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1(太祖一) 원년

 

원년(元年, 918) 여름 6월 병진(丙辰). 포정전(布政殿)에서 즉위하여 국호(國號)를 고려(高麗)라 하고 연호(年號)를 고쳐 천수(天授)라 하였다.

정사(丁巳). 조서를 내려 이르기를,
“궁예[前主]는 4군(四郡)이 흙 무너지듯 무너지는 때를 맞아 도적의 무리를 제거하고 점점 영토를 넓혀갔다. 그러나 천하[海內]를 다 아우르는 데 미치지 못하고 갑자기 잔혹함과 포악함으로 백성을 다스렸으며, 간사함[姦回]을 가장 올바른 것[至道]으로 여기고 위협과 업신여김을 중요한 방법으로 삼았다. 요역(徭役)이 번거롭고 부세(賦稅)가 무거워 사람은 줄어들고 땅은 텅 비었다. 그런데 오히려 궁실만은 크고 장대하며 옛 제도를 따르지 않고 힘든 요역이 그치지 않으니 원망과 비난이 드디어 일어난 것이다. 이에 함부로 연호(年號)를 정하고 황제라 일컬었으며[稱尊] 처자를 살육하였으니, 하늘과 땅이 용납하지 못하고 귀신과 사람이 함께 원한을 품어 왕업의 기반을 송두리째 추락시켰으니[荒墜厥緖] 경계하지 않을 수 있으랴? 나는 여러 공(公)의 추대하는 마음에 힘입어 가장 높은 자리[九五]에서 관할하는 궁극에 올랐으니, 나쁜 풍속을 좋게 고치고 모든 것을 다함께 새롭게 만들려 한다[咸與惟新]. 마땅히 법도를 고칠 규범을 쫓을 것이며 깊이 가까운 데서 얻는 원칙[伐柯之則]을 거울삼을 것이다. 임금과 신하는 같이 물과 물고기처럼 서로 어울려 즐거워할 것[魚水之歡]이며 온 천하는 태평시대의 경사[晏淸之慶]를 도우리니 나라의 뭇 백성은 마땅히 나의 뜻을 다 알도록 하라.”
라고 하였다. 여러 신하가 절을 올리며 사례하여 말하기를, “신(臣) 등은 궁예[前主]가 다스리던 때에는 착하고 좋은 사람이 악독한 피해를 입고 죄 없는 사람이 잔악한 학대를 받아 노소(老少)가 원망하고 떠들며 원통함을 품지 않은 이가 없었습니다. 다행히 이제 머리와 목을 보전하여[得保首領] 성스럽고 현명한 임금을 만났으니, 감히 힘을 다하여 은혜에 보답하기를 꾀하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무오(戊午). 왕이 한찬(韓粲) 총일(聰逸)에게 말하기를, “궁예[前主]가 참소(讒訴)를 믿어 사람을 죽이기 좋아하였는데, 경(卿)의 관향(貫鄕) 청주(靑州)는 땅이 기름지고 사람 중에 호걸이 많아 그들이 변란을 일으킬까 두려워하여 모두 죽이고자 하였다. 이에 군인 윤전(尹全)‧애견(愛堅) 등 80여 인을 불렀는데, 모두 죄가 없는데도 포박된 채 오는 길에 있으니 경(卿)은 빨리 가서 고향으로 돌려보내라.”라고 하였다.

경신(庚申). 마군장군(馬軍將軍) 환선길(桓宣吉)이 역모를 꾀하였으므로 처형하였다.

