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손순(孫順)의 처

 

자식 묻고 부모 봉양… 남편 뜻 따른 ‘효부’  

▲ ‘삼국유사’ 효선편의 ‘손순매아’ 부분

 

손순(孫順)의 처는 신라 제42대 흥덕왕(興德王, 재위 826∼836년)대 경주 모량리(牟梁里) 사람이다. 손순(孫順)의 처는 ‘삼국유사’의 ‘손순(孫順)이 아이를 묻다(손순매아, 孫順埋兒)’ 조에 나온다. 손순(孫順)은 ‘손순(孫舜)’이라고도 하는데, 아버지는 손학산(孫鶴山), 어머니는 운오(運烏)이다. 아버지가 죽자 아내와 더불어 남의 집에 품을 팔아 얻은 곡식으로 늙은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그런데 손순(孫順)의 어린 자식이 어머니의 음식을 자꾸 빼앗아 먹자 아내에게 말하였다.

“아이는 다시 얻을 수 있으나 어머니는 다시 얻기 어렵지 않소. 아이가 어머니의 음식을 자꾸 빼앗아 먹어서 어머니가 굶주리게 되시니 마음이 아프오. 차라리 이 아이는 묻어 버리고 어머님이 배부르시게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소.”

 

손순(孫順)은 자식을 버려서 어머니의 배를 부르게 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결국 손순(孫順)과 그의 아내는 손순(孫順)이 말한 대로 아이를 업고 취산(醉山) 북쪽 교외로 갔다. 아이를 묻기 위해 땅을 팠는데, 그곳에 기이한 돌종(석종, 石鐘)이 묻혀 있었다. 

 

부부는 이상하게 여겨 돌종을 파내어 나무 위에 걸었다. 종을 쳐보니 그 소리가 은은하였다. 아이를 묻고자 팠던 땅에서 이처럼 상서로운 물건을 얻은 것을 보니 이 또한 아이의 복인 것으로 여겨져 아이를 묻지 않고 집으로 돌아왔다. 종을 집의 들보에 달고 두드리니 그 소리가 대궐에 들렸고, 이에 왕이 종소리를 듣고 사자를 보내었다. 

 

왕은 종에 얽힌 이야기를 들어 그 사유를 자세히 알고는 손순의 효가 천지에 귀감이 된다고 하며 효행에 대한 포상으로 집 한 채와 해마다 벼 50석을 주었다. 후에 손순은 그의 옛 집을 희사하여 절을 삼아 홍효사(弘孝寺)라 하고 석종을 안치하였다고 한다.

 

손순매아(孫順埋兒) 설화는 부모를 봉양하기 위해 자식을 희생시키려 하는 효 설화의 대표적인 일화이다. ‘삼국유사’ 효선편(孝善篇)에서는 효자인 손순(孫順)이 주인공이다. 이 일화에서는 손순(孫順)의 어머니와 아내의 생각에 대해서는 기록하고 있지 않다. 이처럼 손순(孫順)의 효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지만 손순(孫順)의 아내가 품팔이를 하고, 아이를 묻으러 가고, 다시 돌아오는 과정에 모두 동행하고 있다. 손순(孫順)의 생각과 행위가 손순(孫順)이 독단적으로 결정하고 행한 것이 아님을 짐작할 수 있다. 이를 통해 부모에 대한 효를 우선시하는 신라인의 사고를 엿볼 수 있다. 또한 지극한 효(孝)는 현세에서는 구체적으로 왕의 포상, 내세에서는 최종적으로 불교로 귀의라는 선(善)에 도달한다는 관념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현주 한국고대사 전공·성균관대 아주대 강사 출처; 이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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