질자(篤疾者)와 폐질자(癈疾者)에게 음식을 대접하고 물품을 내리노라.”
라고 하였다.
계유. 〈왕의 생일인〉 경용절(慶龍節)이어서 죄수를 재심사하였다.
정축. 선군청(選軍廳)에서 무능승도량(無能勝道場)을 21일 동안 열었는데 묘청(妙淸)의 말을 따른 것이었다.
신묘. 편전(便殿)에서 재추(宰樞)들에게 잔치를 베풀고, 국정에 자문을 구하였는데, 밤이 깊어서야 파하였다.
11월 갑진. 합문부사(閤門副使) 이저(李詝)를 금에 사신으로 보내 왕의 생일을 축하한 것에 대해 사의를 표하였다.
경술. 전중내급사(殿中內給事) 최윤숙(崔允淑)을 금에 사신으로 보내 신년을 축하하였다.
을묘. 왕이 수창궁(壽昌宮)으로 거처를 옮겼다.
임술. 간의(諫議) 안직숭(安稷崇) 등이 상소(上疏)하여 시정(時政)을 논하였다.
12월 을유 좌사낭중(左司郞中) 김단(金端)을 금에 사신으로 보내 보주(保州)로 귀부해온 여진인 추색(追索)을 중지해달라고 요청하였다. 표문에 이르기를,
“황명을 들은 이후 〈그 명이〉 너무나 명확하여 놀라 두려움에 넘어질 지경이나 하찮은 정성으로 다시 진술하니 신성한 황제께서는 자애로움으로 살펴주시기를 바랍니다. 한발 물러나 생각하니 참람함이 정도를 넘는 듯해 더욱더 황송합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신은 작고 천박한 재질로 작은 나라를 맡고 있는데 마침 황제폐하께서 천명을 받아 대업을 일으켜 천하를 통치하시게 되니 그 의로움을 흠모하여 바로 입조(入朝)하여 제후가 되어 공물을 바쳐왔습니다. 황제폐하께서는 깊은 인덕으로 우리의 어려움을 풀어주셨고 두터운 덕으로 거친 것을 감싸주셨으니, 이제 우리 마음에 간직한 정성을 헤아려 작은 나라를 사랑하는[字小]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천회(天會) 4년(1126) 병오년 9월 모일에 선유사(宣諭使) 고백숙(高伯淑)을 보내 조칙을 전하셨고, 또 구두로는 ‘보주성(保州城)은 다시 우리 영토로 편입시키지 않을 것이며, 투항한 자들도 고려가 편한 대로 처리하라.’고 하시었습니다. 신은 당시에 황송함에 어찌할지 몰라 계단을 내려가 밝으신 황명을 절하며 받았고, 신민(臣民)들과 함께 은혜에 감격하여 기뻐하였으므로, 구구한 마음을 표문으로 올려 감사하였습니다. 또한 천회 6년(1128) 무신년 12월 모일에는 보유사(報諭使) 사고덕(司古德)과 한방(韓昉)이 와서 별록(別錄)을 전하였는데, ‘보주 지역은 처음에 조칙을 내려 다시 수복하지 않겠다고 하였는데, 그 뜻은 반드시 예전에 맺은 조약에 따라 우리 왕실을 잘 섬길 경우 조정에서는 그 땅을 아끼지 않고 특별히 땅을 할양해준다는 것이었다. 이 후 몇 해가 지났는데 아직도 서표(誓表)를 올리지 않았으니 어찌 관례에 맞는 일이라 하겠는가? 또 협박에 의해 따라갔거나 도망하여 옮겨간 호구도 그 수가 많을 터인데 모두 죽었다고 하니 도무지 납득할 수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지난번에 온 칙지(勅旨)에서는 ‘보주를 떼어준다고 한 것을 허락했을 뿐 「보주성 관할의 경내 모두[一城境內]」라는 어구는 쓰지 않았으며 아울러 아직 경계를 획정하지도 않았다. 이제부터는 분쟁이 발생하는 지역에 대해서는 응당 그 지역의 관리를 통제할 것이다. 위의 몇 가지 일에 대하여 과연 너희 나라가 성의껏 위를 섬기는 마음으로 서표를 올려서 명확하게 한다면 우리 조정도 역시 서조(誓詔)를 내릴 것이며, 아울러 별도로 지시를 내려 경계를 획정함으로써 일체 모든 일을 관대하게 처리하여 장구한 계책을 만들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또 한방이 우리 관반(館伴)에게 보낸 글에서는 ‘우리 조정이 바야흐로 큰 신의를 천하에 밝히고 있는 터에 어찌 그대 나라를 속이겠습니까?’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신은 이러한 명백한 말과 글을 받고 그 덕과 뜻에 감동한 나머지 하늘을 가리키며 맹세하고 정성을 다해 표문을 절하며 바쳤습니다. 살피건대 저는 황제께서 자애로움으로 서조를 내릴 것으로 생각하였는데 새서(璽書)가 거듭 이르고 가르치심은 더욱 엄중해지니 두려운 마음에 방황하면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습니다. 하물며 상국의 사람들이 내투[投來]한 일로 말하자면 이는 신의 아비인 선왕(先王)이 아직 신하로서 상국을 섬기지 않았을 때의 일로써 사소한 일일 뿐인데, 이처럼 책망하시면 우리가 기꺼이 의지하는 마음에 어그러지는 일일뿐 아니라 또한 상국 조정이 지극한 인덕으로 제후국을 사랑하고 편안케 하는 뜻이 아닐 것입니다. 이에 신은 충정을 다하려 하는 까닭에 감히 황제의 노여움을 무릅쓰고서라도 스스로 그만둘 수 없는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황제폐하께서는 뜻을 돌려 밝게 살피셔서 큰 동정을 내려주시고 선왕이 먼 나라들을 편안히 다스렸던 일을 본받으셔서 한(漢)이 도망자를 석방해준 고사를 따르십시오. 진실로 정성을 다해 올린 청을 특별히 허락하시어 온전한 은혜를 베풀어주신다면 비록 작고 누추하여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하더라도 더욱 힘을 내어 보답하겠습니다. 해바라기의 뜻이 오랫동안 태양을 향하는 것인 것처럼, 강물이 흘러서 바다로 쉼없이 흘러가는 것처럼 하늘과 땅의 신령[皇天后土]이 이 말을 증명할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금 황제의 회답하는 조서에서 이르기를,
“올린 표문과 함께 바친 어복(御服)·의대(衣帶)·은기(銀器) 등의 물품은 잘 살펴보았다. 경이 짐을 보좌하려는 뜻을 보였으니 응당 책봉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머리를 조아리고 제후가 되겠다고 하니 하늘을 두려워하는 도리에 합당하며, 조정에는 공경스런 공물을 바쳤으니 이는 상국을 섬기는 의례에 맞도다. 그 충성스러움과 근면함을 생각하니 가상한 마음을 금치 못하겠다. 아뢴 일에 대해서는 뒤이어 회보(回報)하겠다.”
라고 하였다.
갑오. 궁궐 마당에서 초제(醮祭)를 지냈다.
병신. 문공인(文公仁)을 참지정사(叅知政事)로, 김부식(金富軾)을 정당문학·수국사(政堂文學 修國史)로, 임경청(林景淸)을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로, 이준양(李俊陽)을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로, 임원애(任元敱)를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로 임명하였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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