신유(辛酉). 조서를 내려 이르기를,
“관직을 만들고 직책을 나누는 일에는 유능한 이에게 맡기는 길이 있으며, 풍속을 이롭게 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일에는 어진 이를 가려 뽑는 것이 급하다. 참으로 관리가 태만하지 않는다면 정치가 문란해질 까닭이 있을 것인가? 짐이 외람되게 천명을 받아[叨膺景命] 큰 계획을 세우고 제어하는 위치에 올랐고, 돌아보니 높은 지위에 있으면 편안히 지내기 어렵고 재주와 능력의 부족함에 대하여 생각하니 매우 두렵다. 오직 사람을 알아보는 것이 밝지 못하다는 생각에 관리의 심사에 실수가 많고, 어진 사람을 등용하지 못하였다는 탄식으로 인하여 이미 얻은 선비의 타당성이 크게 어그러질 것을 두려워한다. 자나 깨나 하는 걱정은 오직 이것뿐이다. 내외 백관이 모두 그 직무를 잘 감당할 수 있으면, 지금의 치적으로 빛날 뿐만 아니라 후대의 칭송까지 받기에 충분할 것이다. 마땅히 많은 관리[列壁]를 등용하고 여러 인재를 시험함에 있어 면밀히 선별하는 데 힘쓰고 이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하도록 하라. 내외의 모든 사람은 짐의 품은 뜻을 헤아리라.”
라고 하였다. 이에 따라 한찬(韓粲) 김행도(金行濤)를 광평시중(廣評侍中)으로, 한찬(韓粲) 금강(黔剛)을 내봉령(內奉令)으로, 한찬(韓粲) 임명필(林明弼)을 순군부령(徇軍部令)으로, 파진찬(波珍粲) 임희(林曦)를 병부령(兵部令)으로, 소판(蘇判) 진원(陳原)을 창부령(倉部令)으로, 한찬(韓粲) 염장(閻萇)을 의형대령(義形臺令)으로, 한찬(韓粲) 귀평(歸評)을 도항사령(都航司令)으로, 한찬(韓粲) 손형(孫逈)을 물장성령(物藏省令)으로, 소판(蘇判) 진경(秦勁)을 내천부령(內泉部令)으로, 파진찬(波珍粲) 진정(秦靖)을 진각성령(珍閣省令)으로 임명하였다. 이들 모두가 품성이 단아하고 방정하며 사무처리가 공정하고 성실하였고, 모두 왕조 창업 당시부터 참여하여 혁명을 도운 공훈이 있는 자들이었다. 알찬(閼粲) 임적여(林積璵)를 광평시랑(廣評侍郞)으로, 전 수순군부경(守徇軍部卿) 능준(能駿)과 창부경(倉部卿) 권식(權寔)을 모두 내봉경(內奉卿)으로, 알찬(閼粲) 김인(金堙)과 영준(英俊)을 모두 병부경(兵部卿)으로, 알찬(閼粲) 최문(崔汶)과 견술(堅術)을 모두 창부경(倉部卿)으로, 일길찬(一吉粲) 박인원(朴仁遠)과 김언규(金言規)를 모두 백서성경(白書省卿)으로, 임상난(林湘煖)을 도항사경(都航司卿)으로, 요인휘(姚仁暉)와 향남(香南)을 모두 물장경(物藏卿)으로, 능혜(能惠)와 희필(曦弼)을 모두 내군경(內軍卿)으로 임명하였다. 이들은 모두 일찍부터 업무에 숙달하였으며 청렴하고 몸을 삼가며 공무 처리에 태만하지 않고 판단하고 처리하는 데 민첩하여 사람들의 기대를 맞출 수 있는 인재로 일컬어질 만하였다.
전 광평낭중(廣評郞中) 강윤형(康允珩)을 내봉감(內奉監)으로, 전 순군부낭중(徇軍部郞中) 한찬(韓粲) 신일(申一)과 임식(林寔)을 모두 광평낭중(廣評郞中)으로, 전 광평사(廣評史) 국현(國鉉)을 원외랑(員外郞)으로, 전 광평사(廣評史) 예언(倪言)을 내봉리결(內奉理決)로, 내봉사(內奉史) 곡긍회(曲矜會)를 평찰(評察)로, 전 내봉사(內奉史) 유길권(劉吉權)을 순군낭중(徇軍郞中)으로 임명하였다. 그 밖의 사(司)와 성(省)에도 각각 랑(郞)과 사(史)를 두어 인원수를 갖추어 하나도 빠진 곳이 없게 하였다. 이는 개국 초기에 훌륭한 인재를 잘 뽑아 여러 직무를 원활히 수행하고자 한 것이었다.

