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종(靖宗) 5년
〈기묘〉 5년(1039) 봄 정월 신축. 우사(雨師)에 제사지냈다.
병오 공부상서(工部尙書) 원영(元穎)을 춘하번 서북로병마사(春夏番 西北路兵馬使)로, 대부소경(大府少卿) 양대춘(楊帶春)을 부병마사(副兵馬使)로,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 진현석(秦玄錫)을 동로병마사(東路兵馬使)로,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 임종한(林宗翰)과 왕이보(王夷甫)를 부병마사로 임명하였다.
2월 임술. 초하루 전중감(殿中監) 이성공(李成功)을 거란(契丹)에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정묘. 〈거란(契丹)에〉 호부낭중(戶部郞中) 유선(庾先)을 보내 위무에 사례하고, 압록강[鴨江] 동쪽의 성보(城堡) 증축을 멈춰 달라고 요청하였다.
을해. 연등회(燃燈會)가 열리자, 왕이 봉은사(奉恩寺) 갔다.
병자. 〈왕이〉 중광전(重光殿)에 거둥하여 음악을 감상하였다.
임오. 남쪽 교외에서 노인성(老人星)에 제사지냈다.
신묘. 황항지(黃抗之) 등에게 급제를 하사하였다.
3월 신축. 동북로병마사(東北路兵馬使)가 아뢰기를,
“여진(女眞) 각 번(蕃)의 자제 등 60인이 폐물을 가지고 입조(入朝)하기를 요청합니다.”
라고 하자, 이를 허락하였다.
여름 4월 신유. 초하루 거란(契丹)에서 유선(庾先)이 돌아왔는데, 조서(詔書)에서 이르기를,
“보낸 표문을 보니, 압록강[鴨江] 동쪽의 성벽이 밭 갈고 물 긷는 백성들의 일상생활을 방해하는 일에 대해 잘 알겠다. 그리하여 인근의 성을 돌아보았는데, 선조 때부터 설치하여 변방을 일상적으로 방비하기 위한 것이어서 귀국의 영토에 무슨 해가 있겠는가? 나는 정해진 법규를 지키는 데 힘써야 하므로 지금 고치기는 어렵다. 전 왕 왕흠(王欽, 덕종)이 과거에 번거롭게 〈이 일을〉 보고하다가 조공(朝貢)이 막히는 지경에 이르렀다. 경이 왕위를 이은 초창기로 공물(貢物)과 문서가 겨우 이르렀는데, 바라는 바는 그대가 마땅히 옛 규정을 준수하여 진실로 공손하고 부지런히 하는 데 다시 힘썼으면 하는 것이다. 이것이 오래 보존하는 계책이며, 아울러 〈나의〉 지극한 뜻에 부합하는 것이다. 땅을 개간하고 작물을 기르는 것만 생각하고, 소요는 염려하지 말라.”
라고 하였다.
거란(契丹)에서 대리경(大理卿) 한보형(韓保衡)을 보내 왕을 책봉하였는데, 조서(詔書)에서 이르기를
“동역(東域)의 땅에 있으면서 북극성[北宸]을 에워싼 별과 같고, 우리나라를 받드는 마음을 더욱 견고히 하니 책서(策書)에 공훈을 기록함이 마땅하다. 멀리 사신을 보내 비로소 왕의 봉작을 열어주니, 이를 은혜로운 영광으로 여겨 마땅히 공경히 받들고 황공하게 여겨야 합니다. 지금 대리경 한보형을 그곳에 보내 그대에게 관고(官告) 1통(通)과 칙첩(勑牒) 1도(道)를 내리니, 도착하면 공손히 받도록 하라.”
