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크로드 사막길 향해서⑤ 천산남로의 보물 쿠차지역 석굴

 

동아시아 사회 불교적 특징의 연원을 찾아서

 

투라 석굴 21호(신2호) 벽화. 돔형의 천장엔 중앙의 연꽃을 중심으로 13명의 공양보살상이 법륜모양으로 배열돼 있다. 약탈과 훼불을 피해 온전히 보전된 쿰투라의 대표 석굴로 쿠처불교의 융성함과 아름다움이 엿보인다. 


무자트 강가에 위치한 ‘쿰투라’
쿰투라 석굴은 조금 앞서 조성된 인근의 키질 석굴과 더불어 차 지역에서 가장 큰 규모의 석굴로 손꼽히는데 두 석굴 모두 풍부한 물, 바로 이 무자트 강가에 위치하고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한지연 교수는 “물이 부족한 오아시스 국가에서 이처럼 강을 중심으로 사원을 조성했다는 것은 불교에 대한 국가적인 뒷받침과 국민들의 열렬함이 있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일 것”이라고 분석한 바 있다.

69호 석굴에는 1500여 년 전 쿠처의 고대 문자가 여전히 선명하고, 58호 석굴에는 그을음 속에서 찾아낸 벽화가 그윽한 빛을 뿜고 있다. 특히 58호굴의 벽화는 심한 그을음 덕에 유럽인들의 약탈을 피해갈 수 있었다. 그 아래서 모습을 드러낸 벽화는 당시 쿠처인들이 상상하던 천상, 즉 우주의 모습이었다.

쿰투라 석굴은 조성 시기에 따라 크게 3종류로 구분된다. 전성기 쿠처 불교의 모습을 보여주는 5~7세기 쿠처시기 석굴, 당나라의 세력권에 들면서 한족의 영향이 유입된 8~9세기의 중원불교시기 석굴, 그리고 당의 쇠퇴 후 위구르족이 이 지역의 새로운 패권자로 등장하기 시작한 10~11세기까지의 위구르족 불교 시기 석굴이다. 특히 8세기 무렵부터 신장웨이우얼에 유입된 위구르족은 11세기까지 불교를 신봉했는데 그들의 독특한 문화가 이곳 석굴 벽화에도 반영됐다.

 

썬무싸이무 석굴.

 

파괴의 흔적이 고스란히
타이타이얼 석굴은 현재 6세기 이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천사도와 불완전한 간다라 양식의 불상이 출토되었다. 석굴 구조는 쿠차의 초기 석굴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인다. 국내에서는 이곳에 대한 상세한 조사가 이루어진 바가 없어서 실제 조사할 당시 석굴 위치를 찾는 데 상당히 어려움이 많았다. 키질 석굴이나 쿰투라 석굴 등 석굴 연구원이 안내하는 데 꽤 어려움을 겪어 주변 지역 주민들과 함께 찾았으나 이곳을 찾았던 조사단이 없었기 때문에 많은 시간이 소비되었다.

타이타이얼 석굴 역시 파괴의 흔적이 남아 있다. 다만 두 개의 석굴에는 문을 달아 놓았는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썬무싸이무 석굴은 ‘하루에 한 번 비가 온다’라는 의미가 있는 석굴이다. 그만큼 이 지역에 비가 많이 내리면서 현재는 지반이 많이 허물어진 상태이나 석굴의 흔적은 남아 있다. 중앙에 대상굴(大像窟)의 흔적이 보이며 승방굴이 주를 이룬다. 대상굴의 흔적은 크게 보이는데, 흔적조차 남지 않고 파괴되었다.

마하바자 석굴.


마자바하 석굴은 비교적 평지에 지어진 사원 형태의 석굴이다. 승방굴의 규모도 상당히 크며 창고로 사용했던 석굴도 발견되고 있다. 그러나 현재 내부에 벽화나 불상의 흔적은 없고 지역 주민들의 거주처로 사용된 흔적, 즉 석굴 내부에서 불을 사용한 흔적이나 최근의 생활용품이 쓰레기로 남아 있다.

‘여인이 사는 곳’ 키질가하
키질가하 석굴은 쿠차 시내에서 서북쪽으로 12㎞ 떨어진 곳에 위치한 곳으로 4~8세기 사이에 만들어졌다. 현재까지 61개의 석굴이 확인됐고, 보존이 잘 된 것은 38개, 벽화가 남아 있는 것은 11개이다. 이곳은 2000년 전 전한 때 한 무제가 진출했던 길이며 서역 북부 오아시스의 최대 석굴이다. '키질가하'는 위구르어로 '여인이 사는 곳'이라는 뜻이다. 이들 석굴을 키질가하 천불동이라고 한다. 쿠차 시내에서 서북쪽으로 12㎞ 떨어진 곳에 위치한 키질가하 석굴은 4세기에서 8세기 사이에 만들어졌다. 현재까지 61개의 석굴이 확인됐고 11개 벽화가 남아 있다.

당시 한 무제는 이 지역을 지키기 위해 둔전병을 두고 관리했었다. 대부분이 방주형 석굴로 인도의 영향을 받았다. 석굴에는 예배를 위한 차이티아 굴과 승려의 수행, 생활을 위한 비하라 굴이 있는데, 키질가하 석굴은 대부분 차이티아 굴이 많다. 27호와 28호 석굴은 스님들이 기거했던 요사채로 그을린 흔적이 있다. 이 석굴은 고대 구자국 왕실에서 개착하고 왕실의 사원 역할을 했던 곳이다.

국교로서의 연원 찾을 수 있어
왕실 사원이었다는 점은 왕실에서 지원했다는 점과 더불어 국가 사찰이 존재했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는 곧 인도와는 다르게 중국, 한국 등에 왕실 사원이 존재했고 국가적 차원의 종교 역할이 중시되는 등 동아시아 사회의 불교적 특징의 연원이 이곳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석굴은 대부분 중심주굴의 예배굴과 일반적인 승방굴로 나뉘고 있다. 특히 30굴은 키질 천불동의 구조적 특성을 거의 그대로 갖고 있어 중심주 양옆의 회랑을 지나면 뒤편에 열반상이 있던 흔적이 보이고, 천장에는 악기를 연주하는 8구의 비천상이 벽화로 남아 있기도 하다. 이 모습은 공개를 거부하고 있어서 현지인과 박물관 연구원의 설명으로 알 수 있었다.

 

키질가하 봉화대.


키질가하 석굴을 나오면 바로 키질가하 봉화대가 있다. 장방형의 기저부는 동서 간 길이 6m, 남북 간 폭 4m이다. 높이 15m에 달하는 봉화대는 흙벽돌을 쌓아 만들었다. 비교적 바람이 센 곳에 세워져 바람과 비의 침식작용에 의해 봉화대 남쪽이 움푹 패 있다.

1400년 전인 한 대에 지어졌으며 한나라가 서역을 통치할 때 연락을 담당하는 중요한 기능을 수행하였다. 당시 이 봉화대에 불을 붙이면 다음 봉화로 이어져 수도 장안까지 연결됐다. 낮에는 연기를 피우고 밤에는 불을 피워 위급함을 알렸는데, 사막 지역에는 불을 피울 나무가 없어서 건조된 늑대의 배설물로 불을 피웠다고 한다. 불상들은 사라졌는데 봉화대의 흔적만이 남아 있으니 가슴이 아프다.

문무왕 동국대 와이즈캠퍼스 외래교수 출처. 불교신문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