임술(壬戌) 한찬(韓粲) 박질영(朴質榮)을 시중(侍中)으로 삼았다. 소판(蘇判) 종간(宗偘)은 젊어서 승려가 되어 간사함을 일삼아 행하였으며, 내군장군(內軍將軍) 은부(犾鈇)는 어려서 머리를 깎이고 목에 칼을 씌우는 형벌[髡鉗]을 받았다. 교묘한 말로 용서받고 모두 궁예(弓裔)의 총애를 얻었으며, 참소[浸潤]를 잘 하여 착한 사람들을 많이 모함하였기 때문에 처형하였다.

계해(癸亥) 은사(隱士) 박유(朴儒)가 와서 알현하니 관(冠)과 대(帶)를 하사하였다.

을축(乙丑). 조서를 내려 이르기를,
“나라를 위해서는 마땅히 절약과 검소에 힘써야 하니, 백성이 부유하고 창고가 넉넉하면 비록 홍수나 가뭄으로 기근이 들더라도 근심할 필요가 없다. 내장(內莊)에 있는 것과 동궁(東宮)의 식읍(食邑)에 쌓아둔 곡식은 오래되어, 반드시 썩고 손상된 것이 많을 것이니 이를 위해 내봉낭중(內奉郞中) 능범(能梵)을 심곡사(審穀使)로 임명하겠다.”
라고 하였다. 내봉원외랑(內奉員外郞) 윤형(尹珩)을 내봉낭중으로, 내봉사(內奉史) 이긍회(李矜會)를 내봉원외(內奉員外)로 임명하였다.

무진(戊辰) 백서성공목(白書省孔目) 직성(直晟)을 백서낭중(白書郞中)으로, 순군낭중(徇軍郞中) 민강(閔剛)을 내군장군(內軍將軍)으로 임명하였다. 조서를 내려 이르기를,
“짐(朕)이 듣건대 기회를 타고 제도를 고칠 때는 오류를 바로잡고 상세한 것을 밝혀야 하며, 풍속을 이끌고 백성을 가르칠 때는 명령 내리기를 신중히 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궁예[前主]가 신라(新羅)의 품계와 관직, 군읍(郡邑)의 호칭을 모두 천하고 촌스럽다[鄙野]고 하여 고쳐서 새로운 제도를 만들고 여러 해 동안 시행하였으나, 백성들이 잘 알지 못하고 미혹되고 혼란을 일으키게 되었다. 이제 모두 신라(新羅)의 제도를 따르되, 이름과 뜻을 알기 쉬운 것은 새 제도를 따르도록 하라.”
라고 하였다.

기사(己巳). 마군대장군(馬軍大將軍) 이흔암(伊昕巖)이 반역을 꾀하였으므로 길거리에서 처형하여 버려놓았다.

가을 7월 임신(壬申). 광평랑(廣評郞) 능식(能寔)을 순군낭중(徇軍郞中)으로 임명하였다.

계사(癸巳) 광평시랑(廣評侍郞) 순필(荀弼)이 병으로 인하여 면직(免職)하자, 병부경(兵部卿) 열평(列評)이 대신하게 하였다.

병신(丙申) 청주(靑州)의 영군장군(領軍將軍) 견금(堅金)이 와서 알현(謁見)하였다.

전 병부경(兵部卿) 직예(職預)를 광평시랑(廣評侍郞)으로 임명하였다.

8월 기유(己酉). 여러 신하에게 유시(諭示)하기를, “짐(朕)은 각 지방의 도적이 짐(朕)의 즉위 소식을 듣고는 혹시 변방에서 근심을 일으킬 것이 염려된다. 각 지방에 단사(單使)를 보내 넉넉한 선물과 겸손한 말로서 은혜를 베풀고 화해하려는 뜻을 보이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귀부(歸附)하는 자가 과연 많았으나 견훤(甄萱)만은 교빙(交聘)하기를 기꺼워하지 않았다.

경술(庚戌). 삭방(朔方)의 골암성수(鶻岩城帥) 윤선(尹瑄)이 귀부(歸附)하였다.

