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부인(令
윤보선 대통령 영부인… 퇴임후 사회운동가로
공덕귀(孔德貴, 1911~1997년)는 1911년 경남 통영에서 7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아버지 공도빈(孔道彬)은 은 대한제국의 군인이었고, 어머니 방말선(方末善, 일명 공마리아)은 남편과 사별한 뒤 삯바느질로 어린 아이들을 키웠다.
1936년 동래 일신고등여학교를 최우등으로 졸업한 뒤 일본 요코하마(橫濱)공립신학교에 입학했다. 그때 박용길(문익환 목사의 부인)을 만나 공부와 신앙생활을 함께했다. 1936년 학교를 졸업하고 김천 황금동교회의 전도사로 부임했다. 그러나 교회 설교까지 개입하며 트집을 잡는 일제의 탄압으로 다시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1943년 일본 동경여자신학전문학교 4학년에 편입해 공부를 했다.
1946년에는 조선신학교(현 한신대) 여자신학부의 전임강사가 되었다. 이때 주변 권유로 당시 서울시장이던 해위(海葦) 윤보선(尹潽善)과 결혼했다. 39세 신부 공덕귀(孔德貴)는 신랑의 안국동 집 대청에서 함태영 목사의 주례로 결혼식을 올렸다.
1960년 4·19혁명으로 야당이던 민주당이 정권을 잡았다. 민주당 구파의 영수 윤보선(尹潽善)은 대통령으로 취임했고, 신파의 영수 장면(張勉)은 의원내각제하(下)의 총리가 되었다. 그 뒤 공덕귀(孔德貴)의 짧은 경무대(현 청와대) 생활이 시작되었다. ‘혁명정신’을 계승해 참된 민주주의를 이루어야 한다는 요구가 빗발치던 시기였다. 이때 공덕귀(孔德貴)는 공식행사 참석 등 영부인으로서 해야 할 일 외에는 눈에 띄는 사회활동은 하지 않았다. 당시를 회고한 글에서는 “경무대 안에 앉아 있는 나는 조롱에 든 새와 같이 소식을 잘 듣지 못했다. 단지 날이면 날마다 학생들의 데모가 계속되고 있다는 해위와 측근들의 걱정소리만 듣고 있었다”고 했다.
공덕귀(孔德貴)는 경무대의 안살림을 맡으며 검소한 일상을 보냈다. 그러나 1961년 5·16군사쿠데타로 정세가 급변하자, 1962년 3월 22일 윤보선은 하야 성명을 발표했다. 그 다음 날 가족들은 경무대를 떠났다.
공덕귀(孔德貴)는 다시 야당 정치인이 된 남편을 돕는 한편, 한국 사회 민주화 운동과 여성 인권 운동에 적극 나섰다. 1974년 민청학련(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사건으로 윤보선이 실형을 선고받은 뒤 구속자가족협의회 회장을 맡았으며, 1976년에는 ‘3·1사건 가족대책협의회’ 회장으로 남편의 석방운동을 했다. 1977년에는 한국교회여성연합회 회장이 되어 여성노동자들의 생존권 투쟁을 지원하는 데 혼신의 힘을 다했다. 한국 민주화 운동 역사의 한가운데 있었던 공덕귀(孔德貴)는 1997년 안국동 자택에서 눈을 감았다.
김은경 숙명여대 아시아여성연구소 연구교수 출처; 이투데이
'세상사는 이야기 > 한국여성인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여성 변호사 이태영(李兌榮) (0) | 2017.11.28 |
---|---|
의상 디자이너 최경자(崔敬子) (0) | 2017.11.28 |
여성정치인 임영신(任永信) (0) | 2017.11.27 |
조선 향복(香福, 香卜) (0) | 2017.11.26 |
조선 종대(終代) (0) | 2017.11.26 |