라고 하였다. 관고(官告)에서 이르기를,
“짐은 하늘의 큰 도를 체득하고 옛날의 보편적인 규범을 따르며, 안으로는 황가(皇家)로서 변방까지 위무하는 정성을 받들고 밖으로는 왕국에 정벌할 수 있는 권세를 부여하였다. 해로나 육로로 가벼이 들어갈 수 없고 수레나 책이 함부로 동일하게 할 수 없으니, 백성부터 군웅(群雄)에 이르기까지 영원히 대의(大義)를 온전히 하도록 하라. 헌원씨(軒轅氏)가 무술[弧矢]을 익히고 하(夏)의 우(禹) 임금이 무기[干戚]를 진열한 것보다는 차라리 주(周)가 번병(藩屛)을 나누고 한(漢)이 산하(山河)에서 서약을 맺은 것이 낳지 않겠는가? 그대의 업적은 제환공(齊桓公)과 진문공(晉文公)보다 무겁고, 명망은 진한(辰韓)과 변한(卞韓) 지역에 떨쳤다. 선조가 규정한 복식(服飾)을 처음대로 계승하고 선왕의 공손하지 못함을 바꾸었으며, 영토를 바쳐 우리의 강역을 넓히고 옥폐(玉幣)를 받들어 여러 방면에서 으뜸이 되었다. 안정과 조화에 힘쓰고 충성과 공경을 담아내니, 마땅히 떳떳한 법전을 거행하여 특별히 총애[寵數]를 보인다.
권지고려국왕(權知高麗國王)은 자태가 옥처럼 빛나고 기량이 연못처럼 고요하다. 〈바다 위 신선이 사는 산인〉 오구(鼇丘)는 바다를 건너는 영웅을 공경하여 특별히 아름다운 수발(秀拔)을 곁에 모았고, 용수(龍宿)는 아름다운 하늘의 빛깔을 뽑아 정영(精英)한 것을 아래로 내려 보냈다. 이름난 땅을 스스로 지키며 변방의 나라[霸府]를 크게 열고, 움직이고 멈출 때 법칙[典則]을 먼저 지키며 자고 일어날 때 교만함[驕矜]을 제어할 수 있었다. 천리(千里)나 되는 왕도의 땅이 먼저 풍요로움을 이루고 일방(一方) 백성이 모두 〈내가 내리는〉 은혜로운 영광을 황공히 여기며, 세상을 빛나게 하는 아름다운 이름을 이루고 나라를 안정시킬 특이한 책략을 얻었다. 그리하여 말고삐를 부여잡고 빨리 달려가 멀리 조서[龍綸]를 보낸다. 현도(玄菟)를 전부 봉하니 일자(一字)보다 영광이 더하고, 간곡한 조서로 등급[秩]을 높이니 삼사(三師)를 아울러 보인다. 귀함에 따라 계급을 높이고 공(功)을 포상하여 호(號)를 아름답게 하며, 토지[井賦]를 넓혀서 충성[忠庸]을 힘써 권면한다.
아아! 별은 북극성을 함께 지키는 길에 있어야 법도에 맞고 장강(長江)과 한수(漢水)는 조종(朝宗)의 길을 얻어야 편안히 흐르니, 이 말을 힘써 새겨서 일상의 가르침을 번거롭게 하지 말라. 가히 개부의동삼사 수태보 겸 시중 상주국 고려국왕((開府儀同三司 守太保 兼 侍中 上柱國 高麗國王) 식읍(食邑) 7000호(戶) 식실봉(食實封) 1000호에 제수하고, 아울러 수충보의봉국(輸忠保義奉國) 6자로 된 공신(功臣) 호칭을 내린다.”
라고 하였다.
5월 경자. 일본(日本) 백성 남녀 26인이 내투(來投)하였다.
가을 7월 거란(契丹)이 소부감(少府監) 진매(陳邁)를 보내 왕의 생일을 축하하였다.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 임유간(林維幹)을 거란(契丹)에 보내 책봉한 데에 사례하였다.
8월 경신. 초하루 송(宋)의 상인 유적(惟襀) 등 50인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겨울 11월 신축. 팔관회(八關會)를 열고, 〈왕이〉 신봉루(神鳳樓)에 거둥하여 술과 음식을 하사하고 법왕사(法王寺)에 행차하였다.
12월 정사. 초하루 호부시랑(戶部侍郞) 송융(宋融)을 거란(契丹)에 보내 영수절(永壽節)을 축하하고 신년을 하례하였다.
제서(制書)를 내리기를,
“절기가 대한(大寒)으로 눈보라가 매서운데, 가난하고 빈궁한 이들을 생각하니 필시 얼어 죽거나 굶주릴 것이다. 외국에서 귀화한 사람과 번국(蕃國)에서 잡혀와 고향을 그리워하는 남녀 모두 80여 인을 유사(有司)에서는 그들의 나이를 헤아려 각각 비단과 베를 하사하라.”
라고 하였다.
윤12월 정해. 초하루 거란(契丹) 동경(東京)에서 회례사(回禮使) 대견제(大堅濟) 등 9인이 왔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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