신해(辛亥). 조서(詔書)를 내려 이르기를,
“궁예[前主]는 백성을 한낱 지푸라기처럼 여기고 오직 자기의 욕심만을 따랐다. 그리고 참위설(讖緯說)을 믿어 갑자기 송악(松嶽)을 버리고 부양(斧壤)으로 되돌아가 머물며 궁궐을 세우니, 백성은 토목공사에 시달려 농사철을 잃어버렸다. 여기에 더하여 기근이 거듭되고 돌림병이 뒤이어 일어나니 가족을 버리고 등지다가 길에서 굶어죽는 자가 서로 바라볼 지경이었다. 세포(細布) 1필로 겨우 쌀 5승 밖에 살 수 없어서, 백성은 자기 몸을 팔거나 자식을 팔아 남의 노비(奴婢)가 되고 있으니 짐은 매우 괴롭다. 소재를 파악해 자세하게 기록하여 보고하라.”
라고 하였다.

이에 1천여 구를 확보하여 내고(內庫)의 포백(布帛)으로 몸값을 치러 원래 신분으로 환원시켰다. 또 조서를 내려 이르기를,
“신하들 가운데 제왕의 창업을 도울 때 빼어난 책략(策略)으로 세상을 뒤덮는 높은 공훈을 세운 자에게 봉토[茅土]를 나누어 주고 또한 높은 품계와 관직을 내려 포상하는 것, 이는 백대(百代)의 상전(常典)이자 천고(千古)의 큰 규정이다. 짐(朕)은 미천한 출신으로 재주와 식견이 용렬하고 낮은데도 진실로 여러 사람의 바람에 힘입어 왕위에 올랐으니[克踐洪基], 폭군을 폐위시킬 때 충신으로서의 절개를 다한 사람에게는 마땅히 상을 주어 그 공로를 기려야 한다. 홍유(洪儒)·배현경(裴玄慶)·신숭겸(申崇謙)·복지겸(卜智謙)을 1등으로 삼고 금은의 그릇, 수놓은 비단옷, 화려한 이부자리, 능라(綾羅)와 포백(布帛)을 차등 있게 내린다. 견권(堅權)·능식(能寔)·권신(權愼)·염상(廉湘)·김락(金樂)·연주(連珠)·마난(麻煖)을 2등으로 삼고 금은의 그릇, 수놓은 비단옷, 화려한 이부자리, 능라(綾羅)와 포백(布帛)을 차등 있게 내린다. 그리고 3등 공신 2,000여 인에게는 각각 능라(綾羅)·포백(布帛)과 미곡(米穀)을 차등 있게 내린다. 짐(朕)이 그대들과 함께 백성을 구제하려고 결국 신하의 절개를 지키지 못하고 이것을 공으로 삼게 되니 어찌 나의 덕에 부끄러움이 없겠는가? 그러나 공적이 있는데 상을 내리지 않으면 장래 사람을 권장할 수 없으므로 오늘의 상이 있게 된 것이니 그대들은 짐(朕)의 뜻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라고 하였다.

견훤(甄萱)이 일길찬(一吉粲) 민합(閔郃)을 보내어 즉위를 축하하자 광평시랑(廣評侍郞) 한신일(韓申一) 등에게 명하여 감미현(甘彌縣)에서 영접하도록 하였다. 민합(閔郃)이 이르자 후하게 대접하고 돌려보냈다.

갑인(甲寅). 병부경(兵部卿) 훤식(萱寔)을 내봉경(內奉卿)으로 임명하였다.

계해(癸亥). 웅주(熊州)·운주(運州) 등 10여 개의 주현(州縣)이 모반하여 백제(百濟, 후백제)에 붙자 전 시중(侍中) 김행도(金行濤)에게 명하여 동남도초토사 지아주제군사(東南道招討使 知牙州諸軍事)로 임명하였다.

병인(丙寅). 창부낭중(倉部郞中) 유문율(柳問律)을 광평낭중(廣評郞中)으로 임명하였다.

9월 을유(乙酉). 순군리(徇軍吏) 임춘길(林春吉) 등이 반역을 꾀하였으므로 처형하였다.

경인(庚寅). 순군낭중(徇軍郞中) 현율(玄律)을 병부낭중(兵部郞中)으로 임명하였다.

계사(癸巳). 전 시중(侍中) 구진(具鎭)을 나주도대행대시중(羅州道大行臺侍中)으로 임명하였는데, 구진(具鎭)이 궁예[前主] 때 오랫동안 힘들었다고 사양하면서 가기를 꺼려하였다. 왕이 불쾌하게 여기면서 유권열(劉權說)에게 말하기를, “예전에 내가 험난한 일을 두루 겪으면서도 일찍이 고생했다고 말하지 못한 것은 참으로 위엄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이다. 이제 구진(具鎭)이 굳이 사양하며 가지 않으려 하니 옳다 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유권열(劉權說)이 대답하기를, “상으로 선행을 권장하고 벌로 악행을 징계해야 하니, 마땅히 엄격한 형벌을 시행하여 여러 신하에게 경계해야 합니다.”라고 하니 왕이 그 말을 옳게 여겼다. 구진(具鎭)이 두려워하여 사죄하고 드디어 갔다.

갑오(甲午). 상주(尙州) 반란군의 우두머리 아자개(阿字盖)가 사신을 보내어 귀부(歸附)해왔다. 왕이 의식(儀式)을 갖춰 맞이하도록 명령하자 구정(毬庭)에서 의식을 연습하려고 문무관이 모두 차례에 따라 늘어섰는데, 광평낭중(廣評郞中) 유문율(柳問律)과 직성관(直省官) 주선갈(朱瑄劼)이 서열을 다투었다. 왕이 말하기를, “사양(辭讓)은 예(禮)의 으뜸이고 공경(恭敬)은 덕의 근본이다. 이제 예로써 손님을 맞이하여 장차 후일의 성과를 보려 하는데, 유문율(柳問律)과 주선갈(朱瑄劼)이 자리를 다투니 어찌 삼가고 공경하는 것이겠는가? 마땅히 모두 변방으로 보내어 그 죄를 드러내도록 하라.”라고 하고, 순군낭중(徇軍郞中) 경훈(景訓)을 유문율(柳問律)을 대신하여 광평낭중(廣評郞中)으로 임명하였다.

을미(乙未). 전 내봉감(內奉監) 김전영(金篆榮)과 능혜(能惠)를 모두 내군경(內軍卿)으로 임명하였다.

병신(丙申). 여러 신하들에게 유시(諭示)하기를, “평양(平壤)은 옛 도읍으로 황폐한 지 비록 오래지만 터는 그대로 남아 있다. 그러나 가시덤불이 무성해 번인(蕃人)이 그 사이를 사냥하느라 옮겨 다니고 이로 인하여 변경 고을을 침략하니 그 피해가 매우 크다. 마땅히 백성을 이주시켜 그곳을 실하게 하여 변방을 튼튼하게 함으로써 백세(百世)의 이익이 되도록 해야 한다.”라고 말하였다. 드디어 대도호(大都護)로 삼고 사촌 동생[堂弟] 왕식렴(王式廉)과 광평시랑(廣評侍郞) 열평(列評)을 보내어 수비하게 하였다.

정유(丁酉). 진각성경(珍閣省卿) 유척량(柳陟良)은 혁명이 진행되던 무렵에 여러 관료가 창졸간에 흩어져 달아났으나, 홀로 본성(本省)을 떠나지 않고 지켜 맡은 창고에서 잃은 것이 없었으므로 특별히 광평시랑(廣評侍郞)으로 임명하였다.

겨울 10월 경신(庚申). 수의형대경(守義刑臺卿) 능률(能律)을 광평시랑(廣評侍郞)으로, 광평시랑 직예(職預)를 내시서기(內侍書記)로 임명하였다.

신유(辛酉). 청주수(靑州帥)인 파진찬(波珍粲) 진선(陳瑄)이 그의 동생 선장(宣長)과 더불어 반역을 꾀하였으므로 처형하었다.

11월 처음으로 팔관회(八關會)를 열고 의봉루(儀鳳樓)에 행차하여 관람하였고, 해마다 하는 것을 상례(常例)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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